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성큼 티파니 안으로 발을 들였다.
큰소리로 웃는 소리. 잔을 부딛히는 소리.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음악소리가 한데 섞여 파티 분위기를 뿜어낸다.
가면을 쓴 익명의 사람들이 화려하면서도 은밀한 조명 아래 삼삼 오오 모여 있었다.
1층부터 4층까지 중앙천장이 시원하게 뚫려있는 돔.
몇 가지 톤다운된 조명의 빛이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도록 값비싼 비단들이 길게 휘장을 치고 있었다.
실비아가 곁에 바싹 붙어 속삭였다.
“진짜 별천지네요. 아가씨.”
태어나 처음으로 이런 파티를 보는 건 유모 뿐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유모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2층 둥근 난간을 따라 올라갔더니 바로 입구에 남녀가 한데 어우러져 진하게 키스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면의 힘은 실로 위대한가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단 둘만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하는 것이가? 아니면 자신을 못 알아본다는 확신이 대담하게 만드는 것인가.
“이게 무슨 냄새지?”
매캐하면서도 야릇한 냄새가 연기와 함께 여기저기서 풍긴다.
실비아가 인상을 찡그리며 답했다.
사실 가면 때문에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평소 잔소리할때처럼 미간을 찌푸렸으리라.
“이거...... 마약 같은 거 아닌가요?”
“그게 사실이라면 진짜 요지경이군.”
“어머, 아가씨 그런 말투로 얘기하시니 진짜 남자 같아요. 호호.”
난 구멍난 가면을 통해 실비아를 찌릿 노려봤다.
“우린 지금 남자야. 말 조심해. 그리고 좀 떨어져. 이렇게 찰싹 달라붙어 다니면 의심받을 거 아니야.”
“아 그렇군요. 네네.”
하아.
이런 중차대한 사건현장을 덮치는 순간, 내가 데려올 믿음직한 부하가 유모 밖에 없다니.
그나저나 가면무도회 참석자가 너무 많았다.
4층까지의 모든 복도와 방을 뒤져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실버스. 자넨 2층을 살펴봐. 난 3층으로 가볼테니.”
“......”
“실...버스?”
미리 정한 실비아의 남자 이름 실버스를 금새 까먹은 것인지, 실비아는 엉켜서 서로의 몸을 애무하는 남녀들을 구경하느라 정신 없었다.
“하아... 이봐.”
내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질러서야 깜짝 놀라며 쳐다보는 실비아다.
이럴거면 도대체 왜 따라나선건지 모르겠다.
“정신 똑바로 안차릴거야?”
“그러게요. 정신을 잡고 있기가 이렇게 힘이 들다니요.”
“이럴 시간 없어. 2층은 자네가 맡아. 난 3층을 둘러볼테니까. 그를 발견하면, 나서지말고 조용히 날 불러. 괜히 나서서 일 그르치지 말고. 알았지?”
“알겠어요.”
유모는 그제야 눈빛이 또렷이 하고, 제 아가씨를 두고 바람피는 주인을 찾을 준비를 제대로 했다.
덩치 큰 유모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지날 때마다 웅성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만, 실비아 걱정은 뒤로 하고 곧장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2층보다는 복도가 조용하고, 조명도 더 어두운 것을 보니 여기서부터는 좀 더 비밀스런 만남들이 문 안쪽에서 이뤄지나보다.
간간히 복도에 서서 아래층을 구경하는 남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지나는 나를 힐긋 쳐다보고는 다시 자기들끼리 숙덕거렸다.
클린턴은 벌써 여자와 방이라도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미 그가 여자와 은밀한 만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느라 애썼다.
복도에 서 있는 그 어떤 남자도 남편과 비슷한 실루엣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실제로 벌거벗고 함께 누워 있는 모습을 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진기 버튼을 누르리라 다짐하고 왔거만, 막상 여기저기서 쪽쪽거리는 남녀들을 보자니 심장이 방망이질해댔다.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고 사진기를 만지자 불안정하게 뛰어대던 심장이 좀 진정되는 듯했다.
“어머나. 오셨군요?”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마담 티파니는 가면도 쓰지 않은 채 홀홀 웃으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프리스톤 도련님 맞으시죠?”
속삭이며 확인하는 그녀에게 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찾으시는 분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녀는 손님들의 위치를 다 파악하고 있다는 말인가?
“사실, 인맥을 위해 파티에 참석했소만.”
“후훗. 남자들이란 다 그렇지요. 여자 아니면 인맥. 그래. 어떤 분의 줄을 서려고 그러십니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 직접적으로 이름을 언급했다.
“블라디아 자작의 사업에 관심이 있소.”
“호오~. 의외군요. 젊은분이 벌써 사업에 관심을 가지시고. 혹시 이번에 그가 추진한다는 새로운 광산에 투자하려고 그러시나보죠?”
묻지도 않았는데 남편의 사업얘기까지 술술 불어대는 티파니다.
집에서는 일에 관한 얘기는커녕 대화조차 하지 않으니 남편이 요즘 무슨 사업을 추진중인지 알 길이 없었는데, 귀족들 사이에서 꽤나 돈이 되는 사업을 하는 것으로 평판이 좋은가보다.
“그래서 자작에게 직접 좀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으면 하고 들렀더니 전부 가면을 쓰고 있는데다 워낙 가게가 넓어 찾기가 쉽지 않군.”
“진작에 이 마담을 찾지 그러셨어요. 자작님은 저희 티파니 VIP이신데 최신 정보는 이 사람이 전부 꽤고 있지요.”
사업에 투자할 사람을 붙여줄 때마다 수수료를 받는 것이 관례.
아마 마담은 이런 큰 술집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사업중개인 역할도 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은 다른 분과 이야기중이신가?”
“호홋. 아마도요.”
대답이 애매하다.
그녀의 웃음이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비밀스럽고도 어떤 은밀한 것을 공유하고 감춰주는 느낌.
“VIP라면 티파티에 자작이 자주 온다는 말인가?”
“단골이시죠. 오늘은 도련님 차례가 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듯 한데요. 다음에 제가 정식으로 소개해드리면 어떨까요?”
“아니. 사업설명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투자할 대상에 신뢰를 가지기 위해 일반적인 다른 대화와 관찰을 좀 하고 싶었소, 가면무도회가 그 기회가 될 것 같아 왔소만.”
“아아,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마담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았다.
신분을 노출하지 않고 투자하기를 바란다는 뜻은 넌지시 담아 말한건데 금방 알아들은 듯 보였다.
“지금 자작님은 4층에 있어요. 함께 계신 손님과의 이야기가 끝나면 제가 3층으로 모셔올테니 그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눠보시지요. 그나저나 얼마나 큰 투자를 하실지 저에게 귀뜸이라도......”
수수료 크기를 계산하려는 건가.
“얼마 전 먼 친척이 후계가 없는 상태에서 어마어마한 토지를 내게 상속하셨네.”
“아아......”
그녀는 기본적인 땅값으로 잠시 재산 규모를 가늠해보더니 계산을 끝냈는지 전보다 더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럼, 자작님을 보시기 전 잠깐이라도 파티 재미를 좀 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그녀는 2층의 젊은 남녀들을 가르키며 새빨간 입술에 호선을 그었다.
“가게가 아주 훌륭하군. 난 그럼 좀 더 둘러보겠소. 이야기가 잘 진행이 된다면 내 따로 마담에게 사례를 하겠소.”
마담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까딱 고개를 숙이고 다른 손님들을 챙기러 우아하게 사라졌다.
“4층이란 말이지.”
마담이 인파속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다음 조심스럽게 4층으로 올라갔다.
진짜로 시크릿한 공간인지 복도엔 사람이 없었고, 줄지어 있는 방도 전부 굳게 닫혀 있었다.
저 많은 방들 중, 한 곳에 내 남편과 내연녀가 있겠지.
천천히 하나 하나, 나무로 된 문을 노려보며 걷기 시작했다.
잉꼬부부는 아니지만 우리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다면 그가 있는 문 앞에서는 뭔가 다른 기분이 들지 않을까?
그렇게 서너 개의 문을 지나쳤을 때였다.
“하아......하흑!”
절절한 남자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말하는 목소리가 아니기에 정확하진 않았지만 순간, 온 몸이 소름이 돋았다.
내 남편 클린턴 블라디아 자작의 음성같았기 때문이다.
발바닥에 누군가 강력한 전기를 흘려보낸 듯 그 문 앞에 딱 붙어버렸다.
문 저 너머에서 숨이 넘어갈듯한 남자의 애타는 신음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후사를 잇기 위한 잠자리조차 거부하던, 깨끗한 척은 혼자 다 하던 남편을 저런 쾌락에 빠져들도록 만드는 여자는 어떤 얼굴과 몸을 가진 여자일까 궁금해졌다.
“후우......”
쓴 한숨이 나왔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 꼭 그 장면을 내 눈으로 봐야하는 것일까?
갑자기 목구멍으로 신물이 올라올 것 같았다.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여기까지 이 꼴로 온 것인가.
손잡이에 얹었던 손을 힘없이 떨구었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에게 철저하게 짓밟히고 패배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유모 실비아나 뒤에서 몰래 비웃던 하녀들의 태도에 세뇌당한 것일까?
남장을 한 내 몸을 내려다보며 새삼 정말로 내가 매력이 없어서, 나의 잘못으로 남편이 이리 된 것인 것 같은 자괴감이 들었다.
상상과 현실은 많이 달랐다.
현장을 급습해서 사진을 찍고 당당하게 남편을 협박하려던 나의 계획은 여자의 자존심이라는 이름 앞에 처참하게 무너져내렸다.
아직도 멈추지 않는 남편의 신음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그때였다.
“아...하아... 데몬!”
내가 잘못 들은 것일까?
처음으로 신음소리가 아닌 단어를 내뱉는 육성을 들었다.
흥분으로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분명 남편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데몬’ 이라니?
여자의 이름치고 너무 남성적이지 않나?
이미 내 귀는 문짝에 바싹 붙어 안을 살피고 있었다.
“사랑해요...... 데몬.”
차라리 듣지 말걸 그랬다.
명색이 비밀클럽을 자처하는 티파니의 방음시설이 뭐 이따위란 말인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교태스런 여자처럼 사랑을 속삭이는 남편의 목소리라니.
묻어두고 돌아가려 했던 나의 나약한 심장 속에서 갑자기 분노가 치솟았다.
“미친놈.”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귀족의 딸로 태어나 처음으로 해보는 욕설의 대상이 남편이라니.
“하아...아아...좋아요. 하악! 으윽!”
좋다고 신음소리를 내뱉던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숨막히는 괴로움으로 바뀌었다.
너무 좋아도 저런 소리가 나나보지?
더 이상은 참아줄 수가 없어 주머니에서 바로 사진기를 꺼내고 손잡이를 돌려 밀었다.
어라? 열린다.
당연히 잠겨 있을 줄 알았던 문이 쉽게 열리자 당황했던 것도 잠시.
아주 조심스럽게 문 틈으로 안을 확인하자 침실은 좀 더 휘어진 공간에 따로 있는 듯 보였고, 그 사이에 얇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두 사람의 그림자가 뒤엉켜 있었다.
정확하게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목덜미를 꺽어받치고 격렬하게 키스하는 실루엣이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오려는 심장을 부여잡고 조심스럽게 커튼을 아주 조금 열었다.
떨리는 와중에 신중하게 사진기 렌즈를 커튼 안을 향해 조준했다.
짧은 갈색머리는 분명 내 남편 클린턴의 것이었고, 그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위에서 키스하는 여자는......
여자인가?
윤기 흐르는 청은발이 아름답기는 하나, 여자의 골격은 아닌데?
머리는 이게 뭐야 하면서도 내 손가락은 연신 셔텨를 누르고 있었다.
남편의 입술을 덮고 있는 아름다운 남자는 뭐지?
나의 연적이 남자인가?
온갖 물음이 머릿속을 헤짚으며 보고 있는 것과 상상한 것의 괴리감이 전혀 좁혀지지 않는 이상한 증상이 내 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했으나, 그래야만 살 것 같아 나의 집게 손가락만은 미친 듯이 셔터를 눌러댔다.
황홀한 표정을 짓는 남편의 입술 사이로 새빨간 액체가 흐른다.
키스를 너무 열심히 하다가 혀라도 깨물었나?
아닌데?
줄줄 흐르는 선연한 붉은 핏줄기를 보다보니 클런턴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뭐....뭐야!”
내가 소리침과 동시에 청은발의 달빛같은 허연 얼굴을 한 남자가 입가의 피를 닦으며 축 늘어진 남편을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맙소사!
사람이야 귀신이야!?
침대 위로 던져져 축 늘어진 남편은 척 봐도 가망이 없어보인다.
내가 오늘밤 목격한 것은 남편의 외도 현장이 아니라......
살해 현장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