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늘만 학원 안 가면 안돼요?"
"무슨 소리야 아빠가 뼈빠지게 일해서 번 돈으로 학원 보내주면 열심히 다녀야지"
"치 내가 보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다 너 좋으라고 다니라는 거니까 얼른 가기나해"
"알겠어요"
내가 그 날 그렇게 가기 싫었던 건 하늘의 경고 였을까
그 경고보다 나를 더 괴롭게 했던건 엄마의 눈초리였다.
내 미래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거라곤 꿈에도 모르면서 나는 그렇게 삼남매의 둘째로 너만 안 태어났어도 라는 모진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저항 한 번 속시원히 해보지 못하고 꾸역꾸역 학원 가방을 챙겨 학원으로 향했다.
그 때 내 나이 겨우 9살이었다.
나는 명절이 싫었다.
전 지역으로 흩어져 있던 친척들과 가족들이 모이는 자리는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언니는 첫 아이라고 환영받았을 때 동생이 남자라서 환영받았을 때 나는 그 사이에서 내 존재를 잃지 안으려고 혼자 발버둥치고 있었다.
알게모르게 보여지는 가족들의 차별이 점점 당연시 되어 갔고 나는 원래 그런 취급을 받아야만 하는 아이로 자랐다.
큰 엄마가 언니와 남동생을 "오랜만이네 아이구 이뻐"라며 엉덩이를 두드려주고 예뻐할 때 나는 내게서 등돌린 엄마와 아빠 언니 남동생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내가 그 사이에 낄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잘 맞물려진 톱니바퀴 같았다.
"아이구 내 새끼들 왔어? 이거 용돈이여 얼른 받어"
"아휴 참 어머님 용돈 안 주셔도 되요"
"에미야 내가 아무리 농사짓고 살아도 이 정도는 내 새끼들한테 줄 수 있여 얼마 안돼도 까까라도 사먹어"
언니와 동생은 꾸벅 절을 하며 내 앞에서 서로 얼마 받았냐 자기가 더 많이 받았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할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기대반 설렘반으로 입을 뗐지만 돌아오는건 나를 향한 거센 말들이었다.
"너는 엄마 아빠 속 썩이지 말고 돈 쓰게 하지말어 너네 키우려면 엄마 아빠가 얼마나 고생하겠어! 으휴 답답해 정말"
"교수님 학과장 통해서 이미 다 전달 된 사항들이에요 장학금은 학교 교칙을 바꾸지 안는 이상 은지 학생에게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
"죄송해요 제가 최대한 학교 측에 사정해 봤지만 무슨 소리냐며 노발대발 하더라구요."
"............."
"교수님? 여보세요? 아아 전화가 왜이래 제 목소리 들리세요?"
"............"
"교수님!"
"알겠어요 제가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창 밖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꺼진 전화기에선 마침 저녁 8시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정갈한 책상 위에 하얀 약통을 꺼내들며 다른 손에는 뜯지 않은 편지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빨간 편지 봉투는 웬지 정없고 무서워 뜯지 못하겠다는 변명을 하며 다시 슬며시 내려놓았다.
알약을 꺼내 물 없이 삼켰다. 목구멍에 느껴지는 알약 넘어가는 느낌이 소름끼치도록 싫어 뱉어내고 싶었지만 주치의의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가방 안에 있는 고급 세단 키를 들고 학교 주차장으로 향했다.
연주는 주차장 안에서 울려퍼지는 구두 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며 백미러로 얼굴을 확인했다.
"뭐가 그렇게 슬프니?"
백미러에 보여지는 얼굴은 한없이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30대 초반 여인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창백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으며 부모님이 사시는 집으로 향했다.
"니 언니는 어째 연락 한 번이 없냐?"
거실에 홀로 앉아 tv를 보고 있던 엄마가 내가 들어 오는 발자취에 처음 입을 떼며 나에게 건낸 말이었다. 지금 엄마를 걱정하는 건 언니가 아니라 나라구요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은 떼지지 않았다.
"저녁은 드셨어요?"
"지금 시간이 몇신데 당연히 먹었지"
"약은요?"
"먹었다"
한결같이 무뚝뚝한 엄마의 대답은 몇십년이 지나도 냉담했다. 그 말투가 상대 가슴에 얼마나 꽃히는지 또한 엄마는 몇십년이 지나도 알지 못하겠지
집에서 멍하니 앉아있다가 정적만 흐르는 집이 답답하고 억죄여와 소리 없이 나왔다.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흙이 비에 젖은 냄새를 폐 속 깊숙이 빨아들이고는 갈 곳 없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갈 곳이 없는 내가 오랜만에 책이라도 읽겠다며 온 곳은 서점이었다.
새학기가 시작 되려는지 앳되보이는 얼굴을 한 학생들이 책을 사러 인산인해였다. 사람이 많은 곳은 질색이라 들어가기가 꺼려졌지만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냥 오랜만에 책에 빠져보고 싶어서 아니 아니다 사실 그냥 이곳이 너무 끌렸다. 계속해서 눈에 밟히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 느낌을 무시할 수 없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책 냄새가 물씬 풍겼다.
울렁거리는 이 느낌이 웬지 싫지 않았다. 신작 책들이 있는 코너로 가 눈에 띄는 책을 들어 올렸다.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
한참을 고개 숙이고 책 제목만 바라보다 눈 앞에 다가온 검은 구두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한 눈에 봐도 잘생긴 외모의 남성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얼른 고개를 내리고 다른 책을 보는 척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계속 같은 자리에 서 있었고 아직까지도 나를 쳐다보는 듯 했다.
이제 자연스럽게 책을 사러가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카운터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에 너무나도 감미로운 목소리가 웬지 모르게 어딘가 쓸쓸하고 슬픈듯한 목소리가 내 귀를 강타했다.
"보고싶었어"
뒤를 돌아 그 남자를 쳐다봤다.
까만 정장에 하얀 셔츠를 입은 그는 큰 키로 다른 사람들보다 우뚝 솟아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볼 정도로 그는 눈에 띄게 잘생겼다.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사람이 있는지 쳐다 보았지만 거의 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 뿐이었다.
아직까지도 나를 강렬하게 쳐다보던 그 남자는 나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더 말랐다"
나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그 남자를 그 눈빛이 거부할 수 없어서 바라보다 입을 뗐다.
"사람 잘 못 보셨어요"
그 말만 남기고 그에게서 등을 돌려 도망치듯 책을 샀다.
차에 앉아 들고 있는 책을 꼭 잡은 채 한참을 멍 때리다 다시 고개를 젓고서 운전대를 잡았다.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뭐 그럭저럭 괜찮아요"
"약은 시간 맞춰서 잘 챙겨먹고 있죠?"
주치의의 말에 바로 대답할 수 없어서 망설이고 있더니 바로 눈치 챈 모양이다.
"연주씨 제가 동생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약 제때 안챙겨 먹으면 소용없어요 그럴거면 이 병원 왜 다니는 거죠? 다 낫고 싶어서 치유하고 싶어서 다니는거 아닌가요?"
"네....."
"휴우......... 한달치 더 먹고 다시 와요"
손에 가득한 우울증 약들을 바라보다 갑자기 눈 앞에 어른거리는 그 얼굴이 생각나 고개를 저었다.
미친게 분명했다.
한 번 밖에 보지 못한 그것도 나를 다른 사람이랑 헷갈린 남자의 얼굴이 왜 이렇게도 계속해서 생각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라고는 진절머리가 날 뿐더러 겨우 마음을 줬다가도 서로 성격차이라는 걸로 단정지어버리는 관계는 이제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학원 다녀 오겠습니다"
"그래 끝나고 바로 와야한다"
"네"
그 날은 비 온 뒤 너무나도 맑아진 날이었다. 땅이 패인 곳엔 비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빗물에 내 얼굴이 비치는 게 좋았다. 빗물을 발로 차며 걷는 것 또한 좋았다. 그 날 따라 신호등은 내 앞에서 바로 초록색으로 바뀌었고 햇빛이 쨍쨍한 아주아주 맑고 깨끗한 날이었다.
피아노 학원 계단에 올라가는 것도 전혀 귀찮지 않았다. 하지만 날 거세게 잡아당기는 남자의 손이 느껴졌을 때 그 모든 것이 깨져버렸고 어느새 나는 공중화장실에서 낯선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 혼자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는데도 보이는 쨍쨍한 맑은 날씨가 미치도록 싫었다.
빗물에 비쳐지는 내 얼굴이 소름끼쳤다.
집에 돌아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생각했다. 엄마한테 혼날까봐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다.
엄마가 이 사실을 알고 나를 싫어할까봐 나를 버려버릴까봐 두려웠다.
9살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사건이었지만 나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했다.
'나만 입 다물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면 가족들 모두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
연주는 집에 돌아와 메일을 확인하고 신경질적으로 인터넷 창을 닫았다.
'교수님 이조교에요 전화 안받으셔서 메일로 연락 보내요 학교에서 은지한테 지원하는 장학금을 이젠 그만해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후원자 측에서 몇 달째 연락 두절이라 그런가봐요
후원자 번호는 메일 아래쪽에 써놨으니까 교수님께서 연락 한 번 해보셔야 할 것 같아요'
은지가 졸업하려면 아직 1년이 남았다.
그런데 연락 두절이라니....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머리가 지끈 거렸다. 하루 종일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겪어서 그런지 온 몸이 축축 쳐졌다.
침대에 누워 오늘 산 책을 펼쳤다.
'무언가 당신의 사랑을 막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내부에 있다. 당신에게는 그것이 무엇인가?'
대학교에 처음 입학해 소개팅이란 것을 해봤다.
상대는 나를 너무 좋아했으며 에프터도 신청했다.
나보다 4살 많았고 다정다감 해서 나 또한 그 사람이 좋았던 것 같다.
내 영역에 자꾸만 침범하는 그가 점점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그를 서서히 밀쳐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됬다.
내가 어떻게 숨겨온 과거인데...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이 알면 떠날까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그가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그를 버리자
내 사랑은 언제나 내가 먼저 도망치는 걸로 끝맺는다.
사실 그게 사랑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그 자체가 이제는 귀찮고 싫었다.
다시 메일창을 들어간 연주는 조교가 적은 핸드폰 번호를 핸드폰에 누르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긴 통화음 끝에 상대편에서 전화를 받았다.
"네 김윤상입니다"
부드러운 남성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부드러워 심장이 철렁거렸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 경운대학교 교수 이연주라고합니다"
".............."
"은지학생 후원 문제로 연락드렸어요 몇 달 전부터 후원금이 끊겼다고 학교 측에서 연락이 와서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내일 저녁에 시간 되요?"
"네?"
"저랑 밥 먹어요 내일"
당황한 연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상대편에서 내일 6시 청담역에서봐요 라는 말만 남기고 끊긴 전화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