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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라이트
작가 : 빛나라
작품등록일 : 2017.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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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천사와의 거래(3)
작성일 : 17-07-28     조회 : 444     추천 : 0     분량 : 4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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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몬 18화.

 

 기나긴 얘기였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자, 대공은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로 셀린느가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풀어서 설명했다.

 셀린느는 점점 그의 이야기에 깊게 빠져들며 놀랐다가 분노했다가 공감했다.

 

 데몬과의 만남은 언제나 셀린느에게 충격이었다.

 그는 늘 무섭거나 모욕적이거나 둘 중 하나로 그녀를 휘저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셀린느에게 아주 정중하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셀린느 블라디아, 나와 함께 신성한 임무를 완수해주겠나.”

 생전 누구에게 부탁할 일이 없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셀린느는 수줍어졌다.

 

 주책맞게 왜 이래. 정신 차려 셀린느.

 지금 각하께서 네게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잖아.

 

 얼굴을 붉히던 셀린느가 정신을 차리고자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정리가 필요해요. 그러니까, 각하의 말씀대로라면 제 남편은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 ‘악마의 조각’이 스며들어 조종당한 거군요?”

 “본래의 성품은 가려져서 어떤지 모르겠군. 그러나 점점 악행의 도가 지나치게 커진 것은 그 조각 때문이지.”

 

 다행이야.

 죽은 그 사람이 본래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어서.

 

 “근데 제게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은 정말 믿기 힘들어요. 말씀드렸지만 정말로 저는 평범한 사람이거든요.”

 “신의 힘이 비추는 곳에 그 밝음은 분명 근거가 있지. 근거 없는 능력은 없어. 모든 현상엔 분명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데몬의 말에 셀린느의 저 깊은 가슴 속 어느 한구석에서 사명감과 신앙심이 뭉글뭉글 끓기 시작했다.

 

 “각하,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얼마나 홀로 해오신 건가요?”

 데몬을 바라보는 셀린느의 눈동자에 존경의 빛이 담겼다.

 “후우. 황성을 떠나면서부터 주욱.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도와주는 이들이 꽤 많아.”

 데몬이 긴 다리를 꼬며, 팔걸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울였다.

 “넬슨님은 역시 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죠?”

 “가장 많이 알지만, 다 알지는 못하지.”

 

 전혀 그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외로움이 묻어났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데몬의 표정이 아득해지며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셀린느의 얼굴에 이제 이전의 적개심과 분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혼자만의 상념에 잠시 빠졌던 데몬이 셀린느와 눈을 맞추었다.

 “다 알려고 하지마. 다쳐.”

 

 씨익.

 윤곽이 또렷한 아름다운 입술이 기분 좋게 호선을 그렸다.

 

 악마의 조각들을 스스로의 몸에 심으면서 점점 죽어가는 사람.

 세상의 모든 어둠을 자신의 속에 가두고자 검은 날개를 펄럭이는 죄 많은 천사.

 

 그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는 셀린느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대역죄를 저 위에서 저질러 어둠으로 물든 날개로 새로 태어났다 말했다.

 속죄의 길은 인간계 깊숙이 숨어든 ‘악마의 조각’을 모두 수거하는 것.

 

 그런 그에게 내가 힘이 되어줄 수 있다!

 누군가의 그림자로만 살아가던 내가 캄캄한 곳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단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네. 당연히.”

 

 데몬의 긴 눈꼬리가 기쁨으로 휘어졌다.

 밝았다. 아주 많이.

 그의 미소가 눈 부신 햇살보다 밝게 느껴졌다.

 이래서 천사인가 싶을 정도로.

 셀린느의 동그란 눈도 예쁘게 휘어지며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데몬의 입술로 저도 모르게 시선이 옮겨간 셀린느의 뺨이 또다시 붉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럼, 전 잠시 레이디룸에 좀......”

 아아, 진짜 뭔소리야. 각하 앞에서 레이디룸이라니!

 

 “잠시만 셀린느.”

 

 데몬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깜짝 놀란 셀린느의 목과 귀까지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다.

 

 “고맙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야. 진심으로 고마워.”

 

 불타는 숯덩이를 맨손으로 잡은 듯, 그의 손에 잡힌 손이 화끈거렸다.

 

 “아, 흠흠. 뭐…. 뭘요. 공짜로 해드리는 것도 아닌걸요.”

 “뭐?”

 셀린느가 어느새 누구에게 배운 것인지 한쪽 입꼬리만 얄궂게 말아 올렸다.

 “그렇게 활동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려면 제 독립적인 생활을 보장해주셔야죠. 더구나 일반 저택도 아니고, 무려 아크나르 대공의 성이에요. 이곳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자작가의 미망인을 어떻게 문제없이 보기 좋게 포장하실 건가요?”

 

 데몬이 문제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비서를 불렀다.

 “넬슨!”

 

 그의 수석보좌관이 기다렸다는 듯,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네. 각하.”

 

 “셀린느, 내가 아까 나를 도와주는 이들이 꽤 있다고 말했지? 그대처럼 모두 내게 대가를 원하지. 어떤 형태로든 난 그 대가를 꼭 지불한다. 영광의 퓨리어 그 황족의 성에 걸고.”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영광의 퓨리어’까지 들먹이시는지.

 넬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특히, 이 녀석은 그 대가가 제일 비싸거든. 팍팍 부려먹어야 돼. 본전 뽑으려면.”

 “후우. 하명하십시오. 각하.”

 

 넬슨이 한숨을 쉬며 명령을 기다렸다.

 “지금부터 나 아크나르 대공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작의 미망인을 정식으로 후원한다. 그에 걸맞는 배경을 잘 짜봐. 포상은 블라디아 자작가의 영지와 장원, 영주의 자리다.”

 

 그럼 그렇지.

 이놈의 주인이 내리는 명령엔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명 받들겠습니다. 각하.”

 

 데몬과의 만남 이후 셀린느의 표정이 가장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우와! 정말로 넬슨 님이 그런 능력자이신가요?”

 그녀는 체면도 잊고 불쑥 다가가 넬슨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찌나 해맑게 웃으며 잡은 손을 팔이 빠지게 흔들어대는지, 냉정한 넬슨이 크게 당황했다.

 “어 흠흠. 부인, 그냥 넬슨이라 부르십시오.”

 넬슨이 팔을 빼며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을 본 데몬의 얼굴이 티 나게 찌푸려졌다.

 “그 능력은 이 대공의 배경을 등에 업고 있기에 가능한…….”

 “잘 부탁드립니다. 넬슨 님!”

 

 셀린느가 목소리를 높이며 넬슨에게 고개를 숙였다.

 지나치게 솔직한 그녀의 표현에 넬슨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살짝 지나쳐갔다.

 

 “그럼, 잠시 각하와 얘기를 좀 나누겠습니다.”

 “아. 네네. 당연히 그러시겠죠.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부인께서 머무실 방은 서재를 나가면 기다리고 있는 시녀가 안내를 해줄 겁니다.”

 “네에? 제 방이요?”

 “아직 밖의 위험이 해제된 상태가 아니니 당분간은 여기 계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셀린느가 데몬을 쳐다봤다.

 데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각하,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셀린느가 치마도 아닌 신사복 바지 옆을 손가락 끝으로 잡으며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그녀의 앙증맞은 입술 위엔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콧수염이 붙어있는 채였다.

 

 그 모습에 데몬과 넬슨이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겨우 잡아내리며 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셀린느가 열고 나간 서재의 문을 바라보던 데몬의 입꼬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올라갔다.

 “발칙한 능력자 같으니. 공짜로 해드리는 것도 아니라고? 대담하지 않느냐? 암만. 나를 정화시킬 정도의 힘을 가진 여자야. 당연히 저 정도는 당돌해도 되지.”

 

 “그러게요.”

 어련하시겠냐는 비아냥이 가득 담긴 대답이었다.

 데몬의 표정이 금새 무뚝뚝하게 돌아왔다.

 “뭐가 좋아서 씰룩거려.”

 “일복이 터져서 그럽니다.”

 “그럼 빨리 일하러 꺼져.”

 

 “블라디아 부인의 일이라면, 이미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잠깐 사이에 벌써 데몬이 보기 좋도록 정리한 서류를 준비해온 넬슨이었다.

 

 “지독한 놈.”

 넬슨의 허점을 잡아 마구 구박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각하보다야 덜 지독하죠.”

 

 넬슨이 건넨 서류를 검토하던 데몬의 표정이 시원해졌다.

 “봐줄만 하군.”

 “완벽하다 인정하셔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습니다만.”

 “시끄러.”

 

 모두에게 좋은 계획이었다.

 데몬도, 셀린느에게도.

 

 [ 고인이 된 블라디아 자작, 남몰래 몬스터전쟁의 희생자 유가족을 후원하다 의문의 습격으로 사망!

 - 고인의 뜻을 이어, 왕제 데몬 퓨리어 아크나르 대공이 블리디아 미망인의 후견인이 되다.- ]

 

 데몬이 기분 좋게 넘기는 서류의 첫 장.

 내일 아침 대서특필될 신문의 헤드라인이었다.

 

 “그리고 각하.”

 “그래. 인정!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한다는 것만.”

 “그게 아니라.”

 

 데몬이 책상에 구둣발을 그대로 올리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또 뭐?”

 “황성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데몬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자신을 매우 아끼던 형님을 황성을 떠난 이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이 나라, 아마다스 제국의 황제, 레노만 퓨리어 아크나르.

 

 데몬의 나이 열 살이던 해.

 남들과는 다른 스스로의 힘에 각성한 지는 오래 되었고, 등에 검은 깃털이 돋아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최초로 여섯 왕국을 통일한 ‘전쟁터의 붉은 야수’ 카르스 퓨리어 아크나르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유일한 적통형제.

 

 전장을 누비던 그 찬란한 붉은 눈을 이어받진 않았으나, 현명함으로 언제나 균형을 중시하던 괜찮은 황제였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그의 형제에게 후계자인 아들이 생기자, 데몬은 떠났다.

 그에겐 황가의 싸움보다 더 치열한 다른 차원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떠나 있는 동안에도 간간히 황성의 소식은 그의 귀에 날아들었다.

 황후가 아닌 다른 비들에게서 태어난 왕자들이 하나씩 죽을 때마다.

 결국, 모든 왕자가 죽었고 아크나르 성을 가진 남자는 황제를 제외하고, 그의 조카 파디앙 퓨리어 아크나르와 데몬 자신이 유일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하나뿐인 조카 파디앙은 그 위대한 ‘퓨리어’의 성을 이어가기엔 매우 병약했다.

 

 모두 제거된 것이겠지.

 데몬이 아는 레노만 퓨리어 아크나르 황제는 자신의 적통 아들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다른 왕자들을 모두 제거할 성품이 아니었다.

 그는 태생적으로 피를 싫어했다.

 온화한 아마다스의 아버지!

 레노만 황제의 별칭답게.

 

 데몬이 무거운 눈빛으로 자신의 비서에게 물었다.

 “파비앙이 몸이 약하다더니, 결국 그리 된 것인가.”

 “아닙니다. 폐하께서......”

 

 데몬이 책상에 꼬아 올린 다리를 벌떡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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