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온수동 헌혈원
눈에 불을 켜고 남자들의 팔뚝을 훔쳐본 다음날, 월요병을 이기지 못해 결국 반차를 내고 헌혈원에 들렀다.
병원에는 봉사활동을 겸하는 업무상 외근으로 알렸지만 사실상 휴식을 위한 반차.
잠깐 잠깐씩 졸면서 주먹을 조물조물 움직이며 피를 빼면 혈관을 돌고 돌던 피가 조르륵, 혈액 팩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석 달에 한 번씩 피를 뽑으며 나는 아주 편안하게 이곳을 거쳐 가는 불특정 다수의 남자들을 관찰한다.
팔뚝에서 빠져나가는 혈액을 상실로 인해 느끼는 오묘한 쾌락감은 심장박동을 경쾌하게 움직이도록 만들고, 피를 뽑기 위해 침상에 누워 있는 건장한 남자들의 팔뚝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좀 더 빠른 템포로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어서 오세요. 여기, 주민등록증 내놓으시고요. 질문지에 빠짐없이 서명해 주세요.”
방금 전 살집이 튼실한 남자가 혈액 400cc를 빼고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사이로 보이는 남자들이 들어왔다.
“야! 나, 컴퓨터 한다? 이건 네가 해.”
“어.”
한 명이 초코파이를 입에 물고 컴퓨터를 하면서 친구가 기입하고 있는 질문지에 자신의 인적사항이 적힌 종이를 던져 주는 것을 보니, 헌혈을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컴퓨터를 하고 있는 남자는 컴퓨터 앞에 초코파이를 무려 다섯 개나 집어 와서 우걱우걱 먹어치운다.
‘와······.먹성도 좋지. 저걸 어떻게 한 번에 다 먹냐.’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키는 제법 커 보인다. 백 칠십 팔? 백 팔십? 아니, 어쩌면 더 클지도 모르겠다.
가늘고 구불거리는 약간 긴 머리를 듬성듬성 다듬어서 다소 지저분해 보일만도 한데 갸름한 얼굴형과 오밀조밀 작지만 또렷한 이목구비의 단정한 라인이 지저분할 수 있는 머리스타일을 개성 있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인식하도록 만든다.
동그란 무테안경은 남자의 길고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홑꺼풀 눈을 지적인 인상으로 바꾼다.
브라보! 여태껏 거리에서 본 혈관 근사한 남자들 중에서는 기대해 본 적도 없는 중상위권 외모다.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남자의 흰 팔뚝이 언뜻 언뜻 보인다.
‘말랐네.’
마른 것도 마른 거지만 남자의 팔뚝은 혈관의 움직임은 그다지 다이내믹하게 보이지 않는다.
마른 남자의 팔뚝에 핏줄이라도 도드라져서 뛰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건강한 느낌이 들겠지만 보이는 바로는, 글쎄······. 아무리 찾아보아도 너무 가늘고 약해 보인다.
남자만큼이나 존재감 없이 가느다란 실핏줄.
남자의 팔뚝에 자리한 핏줄은 주삿바늘 놓기도 애매해 보인다.
저건 최소 주삿바늘 여덟 번은 찔러야 할 각이다.
***
“으아악!”
“어머. 터졌네? 이걸 어쩌면 좋아.”
“선생님. 살살 좀 해 주시죠. 아픕니다.”
“많이 아프세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 보이는 얼굴로 쩔쩔매는 헌혈원 직원 얼굴이 점점 더 흙빛으로 변해간다.
“아, 따따!!”
호들갑스럽게 팔을 누르는 남자. 아무리 혈관을 잘 잡고 찔러도 곧바로 터지는 혈관.
‘저런. 또 터졌네.’
반대쪽에 있는 건장한 체격의 친구 쪽은 가무잡잡한 피부에 떡, 하니 튀어나와 있는 핏줄을 한 번에 잡은 덕에 벌써 400cc 혈액 팩을 빼고는 휴식 뒤에 컴퓨터 게임을 하며 음료수랑
남은 초코파이까지 초토화시키는데, 이 남자는 몇 십분 째 주삿바늘 하나 꽂지 못한 채 멍 자국만 십 수 번 째 달리고 있다.
“괜찮아요?”
“으······.아픕니다.”
쳐다만 보고 있기 딱해서 남자에게 물으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엄살을 부린다.
근데 그 모습이 찌질해 보이는 게 아니라 은근히 귀엽다.
내가 원래 혈관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남자로 보이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이 남잔 밉지 않아 보인다.
“원래 혈관이 그렇게 안 잡혀요?”
뭐라 할 말이 안 떠올라서 물은 거지만 그래도 대답하기 싫은 질문은 아니었는지 남자의 입에서 빠른 대답이 튀어나온다. 약간 볼멘소리로 불퉁하게 말하기는 하지만.
‘첫 대화로 이정도면 나쁘진 않아.’
“혈관이 안 잡히는데 헌혈 하러 오진 않죠. 보통은. 근데 오늘은 운이 좀 없는 것 같습니다.
주사를 이렇게 못 놓을 줄이야. 크흑.”
뒷말은 작게 중얼거리듯 말하면서 눈물을 훔치는 척, 작고 예쁘장한 코를 쓱, 닦는다.
“주사를 그렇게 못 놔요?”
“심하게 못 놓네요. 원래 계셨던 분이 어디 가셨는지 모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못 놔요.”
“흠, 그런가?”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팔에 멍을 만들어내는 직원을 신나게 욕하고 있을 때.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진 건지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던 헌혈원 직원이 드디어 혈관 하나를 잡은 것 같다.
짝-!
“됐습니다.”
“아야야.”
그 순간 남자와 나는 동시에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향해 눈을 찡긋 했다.
‘오~ 이거 왠지 느낌이 좋은데?’
“드디어 헌혈 할 수 있겠네요.”
“팔이······.”
“일주일 쯤 가겠죠?”
“아프시겠다.”
“남자가 이정도로 아파하면 좀 우스우니까. 참아야죠. 일주일 정도는······.”
“풋!”
엄살이란 엄살은 다 부리고 있다가 귀엽게 허세를 부리는 남자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웃음이 가슴께에서 보글보글 일어난다.
***
실제로 온수동에 헌혈원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대책없이....ㅠㅠ
그래도 에....있다고 상상 하면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