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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남 이사장. 그동안 잘 지내셨는가.”
“네. 숙부님께서도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나야 잘 지내고 있었지.”
“하하. 그래 보이십니다.”
탐색하듯 긴장 된 얼굴들.
“그런데 이곳엔 무슨 일로?”
“내가 요즘 이 회사에 큰 프로젝트를 맡고 있지 않겠나. 친척들 성화에 모임 참석을 안 할 수 있어야 말이지.”
여기저기서 엇비슷한 가식들이 넘실거린다.
“호호호. 요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얼굴이 전에 뵈었을 때보다 젊어지신 것 같아요.”
“그래? 별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데. 정말 그렇게 보여?”
“그럼요. 몇 달 사이에 10년은 젊어지셨어요. 저랑 같이 다니시면 고모님이 아니라 언니라고 하겠는걸요.”
“호호호. 그런가?”
“네~”
‘저러고 싶을까.’
안면근육이 부르르 떨리는데도 아부를 떠는 젊은 여자 쪽이나, 한층 당겨진 얼굴로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나이 든 여자 쪽 모두 가식적인 칭찬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남자들 남자들의 언어로. 여자들은 여자들 행동으로. 작위적이고 커다란 거짓말을 내뱉는다.
표정은 조롱과 따분함을 애써 숨기고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듣기 좋은 말을 주고받는다.
서로에게서 하나라도 더 얻고, 빼앗아서 자신의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것만이 목적이라는 듯이.
그래서 재미가 없었다. 그 무리들 틈에 그가 있다는 점이 더 재미없었다.
홀 안의 누구보다도 사람들을 조롱하기에 마땅한 사람이 적극적으로 사람들의 대화에 스며들었다.
대부분은 무표정이었지만 즐거운 듯 힘껏 웃을 때면 ‘저건 가식이야!’ 라고 생각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스럽다.
그는 홀에 들어온 이후로 내게 거의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내가 그에게 눈을 맞춰 올 때마다 의도적으로 눈을 피하며 사람들과 더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당신의 목적은 나를 이곳에 앉혀 놓은 것에서 끝났다는 듯이.
하지만 믿고 싶었다.
‘일부러 초라하게 입고 오게 만든 건 아니었겠지. 날 이런 곳에서 모욕당하게 만들려던 게 아니었을 거야.’
그에게 실망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믿고 싶어서 이 따분한 자리에서도 그와 눈을 맞추며
기다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가 일부러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처음 한 시간은 그를 향한 원망뿐이었지만 간간이 자연스럽게 엇갈리던 시선에서 안쓰러움과 다정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이었다.
“이보게. 남 이사장. 여긴 내 딸인 남유정일세.”
“아~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남 이사장. 여기도 좀 봐 주게. 여긴 내 여동생의 딸이네.”
“구덕 씨 이야긴 많이 들었어요. 남지영이에요.”
“아, 네. 반갑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일행과 온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자신의 딸이나 조카를 그와 엮으려고 애썼다.
나는 이쯤에서 그가 적당히 사람들을 무시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으며 여자들을 소개 받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저기 저 분은 누구십니까? 혹시, 애인…….?”
그럴 리 없다는 듯이 말끝을 흐리며 비웃는 사람들 틈에서 더 이상 모멸감을 견딜 수 없었다.
‘말해요. 애인이라고.’
간절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바보같이 믿었다.
‘그는 나를 정식으로 소개 할 거야. 이렇게 옷을 입고 있어도 날 부끄러워 할 사람은 아니겠지. 나니까. 그의 여자니까. 격식을 갖춰 입고 저런 사람들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 한 걸 거야.’
그러나 나의 이런 믿음은 그의 한마디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제 오른 팔입니다.”
‘왜 말이 그렇게 나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비웃는 얼굴들. 나를 얕보며 품평하듯 쳐다보는 사람들.
나는 더 이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저, 잠깐…….화장실 좀.”
밖으로 뛰어나갈 때 잠시 봤던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초연해 보였다.
‘내가 착각한 거였어. 그는 나를 자신이 부리는 수족과 다름없이 생각 하는데…….직원이자 항생제 역할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나를 여자로서 아낀다고 믿었다니.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어.’
따분하고 답답하기만 하던 공간으로 다시 돌아갈 용기도 없으면서, 그렇다고 집으로 가지도 못한 채로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그래도 오른 팔이라잖아. 어쩌면……. 그가 가장 믿는 오른팔일지도 모르는 거니까. 믿을 수 없는 사람들 틈에서 내가 유일한 오른팔이라면, 애인은 아니라도 그를 지탱해 줄 필요가 있는 거겠지. 사랑하잖아. 바보같이.”
사랑하니까. 바보 천치 같지만 믿고 부릴 수 있는 수족이 많지 않은 그의 수족 노릇이라도 하고 싶었다.
적어도 날 오른 팔이라고 말 해 주었으니까.
잘라내면 아프고 불편해질 팔에 비유 해 주었으니까. 그걸로 되었다고.
“울지 않아. 이런 일로 우는 건…….너무 꼴사납잖아. 여기서 울어버리면 더 초라해지니까. 그가 아무렇지 않게 웃는 것처럼 똑같이 웃을 거야. 적어도 아직까지 난…….”
‘그의 오른 팔이니까. 나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오른팔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오른팔일 수 있잖아. 그럼, 그에게 쓸모 있고 대체하기 힘든 오른팔이 되어주면 돼. 간단하잖아?’
괜찮다고.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자기위안을 한다.
암시를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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