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비에 뛰어갈까 하다 추억의 빗장을 자극하는 흙냄새에 못 이긴 척 발걸음을 늦췄다.
여름과는 조금 다른, 비릿한 듯 따스한 봄비 냄새. 향긋한 꽃내음을 담은 물방울 하나가 코끝을 톡, 건드리고는 이내 어디론가 흩어져 버린다.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작은 골목. 토독토독, 말갛게 이마를 두드리는 작은 노크 소리에 저항 없이 머리 속 잡념을 내어줘 본다.
*
2008년 3월의 마지막 금요일. 봄비가 내리고 있는 어느 대학교.
토독, 토독-
봄비가 내린다. 빗방울이 스쳐 간 자리에는 겨우내 잠들어있던 초록빛이 진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단단한 아스팔트 바닥에는 이른 봄맞이에 나섰다가 나무에서 떨어진 벚꽃 잎이 달라붙어 분홍 꽃길을 만들었다.
나는 인문사회관 현관 앞에 서서 손을 쭉 뻗었다. 손바닥에 올라탄 빗방울이 마치 꽃망울을 터뜨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간지럽힌다.
빗방울이 그리 크고 강하지 않아 도서관까지 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22.5세 진해연은 아직 젊으니까.
"자, 그럼 달려볼까?"
마음을 결정한 나는 곧바로 전공 책을 머리 위에 얹고 달려나갈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머리 위로 커다란 그늘이 드리웠다.
"어라?"
"해가 문을 열고 들어온 진해연."
고개를 들어 상대를 살피기도 전에 기분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가로 내려앉았다.
언제 들어도 심장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목소리.
"아, 선배."
"어디 가?"
"도서관이요."
나는 밉지 않게 눈을 흘기는 선배를 향해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엄한 표정으로 내려다본 선배가 내 곁으로 나란히 섰다.
선배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은 우산을 활짝 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쓰기에는 조금 앙증맞은 크기의 우산 속에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비 맞으면 감기 걸려."
자그마한 천 하나가 만들어낸 비밀스러운 공간에 들어가니 귀가 먹먹해졌다.
빗소리와 함께 울리는 선배의 말을 한참이나 곱씹은 나는 한 박자 늦게 답했다.
"괜찮아요. 이슬비인 걸요."
"이런 비가 더 무서운 법이야."
아버지들이나 할 법한 말을 던진 선배는 앞을 주시하고서 발을 내디뎠다. 나 역시 쪼르르, 선배의 발걸음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
중앙도서관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
길가에 늘어선 초록 이파리 사이로 봉긋하게 솟아난 작은 봉오리들이 보인다. 이제 조금 있으면 색색의 철쭉과 진달래, 개나리가 얼굴을 내밀겠지.
분홍, 노랑, 하양, 빨강, 초록... 제각각 알록달록 물들어 햇살을 더 빛내줄 꽃들을 상상하니 벌써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그거 아세요?"
"뭘?"
"이번 비가 그치면 꽃이 잔뜩 필 거래요."
"봄을 부르는 비네."
선배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반듯한 입꼬리는 평소보다 살짝 올라가 있었다. 참 솔직하지 못한 성격이라니까.
나는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빗방울에 손이 말갛게 씻기는 느낌은 언제나 기분 좋다. 삐죽 나와 있던 입술이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비가 좋아?"
"음. 비도 좋고, 눈도 좋고, 바람도 좋고..."
내가 전공책을 안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자 피식, 바람을 담은 웃음소리가 흘러내렸다. 귓가에서 시작된 기분 좋은 울림이 둘만의 공간을 가득 채웠다.
웃음을 거둔 선배가 손을 내 머리에 올렸다. 고작 손 하나가 얹어졌음에도 내 심장은 코끼리 한 마리가 앉은 듯 묵직해졌다. 그 때문에 나는 책을 안은 손을 꼬옥 모아쥐었다.
"난 해가 좋은데. 너처럼 동글동글해서."
"보통은 달덩이 같다고 하지 않나요?"
"너는 달보다 해가 더 어울려."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말. 아니, 어느 것이든 상관없다. 이미 심장 위에 앉아있던 코끼리는 떠나고 살랑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실은 저도 해가 제일 좋아요."
선배의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수줍은 목소리만큼 수줍은 얼굴은 차마 들지 못하고 겨우 우산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우산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반갑다. 빗소리에 말이 묻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분홍빛으로 물든 볼도 빗방울이 가려주면 좋겠다.
"야누슈 코르착... 야누슈..."
나는 다음 주로 다가온 교생실습을 준비하기 위해 교육학 서적을 찾았다. 하지만 웬만한 남자보다도 더 큰 책꽂이가 나를 가로막았다.
"에휴, 전공책이 아니라서 그런가."
하필 맨 위에 꽂혀있을 건 뭐람. 나는 심호흡을 하고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 올렸다.
자, 이제 뒤꿈치를 최대한 올리고 다리 하나를 뒤로 쭉 뻗으면-
"읏차."
"어라?"
내가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책이 마술처럼 저절로 책꽂이를 빠져나온다. 책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책은 선배의 손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내려다 본 선배는 책을 내 손에 얹어주며 장난스레 말했다.
"언제 키 커서 혼자 책 꺼낼래?"
"제 성장은 이미 중2 때 멈췄답니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허공을 향해 웃음을 던진 선배의 또 다른 손에는 방송 서적들이 들려 있다. 기자를 준비하고 있는 선배와 늘 함께하는 책들.
늘 차분하고 이성적인 선배는 충분히 좋은 기자가 될 거라 믿는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머리보다는 행동 먼저인 나지만 마음으로는 언제나 선배를 닮고 싶다.
"방송국 입사모집 얼마 안 남았죠?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어요?"
"그럭저럭. 그나저나 교생실습 가면 한 달이나 못 보는 건가?"
나의 끄덕임과 함께 백곰을 닮은 남자가 포옥 한숨을 내쉰다. 다 큰 남자가 입을 삐죽 내민 모습이 무척 귀여워 나는 선배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선배는 갑작스러운 포옹에 움찔 놀라더니 금세 두 팔 가득 힘을 주어 끌어안는다. 백곰에게 파묻힌 모양이 된 나는 고개만 빼꼼 내밀어 선배를 올려다봤다.
"주말에는 볼 수 있어요."
"안 돼. 부족해."
주말로는 부족하다는 말과 함께 더 세게 안으니 내가 좋아하는 시원한 향수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아, 기분 좋아.
한참을 안고 있던 선배가 대뜸 나를 몸에서 떼어내 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학교 가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
"음, 모르는 것도 아는 척?"
"어린 녀석들한테 막 헤실헤실 웃고 다니지 말라고 했지."
"에이, 그래도 선생님인데 헤실헤실이 뭐예요."
딱콩, 선배가 아프지 않게 꿀밤을 먹였다. 아야, 그래도 아파.
입을 삐죽 내밀고 올려다보니 팔짱을 낀 선배가 오히려 삐친 표정을 짓고 있다.
"너 평소에 하는 거 보면 불안하다고. 아무한테나 웃어주니까 다른 남자들이 착각하잖아."
"나 참, 선배 눈에나 예뻐 보이지."
"암튼! 어린 녀석들이 좋다고 따라오면 남자친구 있다고 딱 잘라버려. 알았지?"
나는 목이 부러질 정도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린 선배가 내 머리 위를 콩콩 두드렸다.
아, 손보다 조금 더 차갑고 단단한 이 감촉은 바나나 우유다.
"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나나 우유!"
"이거 먹고 얼른 커서 나한테 시집와라."
대답 대신 빨대를 꽂아 쪽 빨아먹는 내 허리를 선배가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너무 깜짝 놀라 우유를 뿜을 뻔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꺅! 여기 도서관이에요."
"제일 안쪽이라 오는 사람도 없는데, 뭘."
그래도. 언제 누가 올지 어떻게 알아.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 고개를 푹 숙이고 빨대를 입에 물었다.
따스하고 커다란 두 손이 내 볼을 감싸 올렸다. 우유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가득 담은 얼굴이 나와 눈을 맞췄다.
"내가 좋아하는 진해연."
쪽, 아주 짧은 순간 보드라운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 만큼 내 얼굴도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를 보며 웃는 선배의 눈이 가늘게 늘어졌다. 다시 한번 얼굴을 내린 선배가 입술과 입술을 맞댄 채로 내 이름을 불렀다.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진해연."
맞닿은 입술 사이로 전해지는 울림에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입술에서 시작된 간지럼이 볼과 심장 그리고 손끝과 발끝까지 퍼져갔다.
입술에서 이마로, 눈으로 자잘한 입맞춤을 옮긴 선배가 다시금 두 손으로 내 볼을 감싸고 눈을 맞춰왔다.
나는 온몸을 잠식한 떨림을 들키지 않게 손에 있는 노란 항아리를 꽉 움켜쥐어야만 했다. 한참 동안 짙은 눈을 마주친 선배가 입을 뗐다.
"그 빛, 나한테만 비춰줘야 해."
"응."
"약속."
말로는 부족한지 선배가 새끼손가락을 들었다. 나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흔든 뒤, 선배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쪽, 입술로 도장을 찍었다.
"나 진해연은 선배만의 반짝반짝 빛나는 태양이 될 것을 약속합니다."
어느새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햇살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봄꽃을 닮은 자잘한 웃음을 피워내는 우리 둘 사이로 햇살이 더욱 말간 빛을 냈다.
**
봄꽃처럼 한순간 미친 듯이, 온 세상에 다 보란 듯이 온전히 사랑했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온 빗방울에 후두둑 사랑이란 감정을 떨궈버렸다.
생살과도 다름없는 꽃송이를 떨어뜨릴 때는 살을 베어내는 듯한 고통이 따랐다. 철저하게 사랑했던 만큼 처절하게 아파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사랑의 흔적만 남은 자리에는 아픔도, 슬픔도 남아 있지 않다. 단단히 봉해두었던 기억의 상자를 열어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나의 첫사랑을 가져간 사람이니까. 나의 아름다운 한순간을 함께 만들어준 고마운 사람이니까.
오늘도 봄비가 내린다.
가장 설렜고, 가장 사랑했고, 가장 처절했던 순간의 기억이 내린다. 사랑이란 이름의 꽃송이가 눈물을 닮은 빗방울을 따라 내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봄비가 지나간 자리에 여린 햇살이 살그머니 다가올 것이다. 언제까지나 젖어있을 것 같던 움푹 팬 자국도 이제 햇살의 손길을 따라 조금씩 말라가겠지.
"Que sequen las lagrimas en tus ojos."
(부디 네 눈에 가득 찬 눈물이 마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