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상 형이 후계자였던 회사를 중소 제약회사라고 하긴 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중소 회사라고 보긴 힘들어요.”
“왜……요?”
남자가 눈을 내리깔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곳은 한국의 족벌 기업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한 회사였거든요. 족벌 그룹의 특징이란 특징은 다 갖고 있는 곳이라 한 다리 건너도 혈연이 아닌 사람이 없어요. 하다못해 암암리에 만나는 애인까지도 6촌 안에 드는 방계 혈족일 만큼 폐쇄적인 가족 구성원들이었죠.”
“6촌…….이요?”
“네. 6촌 이상 넘어가면 친척이라도 결혼이 가능한 것. 알고 있죠?”
“네. 그, 그렇지만…….”
“혈연이라고 해서 다들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에요. 가문의 가까운 윗세대까지만 건너가도 왕 부럽지 않게 처첩살림을 해 왔던 분들이 있어요. 그 분들이 씨를 뿌린 혈통들 중에서 인정받지 못한 혈통. 다음 세대의 후계자들은 선조의 비밀스러운 치부까지 모두 상속 받게 되니까. 그분들은 그들 중에서 아내를 고르고 첩을 고르게 되는 거죠.”
‘이상해.’
“하지만…….”
“당신과 관련 없는 이야기 같죠?”
‘그보다 이상한 게 먼저지만.’
“네. 맞아요.”
“그게 정확히 언제부터 세습화 됐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선조들은 그렇게 혈통을 이어 나갔어요. 마치 조선 시대 왕족들의 혼인처럼 철저하게 방계 혈족과의 혼인을 장려했죠.
그러다보니 혈족은 점점 더 늘어나고 쓸 데 없이 끈끈한 혈연으로 이어진 이들 중에 아주 뛰어난 자들과 아주 멍청한 자들이 생겨났어요. 일단 그것 때문에 한 대에 걸쳐서 크고 작은 집안싸움이 일어났지만 방계 혈족이 정식 혈통으로서 인정받을 수는 없었죠. 그리고 재산도.”
“…….”
나는 일단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이 사람이 말하려는 것은 뭘까.’
이해 할 수 없는 오래 된 이야기를 꺼내며 남자는 몹시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가 환희에 찬 표정을 짓는 등. 몹시 드라마틱한 표정 변화를 구사 하였다.
“……그렇게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던 방계 혈족이었지만 어느 날 부턴가 서서히 역전의 기회가 찾아왔죠.”
“역전의 기회?”
“네. 숨겨지고 은폐, 되었던 방계 혈족들에게……. 자신이 그 가문이 방계 혈족인지도 모르고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연락이 왔거든요.”
“어떤 연락인데…….요? 아, 아니.”
‘설마?’
나는 놀라움에 입이 벌어졌다.
‘그거?’
“맞아요. 할아버지가 형의 병을 알게 된 것은 형이 그 병을 알게 된 날보다 이른 시기였어요. 형의 나이 2살 무렵이었으니까.”
그맘때 제약 회사에서는 특별한 신약을 만들고 있었다. 심장 수술을 하지 않고도 심장의 질환을 획기적으로 완화 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완치 시킬 수 있는 신약을.
그리고 그 신약 연구에 깊이 관여 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현재는 고인이 되신, 구덕 씨의 아버지 남제원 상무였다고.
불행은 거기서부터 시작 되었던 것이었다.
신약 연구에 깊이 관여하며 약품에 노출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고, 가장 많이 노출 되었던 남 상무는 연구가 한창이었던 그 4년 동안에 아내를 통해 다음 후계자를 잉태한 터였다.
남 상무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선대 회장에게는 예사로 넘길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은밀하게 역학 조사를 하며 혹시나 있을지 모를 후대의 질병 연구를 따로 해 왔던 것이었다.
그러던 도중에 막 2세를 넘기고 있던 손자의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10대 초중반까지는 일상생활에 별 문제가 없더라도 1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크게 문제가 될 수 있는 질병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죽지 않으려면 희대의 강간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만 하는 재앙 같은 질병이었죠.”
“…….”
“실제로 형이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형은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짐승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잘 컨트롤 했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할아버지에게는 만약이라는 위험마저도 견딜 수 없었겠죠. 모든 방계 혈족의 여자들을 불러 모아서 아버지와 가까운 친족 남자들의 씨를 뿌린 것을 보면.”
“예?!”
“형처럼 병이 생길 수도 있지만 항체를 갖고 태어날 수도 있는 수많은 후손들이 그때 태어났어요. 형이 3살이 되던 해부터 형이 16살이 되던 때까지. 인정받을 가능성이 희박한 후손들이 태어나서 형을 돕는 그림자라는 명목으로 훈련 되어야만 했죠.”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왜냐고요?”
“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그 작은 회사의 회장. 가문의 사람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남자의 말에 나는 또다시 경악하며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회사는 하나였지만 가문이 갖고 있던 다른 회사의 지분은 어마어마했거든요. 혈족들 중에서 브레인에 속하는 큰손들이 움직이면 무엇이든 가졌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거든요.”
“그럼…….”
“네. 가문의 사람들은 할아버지 말이라면 뭐든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내 어머니를 비롯한 방계 혈족의 여자들 중에서도 반기를 드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끝까지 반기를 들 수 없었던 것도 가문의 사람들이 압력을 행사했던 탓이었습니다. 얼마나 아는지 모르지만……. 모두가 자식을 아무렇지 않게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여자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
“하지만 결국엔 팔아치운 게 되어버린…….그런 비극이었죠. 우린, 우리가 쓸모 있다는 것을 항상 증명해야 했고, 그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쉽진 않았죠. 아픈데 아픔을 숨기다가 어린 나이에 죽어버린 형들. 머리가 나빠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강간범이 되어버린 형들. 미쳐서 자살한 형들. 그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많은 비극이 있습니다. 병이 걸리지 않은 형들보다 병에 시달리는 형들이 더 많았습니다. 브레인이든 아니든 공평하게. 그나마 머리가 좋거나 항체를 갖고 있으면 형이 버틸 수 있도록 돕는 살아 있는 항생제, 혹은 수족으로 쓰였어요.”
‘그런데 당신은…….’
“나는 뭐냐고?”
남자의 눈빛이 삭막하다.
“나는 이도 저도 아닌 놈.”
‘저렇게 텅 빈 눈은 처음이야.’
남자는 공허한 시선으로 문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머리가 나빠서 가문의 인정을 받는 중요 브레인도 되지 못하고, 항체를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닌데……. 내 어머니와 가족들은 욕심이 끝도 없이 흘러서 아주 피곤한 놈. 그게 바로 나였어!”
자조적으로 말하던 남자는 촉촉하게 보이던 눈으로 끝내 눈물을 흘려보냈다.
“불쌍하고 쓸모없는 놈! 가진 거라곤 이 잘난 몸뚱어리뿐인데, 아무도 이 몸뚱어리가 벌어다주는 돈에는 만족을 못해. 알아? 그게 얼마나 화가 나고 슬픈 일인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는 방계 혈족들이 완전히 가문을 뒤집는 데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어. 가문이 뒤집혀야 가족들이 원하는 만큼의 돈이 나왔으니까.”
“…….”
“내가 어떻게 이런 톱스타가 됐는지 알아요?”
남자의 차가운 말에 나는 기가 질려서 천천히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러자 그는
“내가 형을 닮은 가장 가까운 친족이니까. 그 방면으론 쓰임새가 컸지.”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킬킬거리며 비밀을 말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형이 서서히 죽어가도록 형 대신 항생제를 맞았고, 형이 필요한 자리에 나가서 사고를 쳤습니다. 그렇게 철저히 그림자처럼 연기를 하면서 살았다, 이 말입니다.”
남자는 정말 미친 것 같았다.
***
만쉐~이!
조만간 완결 합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