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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라이트
작가 : 빛나라
작품등록일 : 2017.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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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재회(2)
작성일 : 17-07-21     조회 : 408     추천 : 0     분량 : 4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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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기억하는군.”

 

 셀린느는 뒷걸음질 치다가 이제는 갈 곳이 없어 벽에 등을 바짝 붙였다.

 “당신, 누구죠?”

 “그러는 너는 누구지?”

 “나는 그의......”

 

 셀린느가 지금 자신은 ‘샘’이라는 것을 깨닫고 뒷말을 흐렸다.

 “놈의 애인인가?”

 기가 막혔다.

 

 “뭐라구요?”

 “괜찮다. 좀 비위가 상하긴 하지만 널 고발해서 처형당하도록 할 생각은 없다.”

 

 알만하다는 묘한 웃음을 머금고 그림자가 실체를 드러냈다.

 셀린느에게 한 걸음씩 다가오는 그림자의 주인공은 티파니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자태 그대로였다.

 몇 번이나 꿈에서 만났던가.

 청은발은 어두운 암실에서 짙은 밤하늘처럼 가라앉았고, 은회색 눈동자는 호기심을 가득 담아 달빛 아래 시린 호수처럼 반짝거렸다.

 

 순식간에 셀린느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는 그녀의 턱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요리조리 돌려가며 관찰했다.

 셀린느는 농락당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반항할 수 없었다.

 공포심 때문이라 자신에게 변명했지만, 그의 손길에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역시. 우연이 아니었어.

 내 예상이 맞았군.

 

 데몬은 셀린느의 얼굴에 손을 닿기도 전에 이미 가까이 가기만 했는데도 혈류가 편안해짐을 느꼈다.

 치유의 힘을 가진 성녀들이 있다지만, 데몬의 썩어가는 몸속은 성녀들의 능력으로도 치유되지 않았었다.

 오히려 잠시 데몬의 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던 성녀들은 하나같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신을 찾으며 벌벌 떨거나 기절하기 일쑤였다.

 

 이쟈니아의 조각들을 모두 거두어 정화시키고 나면 자신은 그렇게 악한 독기에 중독되어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신이 내린 벌이니까.

 자신을 희생하여 인간계에 평화를 가져온다면 신께서 천상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렇지만, 벌이자 임무인 그 일을 완수하지도 못한 채 악마의 어둠에 잠식되어 쓰러진다면?

 

 데몬은 눈 앞의 신비한 인간을 다시 한 번 뚫어지라 쳐다봤다.

 “애인이 아니라면, 남창인가? 곱상한 미모로 음지에서 그런 직업을 가진 자들이 있다 들었다.”

 “이런 미친 살인자 같으니라고! 감히 어디서 그따위 말을!”

 

 상식을 넘어 도를 지나친 언사에 셀린느가 분노하여 데몬의 손을 탁 쳐냈다.

 데몬이 놀랍다는 눈빛으로 한 대 맞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시원하다.

 가끔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손끝이 저리고 고통스러웠는데 그녀의 손길 한방에 마디마디 아프던 손이 말끔해진 것이다.

 

 데몬의 표정이 눈에 띄도록 환해졌다.

 고되고 지친 길 위의 여행자가 시원한 감로수를 대접받은 기분이었다.

 

 셀린느의 표정은 공포로 일그러졌다.

 모욕적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남자에게 욱해서 그 손을 쳐내긴 했는데, 미친놈이 맞은 제 손을 보며 실실 웃기 시작한 것이다.

 

 달빛처럼 허연 얼굴 아래 자리 잡은 붉은 입술이 꼬리를 올리고, 긴 눈이 휘어지자 무시무시하게 보였다.

 데몬이 희열이 가득한 눈빛으로 셀린느의 허리를 재빨리 휘감고 뒤로 휘어진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헉! 이제 키스를 하면서 내 피를 몽땅 빨아먹으려는 거야?

 셀린느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데몬은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품에 안았을 뿐인데, 제멋대로 움직이던 고장 난 심장이 정상적인 박동을 되찾은 것 같았다.

 

 아쉽군.

 이왕이면 여자가 좋았을 텐데.

 정화의 힘으로 충전하기 위해 녀석과 접촉하자면 모양새가 좋지 않을 테지.

 한 가지 걱정은 자신에게 에너지를 전해줄 결정체가 비리비리하다.

 

 “몇 살이지? 아직 덜 자란 것인가. 많이 먹어야겠군.”

 

 셀린느는 변태같이 자신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대며 느끼는 듯한 데몬의 행태를 보며, 곧 잡아먹히겠구나 생각했는데, 뜻밖의 말이 들리자 무서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살찌워서 먹겠단 건가.

 유명한 동화 ‘켄젤과 스레텔’ 이야기가 생각났다.

 과자집을 방문한 남매를 마녀가 가둬두고 계속 먹을 것을 줘서 살찌웠다는 잔혹 동화.

 

 “더 이상의 모욕은 사양이야. 죽일 테면 빨리 죽여. 이 더러운 흡혈귀야!”

 떨리는 목소리로 셀린느가 소리 질렀다.

 “뭐? 풉. 크크크. 흡혈귀?”

 “그 날 다 봤어. 블라디아 자작의 피를 먹는 네 놈을. 오늘은 본 모습을 숨기지 않고 날개까지 드러냈잖아. 네 놈이 살인흡혈괴물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흐음. 왜소한 체구지만 꼴에 사내라고 배짱은 있는 건가.

 데몬은 그리 생각하다 곧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진동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무서워 죽을 것 같은데도 절대 티 내지 않으신다?

 

 “마음에 드는군. 나와 지내려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죽여라! 그리고……. 밖에 있는 내 친구는 건드리지 마.”

 

 신선하다. 아주 신선해!

 데몬의 눈이 즐거움으로 휘어졌다.

 그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녀석을 조금 더 골려주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두려움과 어이없음을 섞은 셀린느의 목소리가 커졌다.

 “당신의 살인을 목격한 사람은 나 하나야. 밖에 있는 내 친구까지 죽일 필요는 없잖아!”

 "그래서?"

 "뭐어?"

 “네 말대로 난 미친 흡혈귀야. 쪼꼬만 네 놈의 피로는 배가 차지 않을 것 같은데?”

 이 상황이 매우 재밌는지, 데몬의 입꼬리가 얄미울 정도로 짓궂게 올라갔다.

 “안 돼!”

 

 저도 모르게 울분하여 커진 셀린느의 목소리에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필립의 목소리가 들렸다.

 

 “셀린느! 무슨 일이야?”

 데몬이 한 쪽 눈썹을 치켜세운 채, 미소를 유지하며 셀린느의 미간 사이에 세운 자신의 검지를 까딱까닥 좌우로 움직였다.

 “아, 아니야. 필립! 그냥 인화지 하나를 실패해서...... 괜찮아. 신경쓰지마.”

 

 셀린느가 크게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만족한 듯 데몬이 미소 지으며 그녀의 귓가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자……. 이제 거래를 해볼까?”

 

 셀린느가 대답도 없이 매섭게 데몬을 노려봤다.

 “이거 이거, 남자관계가 아주 복잡한 놈이군. 블라디아가 죽고 나니, 바로 저놈으로 갈아탄 건가. 녀석의 애타는 목소리가 문 너머까지 이렇게 생생히 느껴지다니. 저놈을 죽이면, 세 번째 애인도 금방 만들겠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건방진 말투부터 고치지 않으면, 내 배가 아주 고플 것 같은데 말이야.”

 

 데몬이 셀린느의 턱을 잡아채 올리며 은빛으로 빛나는 눈을 그녀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원하는 게 뭐야……? 요.”

 “간단해. 나를 네놈의 세 번째 애인이라 생각해.”

 “미친…….”

 “아, 그리고 이건 당연한 건데. 네가 봤던 것은 전부 잊어라. 어차피 증거물도 없어졌고, 떠들어봐야 믿을 사람도 없겠지만.”

 

 역시 미친 변태 놈이었다.

 남자를 즐기는 것도, 데리고 놀다가 피를 마셔버리고 죽이는 것도 전부다!

 티파니에서 뛰쳐나온 그 날 바로 사진기를 들고 신고하러 가지 않은 것이 뼈저리게 후회됐다.

 셀린느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문 쪽을 한 번 쳐다봤다.

 자신 때문에 아무 관련도 없이 도와준 필립까지 죽게 만들 순 없었다.

 

 “좋아요. 밖에 있는 내 친구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약속해줘요.”

 체념한 듯한 목소리리지만 꼭 다짐을 받겠단 눈은 데몬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 냈다.

 

 “좋다. 이로써 우리의 계약이 시작됐군. 나는 네놈과 저 바깥 놈의 목숨을 살려주고~ 네놈은 내 애인이 되는 거고.”

 

 데몬이 은근한 말투를 지어내며 셀린느의 뺨에 닿을 듯 입술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뜨거운 공기가 셀린느의 뺨에 모였다가 흩어졌다.

 그가 나타난 뒤로 줄곧 인화실의 공기가 냉랭했지만, 그 순간만은 달아오른 다리미를 뺨 가까이 가져온 것처럼 화끈거렸다.

 

 “두 번째 애인과 짧은 작별은 할 수 있도록 허하지. 내일 밤, 같은 시각 피렌트 성당 후원에서 보자구.”

 

 이렇게 풀어준다고?

 셀린느의 허리에 감긴 그의 팔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동그랗게 뜬 그녀의 눈을 보며 생각을 읽은 듯 데몬이 짧게 덧붙였다.

 “안 나와도 상관없어. 다 죽고 싶지 않다면.”

 

 흐물흐물 무너져 내릴 듯한 몸을 간신히 벽에 지탱하고 서 있는 셀린느를 두고 그가 천천히 인화실과 이어진 세척실로 걸음을 옮겼다.

 열린 창문 밖에서 바람이 일렁이자 창틀에 올라선 그의 청은발이 달빛을 받아 밝게 빛났다.

 창밖을 잠시 주시하다가 셀린느를 향해 고개를 돌린 그가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눈부신 미소를 날렸다.

 

 살인자 주제에 저 어울리지도 않는 근사한 미소는 뭐야!

 누가 사람 홀려 잡아먹는 살인귀 아니랄까봐.

 

 아니나 다를까, 데몬은 입술에 지퍼를 여미는 동작을 취하곤 그대로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셀린느는 겨우 지탱하던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셀린느!”

 

 뭔가 이상하다 느낀 필립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셀린느를 발견하고 놀라서 달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이상하다 했어. 대체 무슨 일이야?”

 

 휘이잉-.

 열린 창문으로 차가운 밤바람이 휘잉 불어 커튼이 휘날렸다.

 걱정스러운 필립의 물음에도 셀린느는 멍하게 창문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것도 꿈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나는 그 괴물 같은 남자에게 볼모로 잡혀 살아야 하는 건가.

 일방적으로 단 하루만의 시간을 주고 사라진 그 남자에게 앞으로 어떤 고문을 당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셀린느 웨스트린으로 살아가기 위해 내딛은 그 첫걸음에서 거대한 존재로 인해 길이 막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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