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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빛나라
작품등록일 : 2017.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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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악마의 출현(1)
작성일 : 17-07-23     조회 : 413     추천 : 0     분량 : 6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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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이 되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아직은 이른 봄바람이 차갑게 느껴져 셀린느는 두껍지 않은 망토를 둘렀다.

 탑햇 아래로 감춰진 갸름하고 작은 얼굴엔 어울리지 않는 콧수염도 야무지게 붙어 있었다.

 

 지난번, 그자가 자신을 꼬맹이 취급하던 것이 생각나 일부러 신사복을 제대로 갖춰 입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복장이 뭐 중요할까 싶었지만, 친정아버지 토마스 웨스트린은 항상 복장이 태도를 변화시킨다고 했다.

 착용한 당사자나, 그를 대하는 상대방이나.

 

 그리고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품 안에 작은 단도도 감추었다.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존재인 것이 확실한 그에겐 이쑤시개로 덤비는 꼴이겠지만, 그래도 무기라고 소지하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듯했다.

 

 그에게 한 가지 바라는 점은 그저 약속을 잘 지키는 자이길 바랄 따름이었다.

 더 이상의 희생은 블라디아 부부까지로 끝나기를.

 

 입술을 굳게 다문 셀린느가 드디어 블라디아 성문 밖으로 나섰다.

 조나단이 조용히 그녀를 향해 모자를 벗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트렌체 대성당 후원으로 가주세요.”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밤 풍경이 오늘따라 더욱 고요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가로등 조명의 긴 꼬리도 아름다워 보였다.

 19년 인생에 기억할만한 특별한 날이 이다지도 없었던가.

 

 내가 죽으면 아버지는 기뻐하시겠지.

 클린턴 블라디아 자작의 유일한 상속인인 셀린느가 사망하면 자작의 그 많은 재산은 그녀의 아버지에게로 모두 상속된다.

 

 셀린느는 성을 나서기 전, 미리 편지를 가장한 유서를 작성해놨다.

 자주 열어보는 화장대 맨 위 서랍에 눈에 잘 띄도록 곱게 넣어뒀는데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실비아는 언제쯤 편지를 발견할까?

 지금 셀린느의 심정은 살을 태우는 잿더미로 바람을 안고 들어가는 느낌이지만, 편지를 발견하고 오열할 실비아를 생각하니 슬픈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없어진다면 제일 걱정되는 사람은 아버지도 아닌 유모 실비아였으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증거물인 사진을 인화하겠다고 아사펠라에 들른 것?

 아니면, 마담 티파니의 가면무도회 초대장을 받고 티파니로 간 것?

 시간을 거슬러 바람 피우는 듯한 남편의 뒤를 쫓아 커피하우스를 간 것부터?

 

 처음부터 남편이 바람을 피든 말든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니다.

 셀리느가 혼자 마차 안에서 고개를 가로로 세차게 흔들다 등받이에 털썩 기대었다.

 이런 식이면 결혼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 모든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자를 만나고야 마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지독한 악연이겠지.

 

 상념에 사로잡혀 자신의 속을 헤집는 동안, 마차는 벌써 트렌체 성당에 도착했다.

 조나단이 기다리겠다는 눈빛을 하자, 셀린느가 만류했다.

 

 “기다릴 필요 없어요. 약속한 만남이 아주……. 길어질 거거든요.”

 조나단이 잠시 셀린느의 두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젊은 아가씨의 목소리에 아주 깊은 고뇌와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그는 더 묻지 않고, 그녀를 트렌체 성당의 후원에 두고 빈 마차를 옮겼다.

 그리고 성당 근처의 공용 마차 보관소에 자신이 몰고 온 마차를 세워뒀다.

 

 휘이잉-.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자연의 기운 외에 이질적인 다른 기가 실려 있었다.

 조나단은 본능적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람의 시선으로는 쫓지 못하지만 분명 무엇인가 굉장한 속도로 지나갔다는 것을 느꼈다.

 어지간한 일엔 눈도 깜짝하지 않는 이 마부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등에 소름이 돋았단 사실에 흥분했다.

 셀린느 앞이라면 속을 알 순 없지만, 그녀는 충분히 느낄 만큼 다정한 눈빛을 했던 조나단의 안광이 살기등등하게 변했다.

 

 아가씨의 마부가 조용히 마차를 몰던 말 중 하나만을 빼내어 안장을 얹은 뒤, 트렌체 성당의 후원 근처에서 대기했다.

 

 

 대륙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아름다운 성당으로 유명한 트렌체는 낮과 밤이 아주 이중적이었다.

 웅장한 내부로 들어설 때면 늘 경건해졌고, 아치를 지나 후원으로 옮겨 가면, 빛이 충만하게 넘치는 아늑하고 포근한 후원이 신의 품처럼 신자들을 맞이했다.

 

 그러나, 밤엔 신을 농락하고픈 악마들의 놀이터가 되는 것인가.

 셀린느는 망토를 걸쳤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떨리는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시선을 사로잡던 황홀한 천사의 조각들이 달빛 아래에선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휘이잉-. 푸드득.

 

 자신의 숨소리 외엔 들리지 않던 고요한 후원에 바람을 가르는 커다란 소리가 나자, 셀린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다시 한 번 만나게 된다면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눈치 없이 나대는 심장 때문에 얼굴까지 굳어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첫 번째 천사의 조각상 뒤에서 조용히 검은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데몬은 아직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등을 보이며 서 있는 셀린느의 모습을 주시했다.

 멜빵 바지에 베레모를 착용했던 지난번과는 아주 대조적인 차림새였다.

 

 꼬맹이가 신사복을 입으셨군.

 데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아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한 그였다.

 충분히 의도가 보이는 차림새를 한 눈앞의 젊은 남자를 보며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본인은 기품과 연륜을 담고 싶어 착용한 의복이겠지만, 사실 너무 앙증맞고 귀여웠다.

 팔짱을 꼈다가 뒷짐을 졌다가 안절부절못하는 작은 신사를 보며 데몬은 풉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이 더러운 살인 흡혈 괴물!’

 지난번 만남에서 쥐방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 그가 상상하는 바가 이미지로 떠올라 숨죽인 어깨선을 들썩였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순식간에 다가가 목을 물어뜯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밤 외출을 하기 전, 넬슨은 더 이상의 장난은 허용되지 않는다 신신당부했다.

 비서 주제에 엄청 까다롭고 잔소리가 심했다.

 그만큼 실수 없이 깔끔한 일 진행을 하는지라 이제껏 곁에 두고 있고, 대부분 넬슨의 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우선 신분증부터 확인하세요. 수도는 언제든 검문검색이 가능한 곳이라 누구든 신분증을 소지하고 다니니까요. 만약 이를 거부하거나 신분증이 없다면 정체를 의심해봐야 합니다.’

 

 데몬은 지금 살아가는 이 인간계에는 ‘정화의 힘’을 가진 자가 없다고 결론 내렸었다.

 제어할 수 없는 고통의 횟수가 점점 늘어가는 중에 포기했던 그 힘을 가진 자가 나타났는데 녀석이 어떤 배경을 가진 사람이건 사실 아무 상관 없었다.

 

 그래도 비서 놈이 시킨 대로 확인은 해보지 뭐.

 데몬이 셀린느를 향해 한 발 내딛으려는 순간, 후원의 잔디밭 위로 스멀스멀 잿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데몬의 기다란 눈이 커졌다.

 이 기운은!

 

 차원의 문을 지키던 그 때, 늘 지옥의 문을 비집고 나오던 놈들의 냄새.

 지옥귀. 악마의 수하들.

 

 어째서 놈들이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거지?

 전투태세를 갖추려는 순간, 아지랑이는 덩치를 서서히 부풀리며 슬금슬금 쥐방울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노린 것이 내가 아니라 저 녀석?

 데몬이 잠시 의아해하는 사이, 순식간에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 만큼 덩치를 부풀린 잿빛 덩어리가 그대로 셀린느를 덮쳤다.

 

 “꺄아악!”

 

 잿빛 덩어리에서 촉수처럼 길게 삐져나온 가지 하나가 그대로 셀린느의 발목을 휘어 감았다.

 거꾸로 매달린 셀린느의 머리에서 신사 모자가 그대로 떨어졌다.

 검은 덩어리의 상단에서 야간 맹수 같은 형광의 두 눈알이 살벌한 빛을 뿜으며 그녀를 관찰했다.

 

 이... 이게 대체 뭐야!

 그 흉흉한 기운과 마주한 셀린느는 너무 놀라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아...... 악마?

 사납게 찢어진 형광빛의 커다란 두 개의 구멍, 그 위로 솟은 양쪽의 뿔, 거대한 발톱이 삐죽삐죽 솟은 날개.

 악마의 형상이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셀린느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크르릉. 키드키득 킬킬킬. 루시퍼......

 

 고저가 다른 여러 갈래의 목소리가 하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데몬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환생한 자신을 향해 분명 지옥의 것이 ‘루시퍼’라 불렀다.

 아주 오래전, 소유했던 영광의 이름.

 

 연기처럼 땅에서 솟아 이제는 제대로 된 형상을 갖춘 오랜만에 보는 적이었다.

 -루시퍼…….

 놈은 데몬을 한 번 주시한 뒤, 기절한 셀린느를 한 발로 움켜쥐고 그대로 날아올랐다.

 

 “감히!”

 

 데몬이 땅을 박차고 그대로 점프하자 그의 등에서 숨어 있던 커다란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윤기 흐르는 검은 깃털이 아름답게 뒤덮인 그의 날개가 몇 번의 날갯짓을 퍼덕이자 어렵지 않게 악마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그대로 하강한 데몬이 긴 다리로 악마의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잠시 휘청한 악마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바늘 같은 비늘이 뒤덮인 꼬리를 데몬을 향해 후려쳤다.

 가볍게 몸을 돌려 피한 데몬과 재차 거칠게 공격하는 악마의 몸싸움이 성당의 높은 첨탑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기절했던 셀린느가 천천히 실눈을 떴다.

 거꾸로 매달린 그녀의 시야에 트렌체의 십자가가 아주 멀리 보였다.

 저린 다리를 올려다보니, 거대한 괴물의 발톱에 꽉 쪼여있었다.

 

 오, 신이시여!

 -크아아앙!

 고막을 찢을 듯한 괴음과 함께 셀린느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꺄아악!”

 셀린느가 비명을 질렀고 더욱 거칠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에 뭔가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 자였다.

 오늘 밤 트렌체 성당 후원에서 만나기로 한 악마 같은 자.

 셀린느의 눈에 비친 살벌한 공중전은 악마와 악마가 싸우는 모습이었다.

 겉모습의 차이만 있을 뿐.

 

 세상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악마 한 놈과, 정말 신서에 나오는 악마의 형상을 한 무시무시한 괴물이 자신을 먹잇감으로 두고 다투는 듯 했다.

 

 아아, 이왕이면 보기 좋은 악마에게 먹히는 것이 나으려나.

 상상을 넘어서는 힘으로 자신의 다리를 움켜쥔 악력에 고통스러웠다.

 

 아!

 셀린느는 자신의 품속에 호신용으로 숨겨운 단도가 생각났다.

 바로 꺼내려 했으나, 자신의 두 팔이 의지와 다르게 공중을 휘젓고 있었다.

 밤하늘을 엎치락뒤치락 덮으며 미친 듯이 싸워대는 두 악마 덕에 몸을 통제하기가 힘들었다.

 

 “후우…. 후우…. 합!”

 심호흡을 한 뒤, 기합소리와 함께 배에 힘을 준 셀린느가 몸을 구부림과 동시에 품에서 단도를 꺼내 바로 역수로 쥐었다.

 때마침, 자신을 움켜쥐고 있던 악마가 몸의 방향을 틀었고, 거기에 맞춰 셀린느는 손끝에 온 힘을 실어 발톱을 감고 있는 비늘 덩이를 향해 단도를 내리꽂았다.

 

 순간, 날카로운 고통에 움켜쥔 악마의 발톱이 느슨해졌다.

 

 “됐어! 어…. 꺅!”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졸렸던 다리가 시원해짐과 동시에 그대로 셀린느의 몸이 뾰족한 첨탑을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틀어 올린 머리를 감싼 가발이 먼저 땅 위로 떨어졌고, 그녀의 웨이브 진 밤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눈앞에 펄럭였다.

 

 아, 결국은 추락으로 죽는 거였어.

 고통스럽게 잡아먹히는 것보다 나은 죽음인가.

 아득하게 의식의 초점이 흐려지며 셀린느의 눈이 다시 스르륵 감겼다.

 

 데몬은 악마와 싸우면서도 놈의 발에 걸려있는 쥐방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절한 녀석은 축 늘어져 있었다.

 제길!

 

 지옥의 것들이 냄새를 맡은 것인가.

 인간의 몸으로 환생한 그를 찾아낸 악마는 아직 없었다.

 

 기막힌 타이밍이군.

 하필 자신의 힘의 원천이 될 녀석을 만나기로 한 밤에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낸 이 악마놈이 의문스러웠다.

 

 그때였다.

 악마의 공격을 피하며 몸을 회전시킨 데몬의 눈에 쥐방울이 꼼지락거리는 것이 포착됐다.

 달빛에 반짝이는 날붙이가 보인 것도 잠시.

 기특하다 싶었던 순간, 녀석은 바보같이 바로 악마의 발등에 그것을 힘껏 꽂고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쥐방울!”

 데몬이 날개를 접고 전속력으로 수직 낙하했다.

 3미터, 2미터, 1미터…….

 타앗!

 셀린느와 데몬이 간격이 빠르게 좁혀졌고, 드디어 그녀가 데몬의 팔 안에 들어오자 그는 힘껏 날개를 폈다.

 

 위윙-. 위잉-.

 크게 움직이는 날갯짓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윙윙 울렸다.

 -크아아아앙!

 동시에 데몬을 공격하기 위해 낙하하는 악마의 부르짖음도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데몬의 품 안에서 추욱 늘어진 셀린느의 긴 밤색 머리카락이 곱게 날개바람에 하늘거렸다.

 달빛보다 더 하얀 데몬의 얼굴에 의외라는 듯 놀라움이 담겼다가 이내 미소가 퍼졌다.

 

 조심스레 그녀를 안은 데몬이 날갯짓의 속도를 줄이며 그대로 트렌체의 십자가 바로 위에 멈춰 섰다.

 

 “곱상한 사내놈인 줄 알았더니…….”

 

 

 데몬은 고개를 삐딱하게 꺾어 품 안의 여인을 내려다봤다.

 앙증맞게 옴폭 패인 인중 아래, 탐스럽고 도톰한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아름다운 셀린느의 얼굴을 감상할 시간을 악마는 길게 주지 않았다.

 검은 밤하늘이 진동할 정도로 굉음을 내는 녀석이 데몬을 공격할 사정권을 좁혀왔다.

 

 차갑고 묵직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놈을 노려보던 데몬이 셀린느를 안은 채, 잠시 공중에 정지상태로 날개만을 움직이다 고개를 비틀어 숙였다.

 달빛 아래 반짝이는 청은발의 머리카락이 굴곡진 밤색 머리카락과 물감이 섞이듯 아래로 떨어졌다.

 이윽고, 고개를 든 데몬의 입꼬리가 씨익 만족스러운 호선을 그었다.

 

 “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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