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아 자작의 죽음을 애도하는 검정색 물결이 떨어지는 빗방울 아래 넘실거렸다.
대부분은 셀린느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컴컴한 하늘 아래,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도 참석한 사람들이 고맙다기보다는 두렵고 무서웠다.
그들은 모두 목적이 있어서 미망인을 만나기 위해 온 것이다.
아버지는 장례식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치 이 자작성의 주인이 자신인 양.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작에겐 형제가 없었다.
고로 그의 모든 유산은 미망인인 셀린느 블라디아에게로 상속된다.
그가 진행 중이던 사업들이 어떤 것인지 하나도 모르지만, 사업 파트너였다거나 투자자였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버지의 표정이 계속 그녀의 신경을 긁었지만, 골치 아픈 사람들을 상대해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깨끗한 슈트를 입히고 핏줄이 푸르게 섰던 섬뜩한 얼굴이 곱게 화장되어 마치 잠을 자는 듯 누워 있는 남편의 시체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봤다.
셀린느는 예의상이라도 눈물을 흘려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죽은 남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청은발의 그 귀신같은 살인마가 떠올라 체온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매일 밤, 그녀의 꿈에 찾아와 입을 열면 죽이겠다는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했다.
악마 같은 웃음을 지으며.
아이러니한 건 그런 그가 굉장히 아름답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고운 얼굴로 살벌한 범죄를 저지르다니 얼마 전 읽었던 추리 소설의 남자 주인공을 대면한다면 ‘티파니’에서 목격한 그 남자 같을까.
살 떨리는 공포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옅어지고, 호기심이 위험 수준으로 짙어지고 있었다.
그를 다시 만나보고 싶다!
단순히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는 전설 속의 뱀파이어 정도라면 목표물이 남자인 남편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리따운 미모라면 얼마든지 여자들을 홀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향기로운 체향이 물씬 풍기는 보드라운 목 피부를 소유한 먹이 말이다.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죽은 이를 애도하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남편의 관이 옮겨지고 있었다.
그녀는 순간 자신의 태도에 스스로 깜짝 놀랐다.
이토록 부부간의 정이 없었나.
정말 눈곱만큼도 슬프지 않았다.
깊숙이 파여진 젖은 땅속으로 남편의 관이 들어갈 때, 잠시 가슴이 묵직해지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검정 관뚜껑 위로 뿌려지는 흙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감정 없던 셀린느의 눈동자가 어느 지점에서 멈칫거리더니 놀라움으로 점점 커졌다.
그 눈동자였다.
은회색의 차가운 눈동자!
비틀어진 시선으로 자신의 사진기를 뚫어지라 쳐다보던 그 소름 끼치는 살인자의 눈!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구름 아래 자신의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그는 멀찍이 떨어진 곳의 나무 기둥 뒤에 비스듬히 서서 장례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셀린느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두려움 때문인지, 그를 다시 만났다는 흥분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두려움은 가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은회색 눈동자는 셀린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묻히고 있는 죽은 자작의 관을 보는 것 같았으니까.
셀리느가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그를 향해 가려 할 때, 한 무리의 여자들이 그녀를 에워싸서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짤아냈다.
자작의 사업 파트너였다는 남자들의 부인들이었다.
그녀들의 얼굴 사이로 저 멀리 보이는 남자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 까치발을 하고 목을 길게 뺐다.
더욱 굵어지는 빗줄기와 함께 잠시 시야가 가려진 사이, 남자의 그림자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장례식이 끝난 뒤, 조문객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해야 했으나, 뒷 일은 아버지에게 맡기고 셀린느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왔다.
조금 전 빗줄기 사이로 보았던 남자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참 이상했다.
턱까지 깃을 추켜세운 망토와 검정 모자로 인해 그의 얼굴 일부분만을 보았을 뿐이지만, 살인자가 보여야 할 태도나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고인에 대한 예의를 갖춰 애도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셀린느는 살인자에 대해 알아낸 새로운 사실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첫째, 남편은 무작위로 선정된 먹잇감이 아니었다.
자작에 대한 정보를 알고서 접근한 것이다.
장례식장에 찾아올 정도로.
그렇다면 그 남자는 왜 남편을 죽인 것일까?
둘째, 살인자는 목격자가 셀린느 자신인지 모른다.
알고 왔다면 목표물인 그녀를 주시했을 것이나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오직 깊은 잠에 들어가는 고인의 관을 차갑고도 무거운 눈동자로 바라봤을 뿐이었다.
셋째, 근데 뱀파이어가 낮에 돌아다닐 수 있었던가?
세 번째 생각에 이르자 셀린느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밤에만 활보한다고 생각했던 상대가 낮에도 활동이 가능하다 생각하니 그녀의 행동범위가 더 좁아지겠다 여긴 것이다.
남장을 했던 목격자가 실은 자작부인이었다는 것을 절대로 들켜서는 안된다.
살인범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그녀가 조사하기 시작하면 추적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넷째, 티파니는 믿을 수 있는 여자일까?
장례식 직전에 마담 티파니를 찾았으나, 가게의 지배인은 그녀가 중요한 외출하여 부재중이라 했다.
가면무도회를 열었던 그 날 밤.
티파니는 4층에 있다던 남편의 위치를 알려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 남자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하는 다섯 번째 질문에 이르자 셀린느의 심장이 묘하게 두근거렸다.
다섯, 이렇게나 위험한 상대를 나는 도대체 왜,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
무료한 인생에 스릴이 필요해진 건가.
지나간 며칠 동안이 인생 통틀어 가장 심장이 쫄깃한 기간이었다.
공포스러운 순간에 맞닥뜨린 얼굴임에도 시선을 빼앗길 만큼의 강렬한 아름다움.
처음 보았지만 낯설지 않은 느낌.
당일에는 잘 몰랐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꿈속으로 찾아왔다.
심지어 입술을 연 적도 없는 그의 목소리가 말이다.
이게 한 번 찍은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 뱀파이어의 사냥 기술인가 싶을 정도로.
자신의 깊숙한 곳에서 어떤 욕망이 솟구치는 것이 꼭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그의 아름답고 섬세한 두 손이 그녀의 목을 잡아줬으면, 그리고 그 빨갛고 육감적인 입술이 나의 입술을 탐했으면.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 얼마나 황홀할까.
“어머나, 대체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셀린느 블라디아. 너는 오늘 땅에 남편을 묻은 미망인이라고. 더구나 그는 남편을 죽인 원수란 말이야.”
원수가 너무 아름다워도 문제구나.
그 미모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홀려서 피를 마시고 죽였을까.
식성을 보아하니 남녀를 가리지 않나 보다.
“아가씨.”
유모 실비아가 셀린느의 방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녀는 위로의 마음을 가득 담은 따스한 눈빛으로 셀린느의 손을 감싸 쥐었다.
“이제부터 단단히 마음먹고 굳세게 살아가셔야 해요.”
“응.”
“뭐 좀 드셔야 하지 않나요?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사과 수프라도 해드릴까요?”
“생각 없어.”
“지난 며칠 동안 통제대로 먹질 않았잖아요. 이러다 쓰러지세요.”
엄마처럼 살뜰하게 자신을 살피는 실비아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셀린느가 힘없이 웃었다.
“응. 내일부터. 오늘까지는 그냥 이렇게.”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 차지 않아 땅속의 블라디아 자작에게 미안하다면 위장이라도 비워둬야 양심적일 것 같았다.
“셀린느.”
그녀의 아버지 토마스 웨스트린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네 상태를 보니, 앞으로 내가 할 일이 태산 같겠구나. 넌 아무 신경 쓰지 말고 몸이나 추스리거라. 오늘도 내가 블라디아의 손님들을 다 상대하고 정리했고,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느냐. 넌 전혀 신경쓸 것이 없다.”
신경을 끄라는 말로 들렸다.
아마다스 제국의 보수적인 관례로 후계자가 없는 미망인이 남편의 재산과 영토를 영주로서 오롯이 관리하는 일은 거의 전무했다.
사위의 죽음을 애통해하기보다 어쩐지 활기차 보이는 아버지를 보자니 이제야 죽은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셀린느가 힘없이 대답했다.
“네. 우선은 아버지가 수고를 좀 해주세요.”
“우선? 넌 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하지 않느냐.”
토마스 웨스트린은 딸의 말꼬리를 잡고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원하지 않던 결혼을 강행했던 아버지가 이제는 그 결혼을 시킨 목적을 달성한 티를 드러내니 속이 뒤틀렸다.
셀린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네.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아무 것도 아닌 사람. 그런데 이제 그렇게 살다간 저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그 얘기를 오늘 아버지와 하고 싶진 않아요. 오늘은...... 오늘은 오롯이 그이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잠들고 싶어요.”
돌려서 말한 것이지만, 고인에 대한 태도를 짚어 자신에게 나무라는 말인 것을 눈치챘는지 웨스트린 남작은 헛기침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네가 뭘 아는 것이 있어서 그 큰 사업들과 재산을 정리하고 관리하겠니. 이제껏 누리며 지내던대로 해줄 것이니 뒷 일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말거라.”
웨스트린 남작은 엄포를 놓듯 그렇게만 말하고 딸의 방을 나가버렸다.
남편을 잃은 젊은 딸에게 그 어떤 위로의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얼마 전, 사고로 남편을 잃은 한 귀족 부인이 재산을 노리고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오빠들과 아버지에게 폭행까지 당하고 감금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셀린느는 웨스트린 남작가의 고명딸이고, 어머니 없이 자란지라 나름 웨스트린 남작이 아끼는 딸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
셀린느는 소문의 그 귀족 부인처럼 될 일은 절대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늘 아버지의 태도를 보아하니 셀린느가 영지 관리를 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자신의 아버지도 어떻게 난폭한 맹수처럼 변할지 알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핏줄보다는 재산인가.
입안이 썼다.
성안의 사용인들도 모두 죽은 자작의 사람들.
오늘 보니, 반은 아버지의 사람들로 갈아치워 진 듯 보였다.
이 넓은 성에서 자신의 사람은 오직 유모 실비아뿐이었다.
남편도 내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그늘에서 가졌던 힘이 과히 적지는 않았구나 싶어 서글퍼졌다.
자의든 타의든 지난날들의 목표가 블라디아 자작의 아들을 생산하는 것이었는데, 목표가 사라져 버렸다.
“아~.”
뭔가를 깨달은 듯 구겨져 있던 셀린느의 얼굴이 펴졌다.
“그래서였어.”
진전 없고 지루하다 못해 굴욕적이던 목표는 이제 셀린느의 인생에서 삭제되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짜릿하고 스릴 넘치는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이다.
비록 목숨을 담보로 할 수도 있는 목표지만 그럴 가치가 충분했다.
먼지만큼도 존재감이 없는 자작가의 미망인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었다.
아무 파동도 없던 건조한 직선 인생에 커다란 변곡선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깊숙이 넣어두었던 물건이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인화 기술부터 배워야겠어.”
꺼내 들었던 담배케이스를 다시 제자리로 넣으며 내일 할 일을 정한 셀린느는 오랜만에 유모 없이 홀로 깊은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