여의도를 지나 영등포의 병원들이 즐비한 거리를 거닐며 무의식적이지만 의사로 추정되는 행인들을 관찰하며 지나쳐갔다.
그의 이미지를 닮은 흰 피부에 마르고 금욕적인 인상의 단정한 남자들과 그를 닮진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안경을 끼고 있을 때의 그를 닮은 남자들.
그리고 첫눈에 반하지 않았음에도 자신도 모르게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던 그를 닮은 핏줄 선연한 남자들의 모습을 응시한다.
이렇게 느긋하게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은 너무나 오랜만의 일이라 솔직하게 사람들을 관찰하던 시선조차 어쩐지 무뎌진 듯한 기분이다.
솔직하고 변태적이던 황 휘는 어디로 간 걸까.
나도 모르게 샐쭉한 웃음을 지어버렸다.
몇 시간 되지도 않아 그립고 보고싶어지는 얼굴.
한참을 그렇게 행인을 뚫고 걸어가다보니 어느새 발길은 영등포 역 앞에 멈춰
있었다.
그곳엔 언제나 붙박이마냥 행인을 기다리는 헌혈차가 정차해 있었고,
나는 오랜만에 또 그와의 추억을 꺼내며 웃는다.
하얗고 말간,
전혀 나이와 맞지 않게 날라리 같던 곱슬머리의 청년을 떠올리며 슬그머니 눈매가 얇게 접혀든다.
‘여기 있을까?’
나와 의도적으로 엮이려 했던 그가 어쩐지 이곳에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럴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쁜 그가 예전처럼 이런 곳에 와 있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그가 있을 거라고 믿어버린다.
“있을 거야.”
이제는 입으로 작게 속삭이기까지 하면서 천천히 걸어가던 발걸음을 종종걸음 친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한 번에 열 걸음을 건너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헌혈차 앞에 서서 숨을 고른다.
“학, 학, 학, 헌혈……하러 왔는데요.”
흰 색 티셔츠와 검은 색 면바지를 입고 있는 내 모습이 왜소해 보였던지 헌혈원 직원의 고개가 살짝 부정적으로 내저어진다.
“안 돼요?”
“안색이 안 좋은데…….헌혈 할 수 있겠어요?”
‘내가 아무리 병원에서 탈출했기로서니, 헌혈도 못하겠어요?’
샐쭉하게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뛰어와서 그래요. 빨리 뛰어와서.”
나의 이런 말에도 헌혈원 직원은 한 번 더 내게 묻는다.
“괜찮아요?”
“괜찮다니까요.”
“정말로 괜찮아요?”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집요한 헌혈원 직원의 질문.
‘평소 때 이 정도는 아니었었는데…….대체 왜 이러는 거지?’
의구심은 헌혈차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단숨에 사라졌다.
두 개의 카메라를 들고 있는 카메라맨들과 한 개의 EMG 카메라를 든 채로 앉아 헌혈을 하고 있는 익숙한 남자의 모습과 유명 여배우 한 명이 헌혈원 직원들이 입는 유니폼을 입은 채로 서 있었다.
“어……? 당신은?”
안경을 쓰고 노란 곱슬머리를 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얼핏 그와 흡사했다.
그가 이젠 노랑머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었다면 그라고 착각할만한 얼굴로 느물거리는 표정을 한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 여기서 보네요? 퇴원 한 거예요?”
“그러는 그쪽은 촬영…….인가요?”
“음. 그렇죠. 보시다시피, 이렇게.”
“아~”
“형은 어디다 두고 여기 온 거죠?”
“형이요?”
“네. 형은 어디 있죠?”
‘일하고 있겠죠.’
남자는 내 표정이 못마땅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장난스럽게 쳐다보다말고 예고도 없이 ‘벌떡’ 일어섰다.
“병원 탈출 한 거예요?”
“예?”
“형 모르게 탈출 했어요?”
약간 흥분한 듯이 묻는 남자의 말에 나는 격렬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탈출이라니요. 아니거든요?”
“그럴 리가.”
남자가 또 한 번 피식, 실없이 웃는다.
‘저런 웃음은 그의 전매특허 웃음인데. 왜 저렇게 웃는 거지?’
괜히 아련한 기분이 들자 남자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게 날아간다.
“어이쿠, 무서워라.”
“촬영 잘 하세요.”
우연히 그를 만날 거라는 기대감이 사라지자 헌혈차에서 더 이상 노닥거릴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바보. 이런 때에 몰래 쫓아와주면 정말 좋을 텐데. 덜 바쁠 거라면서 계속 방치하는 거야?’
“벌써 가게요?”
“가야죠.”
“아쉽네.”
“설마, 그럴 리가.”
“그렇거든요?”
남자가 나의 말투를 따라하며 낄낄거린다.
그와 몹시 닮은 모습으로 말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져 버렸다.
“그 사람 흉내 내지 말아요. 이상해.”
“내가 누굴 따라한다는 거죠?”
까칠한 내 말에 남자도 까칠하게 맞받아친다.
“그 사람이요. 구덕 씨.”
“아~ 내가 형을 따라한 것 같나요?”
“네.”
나도 모르게 확신에 찬 대답이 튀어나왔다.
“내가 형을 왜 따라하죠?”
“그러니까요. 왜일까요?”
나는 입원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보았던 남자를 회상하며 확신에 찬 질문을 내뱉었다.
“단지 잃었던 형을 다시 찾게 된 것 때문에 따라하는 건가요? 그것도 몇 달이나 지난 이전의 모습으로……? 그땐 당신이 형을 찾지도 않은 때였을 텐데. 그거 좀 이상하잖아요.”
“그건 그렇죠. 이게 우연인 게 아니라면.”
“하지만 우연이라고 하겠죠?”
“물론.”
“나는 안 믿을 테고요.”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노려봤고, 옆에서 멍하니 이 모습을 관망하고 있던 여배우는 어느 순간부터 난처한 듯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