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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라이트
작가 : 빛나라
작품등록일 : 2017.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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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재회(1)
작성일 : 17-07-19     조회 : 383     추천 : 0     분량 : 5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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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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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잠든 밤.

 블라디아 성에서 사부작사부작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불을 젖히고 조용히 일어난 셀린느는 작은 조명 하나만 켜놓고 남장을 했다.

 

 일부러 피곤하다며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든 셀린느를 본 유모 실비아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 아가씨.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시네. 사실 그동안 제대로 잠을 못 주무셨지. 불쌍해라.”

 

 셀린느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에 안쓰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요즘 들어 자주 ‘불쌍한 아가씨.’를 자주 언급하는 실비아에게 오늘 밤 외출을 알려 걱정을 부풀릴 필요는 없었다.

 

 외출 준비가 끝나자, 그녀는 긴 한숨을 쉬며 화장대 서랍을 조심스레 열었다.

 아직도 세상에 나가기를 기다리며 똬리를 틀고 있는 비밀 덩어리를 떨리는 손으로 꺼내 들었다.

 살 떨리는 그 날 밤, 티파니에서의 현장 사진을 자신이 다시 마주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아니야. 할 수 있어. 넌 해야만 해. 셀린느 웨스트린.”

 

 어느새 그녀는 블라디아라는 남편의 성이 아닌, 처녀적성을 붙여 부르고 있었다.

 “후우…….”

 그녀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한 다음 카메라를 재킷 안쪽에 야무지게 넣고, 툭툭 겉으로 드러나는 지 한 번 쳐봤다.

 

 밖엔 실비아 몰래 미리 준비시켜둔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조나단. 이 외출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에요.”

 실비아의 추천으로 채용한 마부 조나단이 셀린느를 향해 모자를 벗어 내리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아가씨의 안전을 책임질 마부에요. 아무나 쓸 수는 없죠.’

 누구보다 믿을만한 사람이라며 실비아가 데려온 남자는 마부라고 하기엔 필요 이상으로 몸이 좋았다.

 그가 투구와 갑옷만 착용한다면 매일 연무장에서 훈련하는 노련한 기사라 해도 믿을 것이다.

 친아버지보다도 자신을 더 아끼는 실비아의 추천이니 이력서 따위는 받지 않았었다.

 그는 말수가 적었고, 마차 운전 솜씨 또한 훌륭했다.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조나단은 그대로 마차를 달려 프라바의 가장 유명한 신문사, 아사펠라 앞에 셀린느를 내려줬다.

 

 “조나단, 미안해요. 금방 나오지는 못할 거에요.”

 

 조나단은 고개를 까딱 숙이며 씨익 한쪽 입술을 끌어올렸다.

 셀린느도 마주 보며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은 미소를 보내준 다음, 결연한 눈빛으로 아사펠라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

 

 “각하. 방금 쥐방울이 마차를 타고 와 아사펠라 앞에 내렸다고 합니다.”

 넬슨이 필립에게 붙여둔 사람을 통해 방금 들어온 소식을 보고했다.

 “언제부터 쥐새끼가 쥐방울이 됐지?”

 “쥐방울만 하니까요.”

 

 보고에 의하면 베레모를 쓴 녀석은 남자치고는 아주 왜소한 체구로 곱상한 외모였다고 한다.

 “쓸데없는 것까지 보고하는군.”

 “그래서 꼬~옥 다시 보고 싶다 하신 겁니까? 제법 곱상한 미소년이라던데요? 저한테는 그런 말씀 없으셨지 않습니까.”

 

 “말했으면?”

 데몬이 눈을 가늘게 뜨고 넬슨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제가 쥐도 새도 모르게 벌써 처리했겠죠. 각하께선 아름답고 연약한 것들에게 약하시지 않습니까. 또 최면술을 잘 걸어뒀다며 보내주고 1분도 채 되지 않아 쪼르륵 수도 경비대로 달려가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데몬은 끄응 신음소리를 냈다.

 자신이 거둬들인 저 녀석은 똑똑하다 못해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고, 뒤끝이 길었다.

 

 “신문사에 바로 발고할 생각이었다면 이 밤중에 왜 몰래 들어간 거지? 죄지은 사람처럼.”

 “그야 뻔하죠. 필립이라는 녀석의 친구를 통해 증거물을 확인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화가 가능한 장소가 아사펠라 안에 있을테니까. 그런데 왜 그걸 이렇게 조심스럽게 은밀히 확인하는 지가 더 궁금하군요.”

 

 데몬의 물음에 넬슨이 간단하게 추리해 대답했지만, 두 사람 다 정확하게 왜 그 목격자가 이렇게까지 비밀스럽게 사진을 확인하는지까지는 풀어내지 못했다.

 

 “가보면 알겠지.”

 

 넬슨이 산 고급스러운 물소 가죽 소파에서 데몬이 튕기듯 일어나자, 넬슨도 외투를 집어 들었다.

 “나 혼자 간다.”

 “안됩니다.”

 “네놈이 몇 년째 우려먹는 그런 일은 다시는 만들지 않을 테니 성가시게 따라붙지 마.”

 “그놈의 천사 근성은 이제 제발 버리십시오.”

 “벌써 잊은 거냐, 넬슨. 네놈이 갖다버리라는 그 ...... 것 때문에 지금 네놈 목이 몸통 위에 붙어 있는 거니까.”

 

 데몬은 차마 ‘천사’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못하고 자신이 넬슨의 은인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넬슨이 부드러운 미소를 담아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니 지금 각하께 충성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목숨 다 바쳐서. 다녀오십시오.”

 “네놈이 내 전생을 한 번이라도 마주했다면 그따위 건방을 떨진 않을 텐데 말이야.”

 너스레를 떨며 허리 숙인 넬슨을 향해 옅은 미소를 날리며 데몬이 창틀에 한쪽 다리를 올렸다.

 

 “각하. 문은 저쪽입니다만.”

 “네놈 수다 덕분에 지금 좀 늦어서 말이야.”

 

 그대로 3층 창문 밖으로 몸을 날린 데몬의 뒷 꽁지를 쫓아 넬슨이 창가에 붙어 섰을 때는 이미 저 멀리 검은 날개 끝자락만이 시야에 들어왔는데 그마저도 금방 점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모르시는군요. 전생까지도 갈 것이 없는 분이시죠.”

 

 장난기를 거둔 진지한 얼굴로 데몬이 사라진 창밖을 향해 넬슨이 존경을 담은 목례를 했다.

 

 ***

 

 밝은 조명 아래서라면 분명 더 웅장하고 깔끔했을 아사펠라의 로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셀린느.”

 

 어둠 속에서 필립이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필립!”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조심스런 걸음걸이로 살금살금 다가오는 셀린느가 너무 귀여워 필립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녀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두 번, 세 번 다른 이가 없는지 확인했다.

 “셀린느, 안심해. 아사펠라 안에 오늘 밤엔 너와 나 둘뿐이야.”

 괜스레 설레어 필립이 은밀한 말투로 둘 뿐이라는 것을 강조했지만 셀린느는 팔짝 뛰며 책망했다.

 

 “필립, 내가 남장을 했을 땐 샘이라고 부르라 했잖아!”

 “풉! 그치만 여긴 우리 둘 뿐인걸. 누가 듣는다고 그런 웃긴 예명을 쓰라는 거야.”

 

 “웃기다니, 얼마나 고심해서 지은 예명인데. 샘이라는 이름이 가장 흔하고 튀지 않는다고. 아마다스에 샘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셀린느가 곱게 휘어진 눈으로 필립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으래? 그 짧고 단순한 이름에 그런 심오한 배경이 있었어. 샘?

 필립의 위로 잔뜩 올라간 입가에 짓궂음이 가득 담겼다.

 그녀가 고운 드레스 차림일 때도 아름답다 생각했지만, 이렇게 남장에 어울리지도 않는 콧수염을 붙이고 나타날 때면 귀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샘’이라고 부르라더니 저런 이유로 지은 예명이었어?

 생각까지도 귀여운 여인이었다.

 

 “암실은 어디야?”

 “2층에 있어.”

 

 필립이 계단을 먼저 오르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대체 뭘 확인하길래 이렇게 은밀하게 해야 하는 거야?”

 “이번에 이렇게 도와준 것은 내가 두고두고 갚을 테니 질문은 하지 말아줘.”

 “그럼 네가 가져온 그 필름, 나도 못 보는 거야?”

 필립이 놀랍다는 얼굴로 걸음을 딱 멈춘 채 셀린느를 마주 봤다.

 셀린느가 미안한 표정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알겠어. 인화하는 방법만 알려주고 난 나가 있을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문 앞에서 기다려도 되겠지?”

 “필립, 넌 참 친절한 사람이야.”

 

 친절한 남자도 아니고, 친절한 사람이라니.

 너에게 난 그 이상은 아니구나.

 필립의 표정이 씁쓸하게 바뀌었지만 셀린느는 암실 문 앞에서 흥분하기 시작해 미처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자아. 그럼 똑똑한 아가씨. 인화 방법을 초고속으로 배워보실까요?”

 필립은 자상하고도 알기 쉽게 그녀에게 인화 방법을 설명해줬다.

 어두운 암실에 단둘만 있는 것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인화도 섬세한 작업인지라 딱 붙어서 이것저것 가르쳐 주자니 그녀의 달콤한 체향이 필립의 코를 자극했다.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베레모에 감추고 드러난 목덜미가 맨다리를 드러내는 것보다 더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필립?”

 

 테스트용으로 사진 하나를 인화하는 데 성공한 셀린느가 고개를 돌리며 필립을 향해 물었을 때,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 깜짝 놀랐다.

 “아? 으응.”

 

 얼른 거리를 두고 떨어졌지만, 필립의 목소리는 깊게 잠겨 긁는 듯한 쉰 소리가 났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셀린느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괜히 나 때문에 안 해도 되는 당직한 거 아니야? 그렇지? 그런 거지?”

 

 “흠흠. 아, 아니야. 진짜로 오늘이 딱 내가 당직 서는 날이었어.”

 그녀를 하루라도 더 빨리 보고 싶어 웃돈을 주고 당직을 대신 서주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다는 사실을 셀린느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셀린느는 그의 대답에 다시 인화 과정을 재차 확인한 다음 필립에게 요청했다.

 “이제 나 혼자서 할게.”

 “알았어. 문 밖에 있을테니 하다가 문제 있으면 바로 부르고.”

 “응.”

 

 필립은 못내 아쉬운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인화실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간 뒤 정확하게 문이 제대로 닫힌 것을 확인한 뒤에야 셀린느는 품고 온 물건을 조심스럽게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보석이 박힌 담배케이스를 열자, 감춰둔 소형 카메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셀린느는 필립에게 배운 순서대로 조심스럽게 인화작업을 시작했다.

 중요한 증거품이라 혹여 실수할까 봐 잔뜩 긴장해 집중하고 있는데, 인화실의 공기가 갑자기 서늘해지더니 한기가 느껴졌다.

 

 바쁘게 움직이던 셀린느의 손이 딱 멈췄다.

 그냥 서늘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손이 시렸다.

 그녀가 두 손을 모아들어 따스한 입김을 불어 넣었다.

 “인화실은 원래 이렇게 추운 건가.”

 연신 입김을 불어 넣던 셀린느의 등 쪽으로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휙 지나갔다.

 

 이상한 기운을 느낀 그녀가 홱 뒤를 돌아봤다.

 

 뭐지?

 셀린느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다시 인화작업에 집중할 때, 다시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 있나요?”

 혹시 자신과 필립 때문에 인화실에서 나가지 못한 사람이 있나, 잠시 생각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하아……. 이 사진들을 인화해서 보려니 내가 너무 예민해진 건가.”

 

 셀린느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다시 인화작업에 몰두했다.

 인화지가 용액에 처리되어 사진이 나오려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검은 그림자가 잠시 용액 위로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인화지들이 사라진 것이다.

 

 너무 놀라 하얗게 질린 채 입도 벙긋 못하고 있는데, 벽 위로 커다란 검은 날개 형상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

 “쉬잇……. 밖의 친구가 우리의 대화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군.”

 

 중저음의 무거운 목소리가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을 울렸다.

 셀린느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 목소리야!

 그를 죽인 그자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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