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밥이라도 챙겨줘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 미안하네.”
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태섭은 며칠 전 나와의 만남을 끝낸 채 내일 다시 오겠다고 나가선, 일주일이나 지난 오늘, 아주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아모르파티>에서 저녁 청소를 모두 끝내고 녹초가 되어 돌아온 직후였다.
“이제 왔어?”
태섭이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없는 사이, 그와 아버지가 무슨 얘기를 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나는 불현듯 오라버니와 담이의 죽음을 떠올렸고, 얼굴을 크게 구겼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내 귀에다 자신의 얼굴을 붙이고 말했다.
“표정을 못 숨기는 군.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어리둥절하게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
"우리 구면이지?"
그가 뻔뻔스럽게 내 얼굴을 쳐다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곤 다시 아버지 앞에 태연스레 앉았다.
“둘이 이미 아는 사이였나?”
“네, 용이랑 오랫동안 친구였다 보니 오다가다 몇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어안이 벙벙하여 우두커니 서있기만 할 뿐이었다.
“연아, 집에 먹을 게 좀 있느냐?”
“아, 아뇨……아! 저번에 순자한테 받은 옥수수가 좀 있긴 한데, 아니 고구마였나…….”
내가 횡설수설하게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원래 저녁은 자주 걸러요.”
태섭이 그런 나를 보며 짓궂게 웃었다.
“그럼 아까 말씀드린 대로 몇 달 간 이 집에서 신세 좀 지겠습니다. 참, 용이 방이 어디였다고 하셨죠?”
“저 좁은 마루 바로 옆인데……아니다, 연아 가서 안내를 좀 해주겠니?”
“네? 네, 네! 그럴게요.”
나는 얼떨결에 대답해 버리곤 뒤 돌아서 발을 동동 굴렸다. 어느새 태섭은 장돌 위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안내 안 해줄 건가?”
그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단은, 이리로 따라오세요.”
나는 ‘지금 당신한테 들을 게 많아요.’ 라는 의미를 강조하며 ‘일단은’에 세게 악센트를 넣었다.
“기합이 너무 들어갔군.”
‘기합이 아니라 의문과 불안이거든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쳐 올라왔지만, 뒤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꾹꾹 참아야 했다.
“여기에요. 아마 집이 좁아서 헤맬 필요도 없을 거에요. 보시다시피 부엌은 저기에 있고, 변소는 부엌 뒤쪽에 있어요. 많이 낡았으니까 볼일 볼 때 잔뜩 힘주면 부서져버리니 조심하세요.”
나는 이 말만 툭 던져 놓은 채, 다시 아버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일단 아버지한테 들어야할 말이 있었다.
그가 언제 다시 온 것인지, 어떤 말을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무슨 거짓말로 멀쩡히 우리 집에 들어와 살게 된 건지! 온통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아버지는 문에서 등을 돌린 채 여느 때와 같이 우두커니 앉아계셨다. 나는 가끔 그런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곤 했지만, 오늘은 그것마저도 아무 상관없었다. 애초에 이곳 까지 들어온 목적이 있었으니, 얼른 그것을 달성해야만 했다.
“아부지!”
나는 바닥에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아니 무슨 일이냐, 네가 이렇게 급하게?"
아버지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 했다.
“방금 저 사람이 뭐라고 했어요?”
“태섭이 말이냐?”
“네. 그 사람이요. 뭐라고 했냐니까요?”
“딱히 별 말은 없었어. 그냥 몇 달만 좀 묵겠다고 하더라. 일본에서 공부하다 일이 생겨 돌아왔는데, 마땅히 머무를 곳이 없다면서 신세 좀 지겠다는 걸 거절할 순 없잖니? 나도 물론 고민했지만, 용이 친구라고도 하고, 용이가 그러라고 했다 길래 그냥 받아줬다. 근데 그게 왜 궁금한 거냐?”
“정말 아부지는 용이 오라비 일이라면 아주 껌벅 죽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저 청년이 매달 방세도 낸다고 하니 우리 형편에도 좋을 게 아니냐. 연이 너도 궂은 일 안 해도 되고, 어차피 용이가 나간 뒤론 줄곧 쓸모없는 방이었을 뿐이니까.”
나도 물론 그가 우리 집에 들어와 산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용이 오라비의 죽음을 아직 채 받아들이기도 전에, 새로운 남자가, 그것도 우리 집에서 살게 되다니!
일탈적인 일들이 자꾸만 내 삶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언제나 그저 종속되기만을 바라왔던 나에겐 아주 낯선 것들이었고, 불청객과 다름 없었다.
나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걸 깨닫고 방문을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종일 청소와 설거지를 하느라 녹초가 된 몸이었는데, 그나마 남아있던 기운 마저도 방금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방문을 닫자 마당에 서있는 그가 보였다.
“다 따지고 나온 건가?”
“제가 따지긴 뭘 따져요.”
“왜 갑자기 툴툴대는 거야?”
“제가 그랬나요?”
“모르는 척 하긴.”
“짐은 잘 풀었어요?”
나는 일부러 그에게 답을 하지 않으려 말을 돌렸다.
그는 속아 넘어가 준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응. 별로 가져온 게 없어서. 그리고 웬만한 물건들은 방안에 다 구비되어 있더군.”
아버지는 언제 용이 오라버니가 돌아올지 모른다면서 그 방을 항상 깨끗하게 해 놓으라고 했었다. 마치 어제 떠났다가 돌아올 것처럼.
“청소를 매일 한 모양이야. 꽤 오랜 시간 동안 비어있었을 텐데 먼지 하나 없더라고.”
“짧은 시간 동안 구석구석도 보셨네요. 아마 옷장에 옷도 몇 벌 남아 있을 거예요. 책상도 있고. 간단한 수납장도 있으니 활용하세요. 낡아서 제대로 열릴 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지."
그가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 그나저나 어딜 갔다 왔던 거야? 이 늦은 시간에.”
“안 말해 줄 거예요. 당신도 나한테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했잖아요.”
태섭은 황당한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그 일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것도 안 말해 줄 거예요.”
나는 그의 옆을 새침하게 지나쳤다. 태섭은 굳이 나를 잡진 않았지만, 내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곤 나를 불러세웠다.
“내일 아침에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지.”
그의 말에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어딜요?”
내일이라고 하면 생각보다 바쁜 일정들이 잔뜩 잡혀있는 날이었다. <아모르파티>에서 이른 오후부터 일을 맡겨 놓은 참이라 그랬다. 그래서 밀려있는 집안일을 다 끝내고 가려면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무슨 일로 그러는진 모르겠지만 내일은 불가능해요. 일도 나가봐야하고 빨랫감도 널어놓아야 해서.”
나는 최대한 도도한 목소리로 눈꺼풀을 내리며 말했다. 그러곤 다시 가던 길을 가려고 하자, 그가 멋쩍은 목소리로 또 한 번 나를 붙잡았다.
“음, 책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나는 가던 발길을 우뚝 멈춰섰다. 그러곤 다시 한 번 그의 빠삭한 정보력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태섭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도경목 작가의 시집이 출간되었더군. 예전에 용이가 네 맘에 들려면 좋은 책을 한 권 사주라고 귀띔을 해준 적이 있어서."
그의 제안은 분명 아주 솔깃한 것이긴 했다. 몰래 필사를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던 도경목 작가의 작품집이라니! 그것도 신간으로!
“조, 좋긴 하지만……, 그래도 내일은 정말 안돼요. 책을 사러가자고 어렵게 구한 일을 내팽겨 칠 순 없어요. 일단을 먹고 사는 게 우선이니까.”
나는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허둥대며 이야기 했다.
“조선 땅에선 꽤 유명한 작가라 단행본을 구하기가 어려울 텐데, 안타깝군.”
아쉽게도 그의 목소리에선 더 이상 미련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 이상 잡지 않겠다는 말투였다. 그것이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잠깐만요! 그럼 내, 내일 아침에 가는 걸로 하죠!”
"내일 아침?"
그가 되물었다.
나는 애써 그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네. 그, 그 때 쯤이면 아마 시간이 될지도."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그는 내 쭈뼛거리는 몸짓을 보더니 이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왠지 진 기분과 함께 억울한 생각이 든 나는,
“대신 내가 일하러 간 동안 집안 청소 깨끗이 해놔요! 울 아부지 밥도 좀 챙겨드리고! 이젠 당신네 집이기도 하니까.”
라고 말하며 괜한 화풀이를 해대었다.
“그 정도야, 뭐, 군소리 없이 해주지.”
나의 당찬 포부에도 그는 여유롭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