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언제까지 숨어있어야 하는 거야?”
태섭이 신경질적이게 말했다.
“진정해.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냐.”
약방 안에 있는 작은 방은 두 사람이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받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았고, 누군가 엿들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쌉싸름한 한약 냄새만이 주변을 묵직하게 감돌았다. 태섭과 주홍 사이에 있는 작은 책상엔 빈 원고들이 난잡하게 놓여있었다.
“솔직히 난 실망이 커. 우리가 나서서 제대로 성공한 작전이 있기나 해? 모든 게 실패였어. 차라리 김용이 아니라 내가 지휘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초 박살 나진 않았을 거야.”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어. 그리고 조 선생의 배신은 계획에 없던 거였기도 했고.”
“난 끝까지 조범수를 반대했었다고!”
태섭이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말했다. 그 덕에 김이 모락모락 나던 커피가 쏟아지며 책상 위의 종이들을 흥건하게 적셨다.
주홍은 얼른 그것을 옆으로 치우곤 태섭을 아니꼽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쳐다봐도 좋아. 난 내 생각을 굽힐 마음이 추호도 없으니까.”
“네가 그럴수록 용이도 편하게 못 있을 거야.”
‘용이’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태섭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주홍이 말을 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 우리가 지금까지 했던 임무 중에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둔 건 없어.”
“이제야 인정 하는 거냐?”
“하지만 이게 용이 때문이 아니란 걸 너도 잘 알잖아.”
“알지. 용이 때문이 아니야. 김용의 그 물러터진 성격 때문이었지.”
주홍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가만히 들어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너, 용이가 죽은 뒤로 유독 예민하게 구는 거 알아? 맘에도 없는 소리나 해대고. 너도 원랜 알고 있잖아. 용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늘 자기 고집에 갇혀 살던 태섭도, 이번엔 주홍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최근 일본 고위급 간부들이 연회장에서 만찬을 즐기던 특별 행사에, 김용을 선두로 한 조선인 군인들이 몰래 잠입한 적이 있었다. 조직 안에 밀정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진행한 작전이라, 이미 도주로는 막혀있던 상태였다.
그 이후로는 아주 볼만했다. 일본 군사들은 두더지 잡기 놀이라도 하는 듯, 당황한 조직원들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모두 잡아 산채로 연행해갔다. 그러곤 정보를 빼낸다는 명목으로 끔찍한 고문과 감금을 서슴지 않았다. 그 중에는 용이와 담이도 있었다.
그들이 형무소에서 어떤 고문을 받았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저 몇몇 사람들의 목격담과 추측으로 예상해볼 뿐이었다. 애초에 고문 받았던 동지들이 살아 돌아온 경우가 거의 없었으니.
그 당시 주홍은 담이가 잡혀갔단 소리를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문을 박차고 뛰쳐 나갔다. 늘 침착해 보였던 그에겐 아주 의외의 모습이었다. 겨우겨우 조직원들의 손에 붙잡혀 끌려온 뒤에는, 여자애가 그 모진 고문을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하다고, 구하러 가야한다고, 눈물까지 보이며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진 않았다. 그것은 태섭도 마찬가지였다.
태섭은 폭풍 같았던 그 때를 생각하며 우울한 기분에 잠겨 헤어 나오질 못했다.
“아직도 일본 군사들이 그 사건의 배후를 찾고 있어. 이미 우리는 조직원들의 반을 잃었고,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해. 사실 난 네가 용이네 집에 들어가 사는 것도 그닥 추천하지는 않아. 총독부에서 용이 주변 인물을 예의주시 하고 있는 것 같던데, 이건 뭐,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거랑 비슷한 거잖아.”
태섭도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일제의 압박 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의 마음속에 계속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그 집에 들어간 건 김용과 한 약속 때문이야. 용이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나봐. 나한테 연이랑 아버지를 보살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더라고. 난 당분간 그 집에서 지낼 거야.”
“그래라, 너를 누가 말리냐.”
주홍이 더 말릴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집이 아주 누추하더라고. 온기도 없었어. 장님인 아버지에, 힘없는 어린 여자밖에 없는 집이더라. 용이가 밤마다 걱정했던 이유를 알겠어.”
“지금 조선 한바닥에 사연 없는 집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라. 더한 곳도 많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잖아!”
태섭이 소리쳤다.
주홍은 좀 놀란 눈치를 하더니, 이내 턱에 팔을 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알지. 나도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태섭은 씁쓸한 마음에 주홍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러나 하필 시선이 머문 곳엔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액자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 날은 처음으로 우리가 모여 사진을 찍은 날이었다. 예정대로라면 주홍과 태섭, 그리고 용이 까지 3명이 찍었어야 했지만, 남몰래 따라온 담이 때문에 4명씩이나 억지로 낑겨 찍게 되었다. 서로 가운데 있는 의자에 앉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은 담이의 떼를 못 이겨 장정 3명이 그 자리를 양보했었다.
사진 속에는 우리들에게 둘러싸여 미소를 짓고 있는 담이의 환한 모습이 보였다. 저 개구진 표정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가지런한 치아를 활짝 내놓은 채 부드럽게 말려올라간 입 꼬리……. 담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 미소는 태섭에게 성큼 다가와 어리숙했던 마음을 기분 좋게 간질였다.
주홍은 태섭이 액자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정신을 놓고 있다는 걸 알아채기라도 한건지, 매정하게 액자를 엎어버렸다. 네 사람의 얼굴이 바닥에 쳐 박혀 다시는 올라오질 못했다. 태섭은 그제야 눈을 깜빡이며 현실을 직시했다.
“아까 언제까지 숨어있어야 하냐고 물었지?”
주홍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확실히 가늠할 순 없지만, 내가 동태를 살펴보고 연락 줄게. 용이와 담이 말고도 핵심인물들이 몇몇 죽었으니 조직에도 타격이 커. 재개할 시간이 좀 필요하단 소리야. ……이렇다 할 작전을 짜낼 사람도 없고.”
“네가 있잖아. 박주홍.”
“내 실력은 이미 검증 됐잖아. 용이와 담이를 죽게 했던 걸로. 그리고 용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애초에 나오지도 못할 작전이었어.”
태섭은 의기소침해진 주홍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지금 이런 거 저런 거 따질 때야? 우리한테는 시간이 금인 거 몰라?”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나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니까.”
주홍도 답답한 듯 크게 소리쳤다.
“일단 오늘은 이만 돌아가. 곧 손님이 몰릴 시간이야.”
태섭은 영 떠나기가 싫다는 표정으로 미적거렸지만, 주홍의 손짓에 마지못해 문밖으로 밀려나왔다.
“내가 연락할게.”
주홍은 그 말만 남기고 매정하게 문을 닫았다. ‘쾅’ 소리가 태섭의 마음에 아프게 다가왔다. 용이가 우리 곁을 떠난 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우리는 아직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용아…….’
태섭은 마음속으로 옛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
“연씨, 이것도 좀 부탁해!”
<아모르 파티>의 화려한 마담이 이미 비어있는 술잔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왼손엔 세팅해야할 안주거리들을 들고, 오른 손엔 쓸모없어진 샴페인 잔을 위태롭게 매달고 있었다.
“네, 잠시만요!”
할 일이 이렇게나 많았음에도 손님들의 주문은 끊이질 않았다. 경성 최고의 술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모르 파티>의 인기는 대단했다.
무대에선 예쁘게 화장한 여자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고, 꽤 유명한 인사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나에겐 멀고도 먼 세계 같았다.
밤이 깊어 갈수록 <아모르 파티>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자, 오늘 치 일당.”
마담은 낡은 창고 안에서 정산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손님도 꽤 많았고, 부려먹은 일도 많아서 넉넉히 넣어뒀어.”
“정말요? 감사해요, 마담!”
“마담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깐! 그냥 언니라고 해. 언니가 좀 그러면 이모도 좋아. 나도 나이가 있으니…….”
“에이, 그래도 어떻게 마담을 이모라고 불러요. 아직도 이렇게 젊어 보이시는데.”
“어머, 지금 사탕발림이라도 하는 거야?”
“아뇨! 사실인 걸요?”
나는 딱 봐도 두둑해 보이는 돈 봉투를 받으며 기분 좋게 말했다.
마담은 일거리가 없어 거지 행색으로 돌아다니는 나에게 유일하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던 생명의 은인이었다.
“어서 돌아가 봐. 더 늦으면 위험하니까. 요즘 밤거리 조심해야 하는 거 알지? 특히 조선인 여자들은 더더욱.”
나는 걱정일랑 하지 말라는 듯 위풍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마담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녀는 어서 가보라는 듯 손짓을 하곤 다시 돈 세는 일에 열중이었다. 나는 돈 봉투를 가슴 깊숙한 곳에 숨긴 채 빠른 속도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하늘은 어느새 깜깜해져 간간히 보이는 달빛에 의지하며 걸아가야만 했다.
“김연!”
누군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뭐가 그렇게 급해?”
“그 쪽은……!”
“하도 안 오길래 와봤지.”
나는 의외의 사람의 갑작스런 등장에 모든 긴장이 풀어지며 안도의 웃음을 흘렸다.
“집에 같이 가자.”
태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