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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라이트
작가 : 빛나라
작품등록일 : 2017.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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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재회(3)
작성일 : 17-07-21     조회 : 398     추천 : 0     분량 : 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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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은 기분이 이상했다.

 인화실로 들어섰을 때, 이상하게 묘한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처음 셀린느와 둘만 있었을 때와는 공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하얗게 질린 표정의 셀린느는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아사펠라의 최연소 기자, 필립.

 필립은 직감적으로 열린 창문과 주저앉은 셀린느를 보며, 누군가 인화실 안으로 침입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인화실이 2층이니 날쌘 남자라면 창문을 통해 들어서는 것이 어렵지는 않겠지만, 도대체 왜?

 

 훔쳐갈 만한 값비싼 물건이 있는 곳도 아니고, 셀린느가 오늘 밤 이 인화실에서 혼자만의 사진 인화작업을 하리라는 것은 필립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굳이 필립의 도움을 마다하고 혼자서 인화작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수상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한 가지.

 공개되어서는 안 되는 사진을 인화한 것이겠지.

 또한, 그 사진을 노리는 자가 이 늦은 시각에 그녀를 쫓아 여기까지 온 것이고.

 

 “셀린느. 위험한 일이라면 나도 도와줄게. 제발 말 좀 해봐.”

 

 셀린느는 고개를 들어 필립의 얼굴을 마주 봤다.

 외동딸로 자란 그녀에게 늘 오빠처럼 친구처럼 다정했던 친구.

 그를 위험하게 하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니까.”

 셀린느가 애써 웃어 보이며 힘없이 대답했다.

 필립의 얼굴이 굳었다.

 

 나한테 못할 얘기가 도대체 무엇이야.

 “그럼 사진은?”

 “으응?”

 “인화했다는 사진이 하나도 없잖아. 보니까 필름도 없던데 대체 무슨 사진을 인화한건데? 너 정말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거야?”

 

 셀린느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인화실에 누군가 침입했던 거지? 널 이렇게 하얗게 질리게 만들고 사진과 필름을 갈취해간 사람이 누구야? 넌 왜 또 어울리지 않게 이런 일을 하는 거고 응?”

 

 하아……. 사람이 아니야 필립.

 사람이라면 차라리 그냥 신고하고 말지.

 

 셀린느가 조용히 속으로 대답을 삭히며 필립의 손을 잡았다.

 “걱정 마. 너에겐 피해가지 않도록 해뒀으니까.”

 “셀린느! 지금 그따위가 문제야?”

 “아무튼 오늘 고마웠어. 다시는 이런 무리한 부탁 하지 일 없을거야.”

 “대체 왜 이래. 셀린느!”

 돌아서는 셀린느의 팔을 필립이 거칠게 낚아채자, 언제 온 것인지 조나단이 눈썹에 힘을 주며 나직이 읊조렸다.

 

 “처리할까요. 아가씨?”

 “아니에요 조나단. 제 친구에요.”

 

 셀린느의 대답에도 여전히 필립의 손이 그녀의 팔에서 떨어지지 않자 조나단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졌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 셀린느의 모습에 힘없이 손을 떨구는 필립이었다.

 

 조나단의 마차에 올라탄 셀린느는 그렇게 아사펠라에서 멀어지는 동안 뒤돌아보지 않아도 필립이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작아지는 마차만 하염없이 보고 서 있을 필립의 얼굴이 생생하게 보이는 듯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무시무시한 자가 아직도 아사펠라 근처에서 자신과 필립을 관찰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 필립은 멀리해야만 한다.

 아니, 셀린느가 아끼는 모든 사람과 그래야만 한다.

 놈은 그녀의 가까운 누구라도 헤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남편 하나로 끝나지 않고 누군가 또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미안해. 필립. 너까지 잃을 수는 없어.”

 

 셀린느는 손끝이 하얘지도록 두 손을 꽉 말아쥐었다.

 

 ***

 

 블라디아 성의 주인이 장례식을 치른 후, 처음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자작부인이 식당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유모. 오늘은 아침을 아주 든든하게 먹어줄게.”

 “호호홋. 우리 아가씨가 웬일이실까. 뭐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셨어요?”

 자신이 밥만 잘 먹어도 저렇게 좋아하는 유모.

 셀린느는 순간 철없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지만 괜시리 천장을 보며 동그란 눈을 빠르게 깜빡깜빡거렸다.

 

 “자작님 그렇게 되시고, 얼마 만에 보는 밝은 얼굴이신지 모르겠네요.”

 

 유모, 그 자작님을 죽인 놈에게 나도 그렇게 될지도 몰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럼요. 그런 자세 아주 좋아요. 아가씨. 이제야 이 유모가 한 시름 놓겠네요. 그동안 엉뚱하게 범인을 잡는다는 둥, 흉한 말씀을 하셔서 얼마나 노심초사했게요.”

 

 응. 유모, 내가 잡으려 했는데 놈이 날 잡았네.

 “이제 내 걱정은 하지 마. 유모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는 나이가 한참이나 지났다구. 언제까지 노심초사할 거야?”

 

 “어째 오늘 아침 말 잘~ 듣는다 했더니, 왜 또 삐딱선을 타신대요.”

 

 그러게 유모, 평생 유모가 내 걱정하도록 딱 붙어 지내고 싶다.

 “진짜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없어. 실비아는 유모고, 난 자작부인이야. 누가 누구 말을 잘 듣고, 말고 한다는 거야!”

 셀린느가 속마음과 반대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가씨…….”

 놀란 유모가 무안한 얼굴이 되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젠 난 어린애가 아니야 유모. 앞으로 내 일일이 간섭 말고 자기 일에 충실하면 좋겠어. 보모가 필요한 나이는 지난 지 한참 되었으니 다른 집안 관리에 전념해줘.”

 “아가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 이 유모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아니. 진작 이렇게 해야 했는데 너무 질질 끌었을 뿐이야. 그리고 나 당분간 중요한 일이 있어서 집을 비울 거야.”

 “어디 가시는데요?”

 “방금 내가 한 말 뭐로 들은 거야? 주인 일에 일일이 간섭하지 말랬지.”

 

 실비아의 처진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서 애처롭게 셀린느를 바라봤다.

 그녀는 갑자기 쌀쌀맞게 구는 셀린느의 태도에 정말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했다.

 그러다가 뭔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뜨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설마 그 살인범인가 뭐시긴가를 잡는다고 이러시는 건 아니겠죠? 아가씨가 아무리 이 유모를 혼내셔도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유모가 눈치는 빠르네. 비록 내가 놈을 잡는 게 아니라, 놈이 날 잡아가는 거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일에 관해선 입도 뻥긋 하지만. 누가 물으면 그냥 자작부인은 개인적인 중요한 일로 오랜 기간 출타 중이라고 하기만 해.”

 “아가씨!”

 “내가 이 많은 음식을 하나도 손대지 않기를 바라는 거야? 응?”

 셀린느는 포크와 나이프를 든 채, 실비아에게 귀여운 협박을 했다.

 

 그녀는 눈빛으로 실비아에게 말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얘기하면 유모는 목숨을 걸고 날 쫓아오겠지.

 그건 안돼.

 

 애지중지 딸처럼 아끼는 주인이 식사를 거를까 봐 실비아는 거기서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아가씨의 말과 눈빛이 매우 상반되기 때문이었다.

 대신 샐러드와 하몽 등이 담긴 접시를 열심히 셀린느 앞으로 가져갈 뿐이었다.

 침묵한다고 해서 유모 실비아가 셀린느가 명한 내용에 동의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19년을 돌봐온 아가씨였다.

 방귀 소리만 들어도 오늘의 컨디션까지 알아채는 베테랑 유모가 셀린느의 엄포에 속을 리가 없었다.

 

 셀린느가 어디를 가는지 정도는 실비아가 인맥을 동원하면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셀린느가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동안, 실비아는 조용히 조나단을 불러냈다.

 

 “여어, 누님.”

 셀린느에겐 한없이 여리고 푸근한 유모가 인상 좋은 눈빛을 날카롭게 바꿔 말했다.

 “오늘 이후 아가씨의 행선지에 대해 잘 알아놔. 아무래도 위험한 일을 하시는 것 같단 말이지.”

 

 조나단이 고개를 까딱하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는 얼마 전부터 모시기 시작한 아가씨를 실비아 못지않게 아끼게 되었고, 위험한 일은 그의 전문이었다.

 

 ***

 

 아크나르 성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성의 주인이 아침부터 시종일관 콧노래를 불러댔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누가 보면 머리가 살짝 돈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그는 히죽히죽 웃어댔다.

 

 아침 일찍 성에 들른 넬슨은 보다못해 데몬에게 물었다.

 “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을 때가 되었다던데.”

 “으음~. 아니. 난 그 반대지. 죽어가다가 갑자기 바뀌면 장수한다고.”

 

 평소 같았으면 넬슨의 비아냥거림에 바로 발끈해서 반응했겠지만, 그는 여전히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라임을 맞춰 대꾸해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각하를 바뀌게 한 그 일이 대체 무엇입니까?”

 “드디어 찾았어.”

 “주어와 목적어는 어디로 버리셨습니까?”

 “하하. 뭐든지 척척박사처럼 잘도 추리해내더니 이번엔 뭔지 도통 모르겠어?”

 궁금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인 넬슨을 보며 데몬은 바로 대답해주기 아까운지 놀려댔다.

 

 “뭐,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넬슨이 데몬으로부터 고개를 홱 돌리며 가져온 가방에서 오늘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단 말이지.”

 천천히 몸을 돌려 소파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은 데몬은 긴 다리를 척 꼬아 앉았다.

 자신에게 무관심한 척 서류를 책상에 펼쳐 놓는 넬슨을 보다 데몬은 손가락 하나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턱을 괴고, 무심히 들어 올린 손가락을 휙 젓자, 서류들이 책상 위로 부유하기 시작했다.

 

 공중 부양해버린 서류들을 넬슨이 벌어진 입으로 올려다봤다.

 그리곤 다시 데몬을 향해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눈빛으로 물었다.

 

 넬슨의 그런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데몬은 한쪽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리며 손가락을 똑 아래쪽으로 떨어뜨렸다.

 깔끔하게 책상 위에 배열되어있던 서류들이 엉망진창으로 와르르 방 여기저기에 날려 떨어졌다.

 

 “어이쿠. 서류 정리를 다시 하셔야겠는데, 아크나르 대공의 비서님?”

 “각하. 능력이 회복되신 겁니까?”

 

 넬슨이 벌떡 일어나 데몬쪽으로 걸어오며 물었다.

 데몬은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한 넬슨의 표정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찾았다고 했잖아.”

 “설마…….”

 “그래.”

 

 이젠 대놓고 소리 내며 어깨까지 들썩이는 데몬이었다.

 “세상에 그런 존재가 있긴 있었군요. 대체 어디서 찾아내셨답니까?”

 데몬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넬슨이 물었다.

 

 “그게 아주 재밌단 말이지. 쥐방울이었어.”

 “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느린거야. 쥐방울! 그 놈의 성가시게 하던 목격자 놈 말이야.”

 “하아. 어떻게 그럴 수가.”

 “인간들의 명언 중에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난다.’ 라는 말이 있다지. 녀석이 나의 치료제로 태어났으니 당연히 내 앞에 딱 나타난 거지. 뭐, 첫 만남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녀석도 알고 있습니까?”

 

 데몬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어떻게 도움을 받습니까?”

 넬슨의 물음에 데몬이 비릿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이런~ 넬슨. 이 몸이 언제 누구한테 도움 따위나 받을 존재던가.”

 

 그럼요. 매일 도움을 받고 계시지요.

 저를 비롯해 많은 인간에게.

 각하가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존재인지 정녕 모르신단 말입니까.

 뒷 얘기가 궁금해진 넬슨이 튀어나오려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대신 당근을 쓰기로 했다.

 

 “그렇지요. 어디 각하께서 그런 분이십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넬슨의 물음에 데몬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오늘 밤에 다시 만나기로 했어. 이 성으로 녀석을 데려와 함께 살 거다.”

 

 “뭐라구요!?”

 넬슨이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나 소리쳤다.

 “제정신이십니까? 정체도 모를 놈을 이 성에 들이다니요!”

 “정체를 왜 몰라. 흡혈귀에게 피를 몽땅 빨려서 죽을까봐 벌벌 떠는 녀석인데.”

 “놈의 신분은요? 이름은요!?"

 

 “흐음……. 이름이라. 그걸 물어보지 않았군.”

 거들먹거리며 웃던 데몬이 넬슨의 말에 턱을 괴고 고민하는 척했다.

 황당한 주인의 대답에 넬슨의 눈썹이 이마를 넘어설 것처럼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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