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다녀오셨습니까.”
넬슨이 자신의 집으로 들어선 데몬의 젖은 망토와 코트를 받아 들었다.
젖어서 축 늘어진 그의 외투만큼이나 표정도 무거워 보였다.
언제나 그랬지만 데몬은 목표물을 제거하고 필요한 ‘그 조각’을 거둬들이고 나면 죽은 자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어쩌면 이쟈니아의 영혼이 스며들지 않았으면 성실하고 평범하게 선한 인생을 살아갔을 사람들일지도.
그들의 가족들은 늘 피해자로 남게 된다.
가해자는 이쟈니아인가 데몬 자신인가.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일이 끝난 후 데몬은 늘 희생자의 남은 가족의 뒤를 문제없도록 해주는 것이 마무리라고 했다.
넬슨은 주인의 의견에 동의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이쟈니아의 영혼이 아니었다면 행복하게 계속 함께했을 가족이었을 수도 있지만, 때론 가족이라는 이름의 짐짝은 보는 사람이 없다면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이기도 하니까.
“블라디아 부인은 어떻던가요?”
“글쎄.”
대답이 어째 묘했다.
“부인은 망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표정을 읽을 수 없었어. 대신 그녀의 아버지는 신나 보이더군.”
“그렇겠죠. 후계자가 없는 자작의 재산이 미망인인 블라디아 부인에게 상속될 테니까요. 그녀의 친정 쪽 남자는 부친이 유일하지 않습니까.”
“눈물도, 오열도 없었어.”
“동성애자 남편을 둔 부인이 침실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가......”
데몬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클린턴 블라디아는 매우 치밀한 놈이었다.
그 정도의 가면을 유지할만한 능력이었다면 부인에게는 다정한 남편 역할을 충실히 했으려나.
데몬이 미간을 찌푸리며 젖어서 이마에 붙은 은빛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젠장, 목표물의 침실 사정까지 걱정해야 하는 것인가.
오늘 보고 온 미망인은 묘하게 데몬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땅속으로 들어가는 클린턴 블라디아의 관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자신을 향한 블라디아 부인의 시선을 모르지 않았다.
매우 적극적으로 보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유별난 조문객들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있는 자리까지 걸어올 태세였다.
자신의 미모가 눈에 띄기는 하지만 짙은 검정색의 옷과 모자로 거의 가려졌었고, 조금 떨어진 거리는 시야가 확보되지 않을 만큼 굵은 빗줄기가 세차게 떨어지는 날씨였다.
남편의 장례식날, 낯선 남자에게로 시선을 뺏긴 미망인이라니.
단순히 생각하면 정숙하지 못한 귀족 부인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까치발까지 한 그녀의 몸짓에서 꼭 뭔가 확인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읽혀졌다.
“이상한 여자군.”
“네?”
데몬은 피곤을 담은 표정으로 넬슨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젖은 솜뭉치처럼 눅눅하고 무거워진 몸을 그대로 넬슨의 응접실 가죽 소파에 뉘었다.
그의 긴 장화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소파의 매끈한 가죽표면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모여 작은 덩어리를 만들었다.
넬슨은 물끄러미 누운 데몬을 내려다보다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얼마 전, 패브릭 쇼파를 가죽 소파로 바꾼 것이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주인이 목표물의 장례식을 참관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니까.
***
“아가씨. 이젠 그런 변장 하실 필요 없잖아요.”
아침부터 블라디아 성에서 유모 실비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분간 필요해.”
“어째서요. 이젠 뒤를 캘 자작님도 계시지 않잖아요.”
이젠 유모에게 일부분은 말해줘야 하나 잠시 생각했지만 역시나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셀린느는 변장의 하이라이트인 콧수염을 정성스럽게 매만져 붙이면서 유모의 얼굴을 하얗게 만드는 대답을 했다.
“필요해. 살인범을 잡을 때까지.”
“세상에. 제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죠? 그건 수도 경비대에서 할 일이죠. 아가씨가 왜요? 아니 무슨 수로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거울을 전신을 비춰보며 복장을 갈무리한 셀린느가 눈동자를 빛내며 유모에게 말했다.
“정말 길거리의 잡범들이 클린턴을 죽인 거 같아?”
“경비 대장이 그렇게 말했으니 그런거죠. 아닌가요?”
“상식적으로 클린턴이 마차도 타지 않고 술에 취한 체 공원쪽을 걸어다녔다는 것이 믿겨져?”
유모의 입이 놀라움으로 벌어졌다.
“그 사람은 평소에 절대로 술을 과하게 먹던 사람이 아니야. 늘 사업과 관계된 약속이 빽빽하게 있었고 긴장한 채로 살았으니까.”
“그러면요?”“그냥 길거리에서 한탕 당하고 객사한 것이 아니라는 거지.”
“허억. 맙소사! 불쌍한 우리 자작님.”
실비아가 두꺼운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불쌍하다고?
만약 실비아가 자신이 본 것을 모두 듣는다면 저렇게 말하진 않을 것이다.
독실한 신자인 실비아가 블라디아의 죽기 전 마지막 행보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그런 짓이었다는 것을 안다면 기절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요? 그렇다고 아가씨가 뭘 어쩔 건데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는지 이젠 입을 가리던 손을 단단히 허리춤에 올리고 훈계할 자세를 취하는 실비아였다.
“아가씨의 생각이 맞다면 더더군다나 그런 위험한 일을 캐고 다니시도록 놔둘 수 없습니다.”
셀린느는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실비아를 가만히 보다가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유모.”
“안돼요. 절대 허락할 수 없어요.”“나 이번 일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어.”
“......”“결혼 전엔 아버지의 딸로, 결혼 후엔 남편의 부인으로, 남편이 죽으니 다시 아버지의 딸로 살아가야 하는 내 인생 말이야.”
“아가씨......”
“셀린느라는 내 이름으로 살아가는 내 인생이 갖고 싶어.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인 그림자 같은 존재 말고.”
“후우...... 그렇지만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어째요. 그래도 아가씨는 행운이에요. 귀족으로 태어난 것도 그렇지만, 귀족 이름값도 못하는 가난한 집안도 많으니까요. 자작님이 남긴 유산을 주인님께서 잘 관리해주시고 아가씨는 누리던 그대로 살 수 있잖아요.”
“그게 문제라는 거야. 아버지나 남편이 주는 호의가 없다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존재. 그게 좋은 것일까?”
실비아는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난처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유모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지금 그런 복장으로 위험한 일을 하러 외출하시는 것과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
“일단, 블라디아 자작부인으로서 남편의 죽음 뒤에 감춰진 진실을 밝혀낼 거야.”
“그런 다음엔요?"
“내 스스로 권리를 찾는 거지. 그가 진행하던 사업들은 그대로 아버지께 인계할거야. 그렇지만 영지와 블라디아 성은 내가 직접 관리할 거야.”
“여자가 영주가 된다구요?”
“전례가 전혀 없진 않잖아. 그 유명한 테일러 백작가도 한 때, 아들이 없어서 영애가 직접 가주가 되었었고.”
“그렇죠. 결국 영지에 침략을 받고 몰락했죠. 성공적인 사례는 아니네요.”
셀린느의 말에 실비아는 비관적이었다.
자신이 모시는 꽃 같은 아가씨가 그저 남자들이 보호해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그 향기를 유지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세상에 처음이 없는 일은 없어.”
“아가씨......”
“내가 그 최초의 선례를 만들면 되잖아. 여자도 영주로서 가문을 멋지게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말하며 셀린느는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고인이 된 자작이 나라에서 엄격하게 금지하는 율령을 어긴 자라는 것.
분명 그날 밤 티파니에서 자신이 본 것은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클린턴 블라디아였다.
남편이 살아만 있었다면 당당하게 한 몫 챙기고 이혼했겠지.
그의 만행을 입 다물어 주는 조건으로.
멋지게 자립하는 이름이 블라디아 부인으로서 영주가 되는 것이라니 남편의 성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독립을 하려면, 먼지 만큼의 존재감도 없는 블라디아 부인에서 영향력 있는 미망인으로 변신해야 한다.
그 변신을 위한 가장 효과적이면서 극적인 방법은 남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유족으로서 밝혀내는 것이다.
비록 남편의 은밀하고 어두운 죄가 만천하에 드러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만약 그리 된다면 한 동안 '그런 남자의 여자였던' 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겠지, 동정의 시선과 함께.
두렵고 또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극복해 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어머니. 제게 꺼지지 않는 희망과 용기를 주세요. 어머니가 원하시던 대로 살아갈 수 있게요."
가슴 속 저 깊은 곳에 열쇠로 꽁꽁 걸어 잠궈둔 방으로 들어간 셀린느는 오랜만에 추억속의 어머니를 소환했다.
자신처럼은 살지 말라던 웨스트린 부인을.
***
셀린느에겐 어릴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평민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호숫가에서 만난 동갑내기 필립은 신기한 물수제비로 셀린느의 승부욕을 자극했었는데 약속을 하지 않았어도 둘은 매일 같은 시간에 그 곳에서 만나 물수제비 내기를 했었다.
“설마, 이 매력적인 청년이 내가 아는 그 물수제비 여왕이신가?”
“쉿!”
“쿡쿡. 실비아가 알면 난리 나겠군.”
“이미 충분히 잔소리 듣고 나왔거든. 너까지 거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왜? 난 이 쪽이 훨씬 재밌는데.”
필립은 진심으로 즐거운지 휘어진 눈매에 짓궂음을 담아 셀린느의 배레모를 톡톡 쳤다.
그 손끝에 귀엽다는 감정이 듬뿍 담겨 있는 것을 모자의 주인은 절대 몰랐지만.
“왜 회사 근처에서 보자고 한 거야?”
“너 사진 인화할 줄 알지?”
“당연하지.”
“집에서도 암실을 만들 수 있을까? 만들기 힘들다면,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시간에 신문사 암실에 잠깐만 내가 들어갈 수 있게 해줄 수 있어?”
셀린느의 말에 필립의 짓궂던 웃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너 조금 이상해 보이는 거 알아?”
“뭐가?”
“장례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미망인이 외출을 하는 것이 입에 오르내릴까봐 변장해 나온 거 아니었어? 갑자기 혼자서만 해야 하는 사진 인화는 뭔데?”
“아무것도 묻지말고. 도와줄 거야 말거야?”
다른 이들은 셀린느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남편 돈으로 편하게 살아가는 어린 귀족 부인이라 생각했지만, 그녀의 아버지조차 모르는 그녀의 근성과 고집을 필립은 잘 알고 있었다.
‘말린다고 관둘 녀석이 아니지.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라도 찾겠지.'
“좋아. 직원들 모두 퇴근한 시간에 네가 외출할 수 있다면 내가 당직 서는 날 도와줄게.”
“진짜지? 고마워 필립.”
“대신~.공짜는 없다.”
필립이 턱을 살짝 들면서 장난스럽게 거들먹거리자, 셀린느가 얼른 대답했다.
“뭐든. 말만 해. 도와준 값은 톡톡히 치를 테니까.”
그녀의 시원한 대답에 잠시 따스한 기운이 필립의 얼굴을 휘감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중에 말해줄게.”
“뭐 얼마나 대단한 것을 요구하려고. 좋아.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데...... 언제야?”
“이번 주 당직일이 마침 내일이야. 내일 밤 10시 회사 앞에서 보자구.”
“좋았어. 진짜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 넌 모를거야.”
신이 난 셀린느가 덥석 필립의 손을 부여잡자 그의 얼굴이 빨개졌다.
얼굴색이 변한 필립의 얼굴을 보지 못한 셀린느는 여전히 그의 손을 잡고, 깡총 깡총 뛰다가 사람들 눈을 의식했는지 어흠 헛기침을 하며 점잖은 척했다.
그리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필립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내일 밤에 만나. 필립.”
인사를 마친 셀린느가 휘익 몸을 돌려 그대로 번화가 쪽으로 사라졌다.
우두커니 남은 필립이 조금 전까지 간질거렸던 귓불을 매만지며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셀린느.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오면 진짜 곤란하다구.”
셀린느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련하고 답답하던 증상은 그녀가 결혼한 이후 조금 잦아드는가 싶더니, 얼마 전 블라디아 자작부인의 부고 소식을 접한 후 필립의 가슴은 알 수 없는 설레임으로 다시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미친 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필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을 때, 깔끔한 브라운색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어깨를 툭 치며 인사를 건넸다.
“필립! 무슨 혼잣말을 그렇게 중얼거리나.”
“아, 편집장님.”
필립이 근무하는 아사펠라 신문사의 편집장 로트였다.
“방금 자네와 얘기하다 간 사람은 누군가? 한참을 진지하게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던데. 자네 정보원인가?”
“네? 하하. 아니요. 그냥 친구입니다.”
“흐음...... 그래?”
셀린느가 뛰어간 방향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던 편집장은 필립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건네고는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 책상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펼쳐진 종이 위에 그려진 몽타주의 주인공이 방금 자신의 부하직원과 대화를 나누던 그 젊은이와 똑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