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만남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예사로 넘겼던 우리들의 만남.
‘그는 어째서 나와의 첫 만남을 헌혈원에서 시작했던 거지? 단순히 내가 가는 곳이라서 그런 것이었나?’
내가 그를 관찰 했던 것만큼 그도 나를 관찰 해 왔다는 가정 하에 그의 행동을 짚어나가자 예사로 넘긴 일들이 예삿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의 팔뚝을 보며 실망하고 또 좋아하던 일련의 시간동안 그 역시 나를 관찰하는 시선이 있었다.
드러나지 않아서 당시엔 잘 몰랐지만 우연처럼 마주칠 때마다 그는 안타까운 듯 인상을 구기며 내 팔을 쓰다듬곤 했었고, 그때는 단순히 그가 다분히 능글맞은 성격의 남자라는 생각을 했던 터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것이 그의 본래 성격이 아니고 실제 그의 성격은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지금의 모습이라면?
처음에 보이지 않았다가 어느 순간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의 혈관처럼 그의 본성도 한 꺼풀 숨겨져 있었던 것이라면?
어떤 불가피한 일들로 인해서 그런 성격으로 보였던 것뿐이라면?
아니, 그것보다 그가 정말로 간절하게 내게 접근 한 이유는 뭐지?
뜬금없이 내게 접근할 이유가 없다.
그와 내게 아버지라는 연결고리가 있다고 해도 그가 나에게 접근할만한 타당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또한 그는 나를 그 오랜 시간동안 찾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내게 주식을 증여 한 날로부터 상당기간동안 나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로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내가 그를 만났던 기억은 지금까지 이 몇 달 간의 시간이 전부이다.
나를 지켜보고 따라다녔다 하더라도 최대 1년에서 2년 사이.
오랜 시간동안 지켜 봐 왔던 느낌은 아니다.
나를 찍은 이유는 뭐지?
정말 나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이 그의 병 때문이라면, 나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그를 끌어들이게 된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
혹시, 그도 나처럼 혈관에 집착하는 성향인건가?
그것도 병 때문에?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는 나만큼 혈관에 특별히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으니까.
그는 내 팔뚝을 쳐다본다기보다 가끔 나를 강렬하게 쳐다보았고, 가끔 뜬금없이 내 팔을 잘근잘근 아프지 않게 씹어대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를 이상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깨무는 것에 유난히 집착하는 성향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자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플 정도로 여기저기 깨무는 것을 즐기는 그런 성향을······.음, 생각하니 좀 변태 같긴 하다. 하지만 나도 숨겨진 변태성이라면 그보다 덜하지 않으니 이 정도는 넘어갈 수 있으려나?
하지만 정말 이런 단순한 변태성이나 병 때문에 내게 한 눈에 반해서 쫓아다녔다고만 볼 순 없다.
그는 날······. 어떻게 단숨에 알아본 것이지? 내가 아버지의 딸이라곤 하지만 아버지와 별달리 닮은 구석도 없었고, 17세 전후로 내 외모가 급격히 달라졌기 때문에 이전에 그가 나를 본 적이 있다 하더라도 나를 그리 쉽게 찾아낼 순 없었을 것이다.
사채업자들에게 쫓겨 다녔던 나라서 도망치는 것엔 이골이 나 있다.
자신하건데, 작정하고 도망친다면 나는 그 누구에게도 덜미를 잡히지 않고 도망칠만한 방법을 백가지도 넘게 알고 있다.
나는 그동안 그 백가지 중에 적어도 40가지 이상은 써먹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뛰고 나는 재벌가와 인연이 있고(실은 후계자라고 하니, 더 힘이 막강할 수도 있지만 아직은 그의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알 수 없으니 이것은 일단 접어둔다.) 능력이 출중한 의사이자 이사장이라고 해도, 쉽게 나를 찾을 수는 없었을 거라는 말이다.
여전히 내가 모르는 곳에서 그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를 이렇게 단숨에 찾아내서 들었다 놨다 할 정도는 아니란 말이야. 그럼 대체 그는 어떻게 날······?”
그의 꺼림칙한 친동생을 찾아가 물어보는 게 마음에 들진 않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조카라는 그 남자는 이후에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었고, 연락처와 대략적인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친동생 하나뿐이니······. 다소 위험이 따르더라도 친동생에게 묻는 수밖에 없다.
‘당신이 후련하게 말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바랄 걸 바라야지. 그때 분위기로 봐서는 죽어도 말 안 할 것 같으니······. 목마른 내가 우물을 팔수밖에.’
쉬운 게 하나도 없는 남자. 단순하고 밋밋하다고 여겼던 남자는 한 꺼풀씩 떼어낼수록 절대 단순하고 밋밋하지 않았고, 점점 더 어렵고 권위적인 남자. 위압적인 남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며, 어딘지 모르게 비밀스럽고 위험하기만 하다.
이럴 때면 선조들의 말씀이 백 번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도 들고······.
사람 겉만 봐선 모른다.
이제는 꽤 오랫동안 봤다고 자신하는 그인데, 나는 시간이 갈수록 그라는 늪에서 헤맨다.
어디가 길인지도 알 수 없이 빠지고, 빠지고, 또 빠져서 이것이 어떤 결말을 가져다줄지 알지 못한다.
그가 우리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죽게 한 원흉이라는데도.
그의 병이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희귀병이고 그 병으로 인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라고 해도.
그리고 그로 인해 무수히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말에도 내 마음은 줏대 없이 휘청거린다.
언제쯤에야 모든 게 명확해질까.
남자를 만나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라고 하면 확실해질까?
이 남자는 사실을 날 것 그대로 말 해 줄 인물일까.
아니면 증오심에 불타올라 모든 진실을 왜곡한 채, 내가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도록 종용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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