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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걷는 순례길
작가 : 에스뗄
작품등록일 : 2017.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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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 설렘주의보(2)
작성일 : 17-07-11     조회 : 31     추천 : 1     분량 : 5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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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좀 걸을까요?"

 "그러던지요."

 

  성진 씨가 밴과 함께 떠나고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는 일단 걷기로 했다. 정말 걷기만 했다. 밀가루도 나도 깍지낀 손을 덜렁거리며 앞만 보고 걸었다.

  힐끔 도둑 눈길로 훔쳐본 그의 옆모습이 선선하다. 한강 둔치에서 민낯으로 모자만 쓰고도 반짝반짝한 남자라니. 그에 비해 나는, 나는...

 

 "하아, 말해서 뭐해."

 

  5분이 넘도록 한마디 말 없이 걷기만 하자 어색함과 지루함이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리드한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그저 가는 길을 이끌겠다는?

  내가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허리를 비틀기 시작할 때쯤, 밀가루가 잡은 손을 제게로 당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노래 들을까요?"

 "그게 낫겠네요."

 "잠시만요."

 

  깍지를 끼지 않은 손을 주머니에 넣은 밀가루가 제 가루로 만든 국수를 닮은 이어폰을 꺼내 흔들었다.

  이제 이어폰을 핸드폰에 꽂아야 하는데 미련 맞은 밀가루는 한 손으로 두 가지 모두를 들고서 쩔쩔매고 있다.

  보다 못한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를 대신해 이어폰을 핸드폰에 꽂았다. 어느새 마스크를 턱까지 내린 그가 나를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손을 놓고 하면 되잖아요."

 "안 돼요."

 "아니, 왜? 잠깐 놓았다가 다시 잡으면 되잖아요."

 "싫어요."

 

  다섯 살 아이처럼 뭐라 해도 안 된다, 싫다는 말과 함께 그가 손가락이 교차한 손에 힘을 싣는다.

 

 "이러다 손에 땀 차겠어요."

 "그럼 내가 말려줄게요."

 "퍽이나."

 

  여름 습기에 일찌감치 땀이 찬 얼굴은 마스크를 벗어버린지 오래.

 

 "어차피 어두워서 사진에도 잘 안 보일 것 같구먼."

 

  그가 남은 한 손으로 이어폰 한 짝을 내 귀에 살짝 꽂아주었다. 하나로 연결된 손 위로 두 갈래 길처럼 나뉜 이어폰이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귀를 이었다.

 

 "듣고 싶은 노래 있어요?"

 "DJ 마음대로."

 "좋아요. 달이 빛나는 밤에 DJ Moon을 찾아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서기 2015년에 옛날 옛적 음악다방 DJ 흉내를 내고 있다. 심지어 동그랗게 돌린 팔을 배 앞에 놓고 인사하는 신사를 흉내 내기까지.

  어차피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면 나오지 않을 사람임을 알기에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가만히 DJ Moon의 선곡을 기다렸다.

 

 "우리 두 사람의 노래로 시작해볼까요? 도준&Luna, 달빛의 향기."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 그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 모습이 마치 달빛의 향기를 맡는 것 같아 나도 그를 따라 여름 공기를 한가득 들이마셨다.

  이윽고 이어폰을 통해 은은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분명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달빛 아래를 걷는 우리 두 사람의 목소리가 가만가만 들려온다.

  다시 들어봐도 가사가 참 좋다. 가슴에 맺힌다고 해야 하나? 책이나 영화를 아무리 많이 본다 해도 표현해내기 어려운 감성이 있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것처럼.

 

 "이 노래 가사, 도준 씨가 지은 거라고 했죠?"

 "넵."

 "본인의 경험도 들어간 거예요?"

 "음, 글쎄요."

 

  내 얼굴을 한 번 봤다가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린 그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웃어넘긴다. 그렇단 거야, 아니란 거야?

  흥,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는 걸음을 멈춰 서고 한 손을 허리에 얹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협조 못 해줍니다. 아무리 가짜...읍!"

 

  장난스럽게 웃던 밀가루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더니 황급히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커다란 손바닥이 마스크처럼 얼굴을 가려버렸다. 뭐, 뭐야!

 

 "쉿, 조심해요. 기자가 들으면 큰일 난다구요."

 "으브브..."

 "예쁘게 말할 거죠?"

 

  두근두근.

  갑자기 숨이 막히는 바람에 체내산소가 부족해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심장이 정신없이 펌프질을 시작한다.

  두근두근.

  그가 얼굴을 내려 내 귀에 대고 경고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는 새까만 밤하늘을 닮은 눈을 맞춰오며 어린아이를 달래듯 속삭였다.

  밀가루의 눈빛에 압도된 나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는 다시 한번 확답을 받은 후에야 팔을 풀어주었다.

 

 "푸하!"

 

  조금 과장해 생과 사의 경계에 다녀온 나는 급히 산소를 들이마셨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어 그를 있는 힘껏 쏘아봤다.

 

 "무식하게 힘만 센 밀가루 같으니."

 "뭐라고요?"

 "못 들었으면 됐어요."

 

  나의 날 선 눈짓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살핀 밀가루가 잡고 있던 내 손을 다시 고쳐 잡았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밀가루는 아까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마치 누군가 들으라는 듯.

 

 "일단 가사는 드라마 내용에 충실한 거예요. 그런데 네티즌들이 우리 두 사람과 연관 지어서 해석한 걸 봤더니 그것도 꽤 그럴싸 하더라구요."

 "일단 본인의 경험은 아니다?"

 "그 사람들 말대로 우리 얘기라고 생각하죠, 뭐. 그럼 내 경험 맞겠네요."

 

  흥, 이런 식으로 능구렁이처럼 넘어가시겠다?

 

 "좋아. 이번만 봐줄게요."

 

  나도 인터넷에 올라온 반응은 본 적 있다. 단어 하나하나를 밀가루와 나의 연애소설에 대입하는 네티즌들의 가사해석 능력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더랬지.

  드라마와 연애의 평행이론이라나. 그래서인지 유독 드라마 속 작은 사건과 결말에 촉각을 곤두세운 이들도 있었다.

  문득 드라마의 결말이 궁금해졌다.

 

 "드라마는 어떻게 끝나요?"

 "그거야말로 알려줄 수 없죠."

 "아, 왜? 여자친구한테 그것도 못 알려줘? 문도준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인색하네!"

 

  아니, 진짜 연애사도 아니고 드라마 결말 좀 알려주면 뭐 어때서? 내가 스포일러라도 할까 봐?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닐지라도 생각할수록 열이 올라왔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양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밀가루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볼을 콕 찔렀다. 입안에 가득했던 공기가 뾱, 하고 빠져나오며 빵빵했던 두 볼이 푸쉬쉬 가라앉았다.

 

 "미리 들으면 재미없잖아요."

 "어디 보자. 우리 기자님이 어디쯤 계시려나?"

 "잠깐, 잠깐!"

 

  내가 이번에도 넘어갈 줄 아냐? 나는 두리번거리며 왔던 길로 다시 돌아섰다. 그러자 그가 뒤에서 한 손으로 내 어깨를 감쌌다.

  한 손으로는 나의 손을, 나머지 한 팔은 내 몸을 잡은 그는 몸에 은근히 힘을 주어 내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단단한 몸이 작은 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밀착했다.

  흥, 내가 이래 봬도 왕년에 우리 아빠랑 레슬링 좀 했거든? 내가 몸을 거세게 비틀어 빠져나오려 하자 그가 드디어 항복을 선언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진작에 그럴 것이지. 그리고 30cm 미만 접근 금지."

 "분부대로."

 

  작은 한숨을 내쉰 밀가루가 손을 잡아끌어 나를 가까운 벤치에 앉혔다. 내 경고에 따라 30cm 옆에 앉은 그가 깍지낀 손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

 

 "이 손 좀 놓으면 안 되나? 땀날 것 같은데."

 

  내가 손을 꼼지락거리자 그가 어림도 없다는 듯 은근한 힘을 준다.

 

 "오케이, 항복."

 

  네 맘대로 하라는 의미로 손에서 힘을 풀자 밀가루가 나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네 미소 때문에 포기하는 거 절대 아니다. 착각하지 마라.

 

 "음, 일단 지금은 두 사람이 엇갈렸던 시간 속의 일들로 인해서 오해가 쌓이고 있어요."

 "만나지 못했던 10년을 말하는 거죠?"

 "맞아요. 그 둘도 사람인지라 서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고, 각자의 삶을 만들어왔을 거잖아요."

 "그렇죠."

 

  짧다면 짧은 1년이란 시간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야기가 생기는데, 하물며 10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교집합 없이 각자의 삶만 살아온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으면 그 수는 최소 두 배가 되겠지.

  상대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 마치 댐이 열리듯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문제는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질서 없이 서로 얽히다 보면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삶의 조각들이 서로 부딪치기 시작한 거죠. 예를 들어, 사소한 습관이 거슬린다거나 각자의 과거를 공유한 주요인물을 만난다거나."

 "음."

 "그런데 그 조각들이 부딪치면서 부서진 파편이 두 사람을 찌르기 시작해요. 그래서 두 사람은 의도치 않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아파하고 있어요."

 

  삶의 조각이 부딪쳐 만들어낸 파편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것이 상대를, 나를 어떻게 찌르는지 알 수가 없다.

  심지어 날카로운 파편이 내 심장을 후벼 파고 있는 순간에도 내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렇게 서로를 찌르고 상처입히다 지쳐버린 후에는 사랑했던 순간도 잊고 돌아서는 것이다.

  너덜너덜해진 가슴을 부여잡고, 언제 나을지도 모른 채로 하염없이 아파하는 수밖에.

 

 "그래서요? 설마 헤어지는 건 아니죠?"

 

  나의 물음에 밀가루는 얄궂은 미소를 보내왔다. 마치 승기를 쥔 사람처럼 얼굴에는 여유마저 넘친다. 뭐야. 헤어진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조바심이 난 나는 잡은 손을 흔들며 그를 재촉했다. 드디어 굳게 닫힌 채 호를 그리던 입술이 열렸다. 그래, 어서 말해!

 

 "오늘은 여기까지."

 "에엣? 더 알려줘요. 이제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했단 말이에요."

 "이 다음은 방송으로 직접 보시죠."

 

  아놔, 장난해? 사람 마음 안달 나게 만들어놓고 빠지는 수법이 드라마의 절정에서 끊는 것과 똑같았다.

 

 "감독이나 배우나 똑같네, 똑같아. 어쩜 이렇게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지?"

 

  요즘 아이돌 소속사에서는 노래에 춤, 연기도 모자라 외국어, 교양, 독서까지 가르친다더니 거기에 처세술도 포함되나?

 

 "진짜 못됐네. 기대 빵빵하게 부풀려 놓고는 단숨에 김을 빼버렸어."

 

  싱긋 웃으며 다가온 밀가루가 내 볼을 꼬집었다. 마치 신기한 동물을 보듯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자꾸만 볼을 톡톡 건드린다.

  이 시키가 진짜. 열 받은 진해연을 건들면 어떤 사달이 나는지 한 번 보여줘?

  하얀 손가락을 확 물어버릴까 생각하다 기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근들즈므르. (건들지 마라.)"

 "해연 씨 지금 저기서 폭죽 옆에 있는 아기랑 똑같은 거 알아요?"

 

  밀가루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 끝에 한 가족이 보인다. 그리고 폭죽 옆에는 이제 다섯 살쯤 됐을까 싶은 동글동글한 남자아이가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입을 쭉 내밀고 있다.

 

 "내가 저 애 같다고? 어딜 봐서?"

 "삐쳐서 볼 빵빵하게 부풀리고 있는 거. 꼭 호빵 같아."

 

  나는 볼을 누르는 밀가루의 손을 탁, 쳐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내 볼을 찔러댄다.

  말은 바로 해야지. 맨날 삐쳐서 볼 빵빵, 입술 쭉 내미는 호빵은 너거든? 이 밀가루 시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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