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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위하여, 아모르파티
작가 : 아강
작품등록일 : 2017.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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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방에는 바둑이가 산다.
작성일 : 17-06-20     조회 : 273     추천 : 0     분량 : 4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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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이른 아침부터 나는 분주했다. 어제 있었던 태섭의 갑작스런 제안 때문에 하루의 무게가 더 무거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도경목 작가의 단행본을 결코 놓칠 수 없었다. 워낙 구하기 힘들었을 뿐더러 내 형편에는 선뜻 살 수도 없는 것이었다.

  사실 그 전까진 꽤 부자인 순자네 저택에 놀러가 남몰래 필사하며 공부를 해왔었다. 그러나 이젠 글을 훔쳐보는 것도 한계였다. 나를 탐탁치 않아하는 순자네 어머니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그는 삐딱하게 앉아 연신 투덜대기만 하였다.

  “이제 거의 다 됐어요!”

  나는 마지막 남은 빨랫감을 널며 기지개를 폈다. 아침부터 운동을 하게 된 셈이니 평소보다 더 개운하기는 하였다.

  “다 됐나?”

  그는 뭐가 그리 급한 건지 내가 한숨 돌리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이미 대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참을성이 없는 녀석이라서 말이야.”

  나는 여전히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아침 공기는 시원했다. 이 시간에 밖으로 나온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나는 맑은 아침 공기를 맡으며 기분 좋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적어도 비는 오지 않을 것 같군.”

  태섭도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요. 날씨가 좋아요. 이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무슨 의미야?”

  “어떻게 보면 하늘은 우리에게 너무 무관심한 것 같기도 하단 말이에요.”

  태섭은 그렇게 말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조금 무안할 지경이라서 먼저 눈을 피하고 말았다. 그러자 태섭도 무례했었다는 듯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런 하늘을 보며 용기를 얻는 사람도 있어.”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을 꺼내기 전, 머뭇거렸던 그의 입술을 나는 무심결에 보고 말았다. 나는 의외로 이런 사소한 것들을 잘 포착하곤 했다.

  “근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내가 눈치껏 말을 돌렸다.

  “너에게 줄 선물을 갖고 있는 친구한테.”

  그 말은 즉 누군가가 도경목 작가의 단행본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난 곧 있으면 그 책이 나의 것이 된다는 것에 무척 설레어 왔다.

  “그 사람이 누군데요?”

  나는 잔뜩 들뜬 목소리를 하며 태섭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주변은 새벽 장을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내 친구야. 너처럼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글 벌레.”

  태섭은 질린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와 친한 사이인 듯싶었다. 나는 아직 만나보지도 않았지만, 나도 모르는 (태섭의 친구라고 주장하는) 어떤 존재가 도경목 작가의 단행본을 가지고 있는 걸로도 모자라, 글 벌레라는 멋들어진 별명을 갖고 있다는 것에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여기는 아침부터 북적이는군.”

  “그럼요. 우리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부지런한데.”

  그는 내 말에 어느 정도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별안간 발을 분주하게 움직여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녔다.

  “분명 여기 어디였을 텐데…….”

  그는 비슷해 보이는 골목을 몇 차례씩이나 왔다 갔다 거렸다. 하도 움직여대는 탓에 이제는 여기가 어디였는도 제대로 분간되지 않았다.

  나는 급속도로 초조해지는 마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오늘은 좀 더 일찍 일하는 곳으로 나가봐야하는데, 이렇게 헤매다간 책을 받기는커녕 약속한 시간에도 제때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체 어디 길래 이렇게 헤매는 거예요?“

  내 목소리가 들리긴 하는 건지, 태섭은 묵묵부답으로 걷기만 하였다. 나도 더 이상 그를 재촉하진 않았지만 손금 사이로는 이미 축축한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었다.

  5분 쯤 더 헤매었을까, 일순간 ‘아!’ 하는 태섭의 기분 좋은 탄식이 들리더니, 우리는 곧 작은 약방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여긴…….”

  ‘바둑이 약방’. 항상 검정색 점이 박혀있는 잡종 개가 지키고 있다 해서 불리게 된 이름이었다. 태섭과 나는 바로 그 약방 앞에 서있었다.

  “어이, 박주홍!”

  태섭은 큰 소리로 으름장을 놓듯 ‘박주홍’을 불렀다.

  “태섭이냐?”

  그러자 약방 안에서 부시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얼굴을 내밀었다. 동그란 안경을 쓰긴 했지만 굉장한 미남이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앞머리는 그의 눈 바로 위까지 간당간당하게 걸쳐져 있었다. 새까만 흑발에 하얀 피부가 마치 바둑이 같은 인상을 주었다.

  “약속했던 책 좀 받으러 왔다.”

  태섭이 눈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저 애가 연이란 말야?”

  “그래. 빨리 책이나 갖다 줘봐. 잔뜩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니까.”

  태섭은 그렇게 말하곤 내 어깨를 짓궂게 감쌌다. 나는 갑작스레 어깨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촉에 몸을 잔뜩 웅크렸다. 태섭도 그것을 눈치 챘는지 얼른 손을 떼었다.

  “미안, 습관이 됐나봐.”

  그가 어색하게 말했다.

  그 사이 주홍은 잘 포장되어 있는 책을 품에 안고, 천장이 낮은 문을 낑낑대며 빠져나오고 있었다.

  “자, 단행본 초판이야.”

  주홍이 나에게 책을 넘겨주며 말했다.

  “의외네.”

  “예?”

  나는 그에게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해,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며 갸우뚱 거렸다.

  “그냥. 담이랑 똑같이 생긴 얼굴로 책이 좋다고 웃으니까, 뭐랄까, 괴리감이 들어서.”

  나는 또 다시 낯선 남자의 입에서 듣게 된 ‘담’의 이름 때문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죽은 내 동생이 낯선 사람들 입에서 거론되는것은 정말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내 동생을 알아요?”

  나는 아주 경계적인 눈빛을 하며 말했다.

  주홍은 어깨를 으쓱하며 태섭을 한 번 바라봤다.

  “잘 아는 편이지.”

  “어떻게요? 언제부터?”

  나는 꽤 집요하게 그에게 파고들었다.

  “어떻게였는지, 언제부터였는지, 그런 건 잘 떠오르지도 않아. 넌 네 친한 친구와 어떻게 친해졌는지 까지 일일이 기억할 수 있니?”

  그가 아이를 달래듯이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조차 분노를 느꼈다.

  “그렇게 친했다면, 이것도 알고 있겠네요.”

  태섭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 동생이 죽었다는 사실 말예요.”

  주홍의 표정이 일순간 정지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분명 지독한 그늘이 그를 덮고 있었다.

  “그 책은 내가 주는 선물이야. 물론 태섭의 부탁을 받고 준비한 것이긴 하지만, 그걸 얻기 위해서 꽤 노력했거든.”

  그가 내 품으로 옮겨 온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말을 돌려보려는 심보인 듯 했지만, 어림없었다.

  “용이 오라비도 알고 있죠? 그렇담 말해줘요. 왜 내 형제들이 죽어야 했는지!”

  주홍은 태섭을 바라보며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그것은 책망에 가까웠다.

  “연아.”

  태섭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선물에 대한 감사 인사부터 해야 하지 않겠어?”

  “아냐, 그렇게 다그치지 않아도 돼.”

  주홍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연이라고 했지?”

  그러곤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눈높이를 맞추며 허리를 숙였다.

  “내가 죽은 담이와 안면이 있는 사람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네 적은 아니야. 가족의 죽음으로 슬프다고 해서 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고 적대시하지 않는 게 좋아.”

  주홍이 가볍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차가워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따뜻한 손길이었다.

  “너, 더 이상 꾸물대다간 진짜로 늦어버릴 걸?”

  잠시 멍해있던 나는, 벼락처럼 들리는 태섭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맞다! 지금이 몇 시죠?”

  “글쎄……, 앞으로 조금만 더 있으면 네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기는 하는데.”

  태섭이 놀리는 말투로 짓궂게 웃었다.

  “난 빨리 가 볼 테니까, 집에 들어가면 울 아부지 저녁상 좀 부탁해요!”

  나는 저 말만 남기고 왔던 곳 그대로 골목을 따라 부랴부랴 뛰기 시작했다. 골목은 또 왜 이렇게 복잡한지 돌고 돌아도 끝이 안 보였다. 이러다간 도착하기도 전에 진이 다 빠져 쓰러지게 생겼다.

  태섭과 주홍은 저 멀리까지 요란스럽게 뛰어가는 연이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저 애가 담이의 쌍둥이 언니란 말이지?”

  주홍이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태섭은 그런 주홍을 바라보다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때?”

  “어떠냐고? 그게 무슨 의미야?”

  “넌 담이의 연인이었잖아. 담이와 똑 닮은 얼굴을 한 쌍둥이 언니가 나타났으니……, 감회가 새로울 것 같아서.”

  주홍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처음엔 꽤 기대했어.”

  “그런데?”

  “글쎄……. 애초에 그 둘은 다른 사람이니까. 내가 연이를 통해 옛 연인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민폐겠지. 그리고 그다지 닮지도 않은 것 같아.”

  주홍이 불편하게 내려온 앞머리를 위로 쓱 올렸다. 머리칼은 그의 손길에 따라 부드럽게 선을 가르며 흩어졌다.

  “일단 할 얘기가 있을 테니 좀 들어가자.”

  태섭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약방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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