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서울, 늘해랑 작업실 앞 골목
"그래서 기자랑 협상은 잘했어요?"
"덕분에요."
한강에서 폭죽놀이를 한 이후, 약 일주일 만에 밀가루가 알록달록 마카롱을 들고 작업실 앞으로 찾아왔다.
"그동안 촬영 막바지라 시간도, 기력도 없어 연락을 못 했어요, 갑작스레 큰일을 겪게 해 미안해요."
"미안할 것까지야."
대신 난 그만한 대가를 받았는걸.
입에 닿자마자 바삭 소리를 내며 부서진 마카롱은 곧 쫀득한 속살을 드러냈다. 마카롱이 부드럽게 녹아 사라진 뒤에도 입안에는 레몬 향이 맴돌았다.
그가 내민 분홍, 노랑, 연두, 커피색 마카롱을 보고도 내 심장은 아무렇지 않다. 아마 그날은 밤에 취해 그랬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도 돈 잘 받았어요. 고마워요."
폭죽놀이와 함께 기자유인 작전을 펼친 다음 날, 내 통장에는 정말로 돈이 들어왔다. 성진 씨가 핸드폰에 찍어 보여주었던 금액 그대로 아주 정직하게.
통장에 찍힌 금액을 보고서야 실감했다. 아, 우린 정말 비즈니스를 하고 있구나. 가슴 콩콩 뛰는 애들이 하는 장난이 아니구나.
밀가루는 대답 대신 흰 종이를 내밀었다. 고이 접힌 종이를 펼치니 1부터 50까지 숫자와 함께 단정한 글씨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나 드라마 촬영 끝났어요."
내 손에서 분홍색 마카롱을 가져가 입에 문 그가 엄마의 쓰담쓰담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기대에 찬 눈을 반짝였다.
"알아요."
어제는 정말 도저히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달콤하고 끈적하더구나. 마지막 회라고 작가에 감독에 배우까지 아주 작정하고 찍었나 보더라.
그래도 여전히 비틀댈지언정 자신의 사랑을 지켜낸 소희의 얼굴은 실로 아름다웠다.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제힘으로 지켰기 때문일까?
비록 브라운관 속 허구의 인물이지만 그녀의 마음을 목소리로 표현한 나는 그녀의 성공이 부럽고 대견했다.
"그래서요?"
"하고 싶은 것 같이 해준다면서요."
"하는 것 봐서라고 했지, 그냥 해준다고 한 적은 없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일단 종이에 적힌 내용을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100일에 꽃 100송이 선물하기, 기차여행 가기, 2인용 자전거 타기, 커플링 맞추기, 스티커 사진 찍기...
"이게 다 뭐야? 정말 연인들끼리 할만한 일이잖아."
"우리 연인 맞잖아요."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나랑 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할 것 같아?"
나는 종이를 도로 접어 그의 손에 올렸다. 그리고 최대한 건조한 표정과 목소리로 그에게 답했다.
"난 안 하는 게 좋겠어요. 이건 그 사람이랑 해요."
"이건 해연 씨랑 하고 싶은 거예요."
"지금 양다리 티 내요?"
"응? 난 양다리가 아니..."
"자기 입으로 양다리라 말하는 바보는 없죠."
나는 자신이 양다리가 아니라 말하려는 양심 없는 입을 재빨리 막아버렸다. 잠시 벙찐 얼굴로 나를 응시하던 밀가루는 곧 정신을 차렸다.
"어쨌든 우리는 연애하는 중이니까요. 난 해연 씨의 남자친구로서 최선을 다할 예정이에요."
이상하다. 분명 명의만 빌려주기로 한 걸로 기억하는데.
"여자친구로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내용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있었어요."
"동영상을 확인해봐야겠어."
하지만 재생 버튼을 누르려는 나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은 밀가루가 빈손에 핸드폰 대신 종이를 다시 쥐여주었다.
내가 당장 주먹을 날릴 기세로 노려보자 그가 갑자기 무릎을 탁, 친다.
"아, 맞다. 다음 주면 지난달 음원 수익 입금될 거래요."
"벌써 그렇게 됐나?"
"통합차트에서 한 달 동안 굳건히 1위를 지켰으니 제법 될 거예요. 우리 SOUL도 한 달 연속 1위는 해본 적 없다고요."
밀가루는 '그러니 어서 종이를 펼쳐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상관이냐고!
내가 끝내 종이를 펼치지 않고 버티자 밀가루는 유유히 핸드폰의 이곳저곳을 열어 보기 시작했다.
그가 판도라의 상자와 다름없는 사진첩에 손을 대기 직전, 나는 결국 내키지 않는 입을 떼었다.
"이 중에서 10개만 골라요."
"20개."
"5개."
"알았어요. 그럼 15개. 이 정도면 정말 많이 양보한 거라고요."
"오케이, 콜."
극적인 타협 끝에 우리는 종이를 펼쳐놓고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시작했다. 의논이라기보다는 밀가루가 읽으면 내가 쳐내는 것에 가까웠지만.
종이를 읽어내려가는 밀가루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대체 이게 뭐라고.
밀가루가 이것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며 버티고 버텨 사수해낸 것도 여럿 있었다.
그리하여 탄생한 15개의 버킷리스트.
1. 100일에 꽃 100송이 선물하기
2. 놀이공원 놀러 가기
3. 영화 같이 보기
4. 눈부시게 푸른 산의 정상 함께 밟기
5. 야구장에서 치맥 먹으며 경기 보기
6. 직접 싼 도시락 들고 소풍 가기
7. 맛집 지도 만들기
8. 커플룩 입기
9. 상대방 무릎 베고 자보기
10. 모닝콜 해 주기
11. 손편지 써주기
12. 서로의 옛날 사진 보여주기
13. 서로를 위한 요리 해주기
14. 라디오에 사연 보내서 같이 들어보기
15. 미치도록 싸우고 화해하기
끝내 목록을 완성한 밀가루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종이를 내려다봤다. 수줍게 올라간 입꼬리에는 뿌듯함과 기대감이 걸려있다.
귀차니즘의 결정체인 나로서는 대체 이런 걸 왜 만드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토록 바라는 꿈이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스킨스쿠버, 창문 세레나데를 걸러낸 게 어디야.
"음, 제일 먼저 영화부터 볼까? 아냐. 내일 아침 모닝콜?"
Trrrr...
신이 난 밀가루가 헤실헤실 웃으며 첫 번째 소원을 고르고 있는 사이 내 핸드폰이 울렸다.
내가 바로 앞 골목에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작업실에서 전화가 왔다. 저녁 7시로 예정된 프러포즈 도시락이 완성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벌써 시간이 다 됐구나.
"알겠어. 지금 갈게."
"배달?"
"예압."
내가 급히 내릴 준비를 하는 동안 밀가루도 시동을 걸었다. 비싼 차라 그런지 시동이 걸리는 것도 순식간이다.
녹음실에서 만나자는 인사를 건네려는 나의 팔을 그가 잡았다. 잡힌 팔을 한 번, 그의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보는 나를 향해 그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작은 동작에서 나는 이유 모를 든든함을 느꼈다.
"어디로 가요? 데려다줄게요."
"괜찮아요."
"또, 또. 한 번이라도 그냥 네, 하면 지구가 멸망해요?"
밀가루는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의 성의를 거절한 내가 무척이나 서운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나 많이 거절했나? 그래도 이 사람이 싫어서 그런 건 아닌데. 굳이 분석해보자면 부담 70%에 미안함 30%랄까.
"삐까뻔쩍한 스포츠카 타고 도시락 배달 가는 아이돌이라니 안 어울리잖아요."
"여자친구와 한 시라도 더 있고 싶은 로맨틱한 남자친구라고 해줘요."
"퍽이나."
나의 타박에 밀가루는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욕을 듣고도 기분이 좋은 거야? 이제 보니 마조히스트 기질이 있네.
그가 가벼운 동작으로 운전자석 창을 내렸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흐트러뜨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늦춘 한여름의 해가 길게 늘어져 차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가슴을 누르며 그의 머리카락에 달라붙는 빛의 조각들을 그저 가만히 쳐다봤다.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그가 화를 내더라도 거절하는 게 낫겠어.
*
한 손에 도시락을 덜렁덜렁 들고서 터덜터덜 걸어온 나는 매끈한 빛을 내는 스포츠 차 앞에 섰다.
차 문을 열자, 날 기다리고 있던 밀가루의 걱정어린 목소리가 따라왔다.
"하도 안 와서 혼자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어요. 그건 왜 다시 들고 와요?"
"프러포즈 안 한대요."
"프러포즈를 안 한다고요? 이렇게 갑자기?"
"그러니까요. 도시락이 아깝게 됐네. 어떡하지?"
"내가 녹음 끝나고 가져갈게요. 안 그래도 라희가 해연 씨네 도시락 먹고 싶다고 했거든요."
보조석에 앉은 내게 안전벨트를 매준 밀가루는 내가 손에 쥐고 있던 식어버린 도시락을 옆으로 옮겼다.
나는 맥 없이 그에게 도시락을 넘겨주었다. 도시락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아깝게 된 건 따로 있다.
밀가루가 내게 눈을 맞추고 조심스레 기분을 살핀다. 자기가 원하는 건 해내고야 마는 남자. 하지만 작은 배려로 상대를 감동하게 하는 남자. 당신이라면 어땠을까?
그의 맑은 눈이 들쑥날쑥하던 감정을 가만히 가라앉혔다. 폭신한 시트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으니 조금 전의 상황이 떠오른다.
'프러포즈를 안 하신다고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죄송합니다. 그냥 받은 거로 하겠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주문자는 한 눈에도 프처포즈를 앞둔 남자 같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아주 작은 설렘도 긴장도 없었다. 오히려 이미 거절당한 사람처럼 처연했다.
나는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 잠시 뜸을 들인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입을 뗐다.
'그 친구는 절 받아주지 않을 거예요.'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납득이란 감정이 눈에 밟힌다. 그에게는 포기가 익숙해 보였다. 차라리 그편이 마음 편한 듯했다.
납득? 아직 거절당한 것도 아니면서 뭘 납득하고 있는 거야? 왜 시작도 하기 전에 거절을 확신하는 거지?
그는 분명 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고백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듯한 그의 옷차림이, 가방을 비집고 나온 꽃다발이 그의 결심을 말해주었다.
대체 짧은 시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체 무엇이 그를 포기란 것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었을까?
"아, 찝찝하네."
"뭐가요?"
"큰맘 먹고 준비해놓고 왜 포기했을까요? 옷도 신경 써서 입었던데."
나의 질문에 밀가루는 백미러를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늘였다. 조금 전까지도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있던 눈가가 깊어졌다.
일단은 밀가루도 남자니까 주문자의 심정을 알지도 몰라. 그의 답을 기다리는 동안 가슴에서 두근두근 소리가 났다.
하지만 살며시 말려 올라간 그의 입에서는 나의 기대와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얘기하는 거 싫은데."
"아, 진짜! 어차피 둘만 있을 때는 그놈의 남자친구 코스프레 안 해도 되잖아요."
"난 진지해요~ 사랑에 빠진 나~♪"
그는 나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박자에 맞춰 운전대를 두드리며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난 진지하게 네 놈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고 싶구나.
"어쩜 단 1분도 진지할 수가 없는 건지."
나는 또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런 놈과 앉아 있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