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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 줄 줄 알았다. 그녀라면. 알아 줄 거라 믿었다. 어째서 내가 예쁘고 격식 있는 옷으로 갈아입고 올 시간을 주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녀가 참아줄 줄 알았다.
여느 여자들이었다면 모멸감에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상황에서도 그녀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방계 혈족들에게 그녀를 보이고 싶진 않았지만 이미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챈 이들에게 그녀가 위험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줘야만 했다.
그러려면 그녀를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서도, 곱게 차려 입은 모습이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만나고 싶지 않아도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이었고 막바지에 이르러 저들을 안심시키고 방심하게 만들려면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목적 때문에라도 아직 저들에게 아킬레스건을 들킬 순 없었다.
구역질나는 말들을 들으면서도 간간이 미소를 지으며 저들의 말 속에 숨은 사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쓸어 담았다.
요즘 회사의 자금 사정이 나쁘다는 둥.
주식이 널을 뛰고 있다는 둥.
지금의 회장은 그릇이 너무 작다는 둥.
뻔하고 뻔한 이야기들이었지만 그들의 속내를 아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말들이었다.
저들은 가문을 전복시키고 흩어져 있던 가문의 중소기업들과 주식을 흡수해 거대한 몸통을 만들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못했다.
떳떳한 혈통으로 인정받고 로열패밀리로서 상류사회에 편입하고 싶다는 그들의 욕망은 이미 넘치도록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또 다른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이 기업을 삼키고 싶다는 욕망.
다른 이들에게 나눠줘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들의 가족만이 유일한 가족이 되고 재벌 가문이 되어서 거대한 그룹을 꿀꺽 삼키고 싶다는 그런 욕망.
저들은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내게 접근하고 얕은 협박을 하며 이곳에까지 불러들였다.
아무리 무시하려 애써도 또다시 가문을, 기업을 뒤집으려면 그만큼의 각오와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를 이용해 또 한 번 기회를 잡으려는 속셈이 빤히 보였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더 그녀를 꽁꽁 숨겨야만 했다.
겉으로 보여주되 그녀가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저들이 바라는 대로 하찮은 존재인 양 무심하게 쳐다보며 그녀를 소개했다.
그러나 저들은 모르고 있다.
내가 어째서 그녀를 오른팔이라 했는지를.
내게 오른팔이란 의미는 대체 할 수 없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었다.
저들의 해석으론 잘려져도 오른팔은 얼마든지 다시 찾을 수 있다고 믿었겠지만.
나는 여태껏 가장 믿어 온 조카에게까지도 오른팔의 자리를 내 준 적이 없었다.
수족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라 할 순 있어도 오른팔이라 말한 사람은 단 한 명. 그녀뿐이다.
그 의미는 그리 가볍지 않았다. 저들이 알아채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그녀는 알아채기를.
그리고 그녀가 알아채고 기다려 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한계였을까?
어느 틈엔가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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