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린다. 뭐가 급한 지 간간히 소리치는 소리도 들리고, 뿌연 시야 너머로 누군가가 보인다. …뭐지? 이 이질감은 대체…
「 ……지? 반드시, 네가, 네가 지켜야만 한다. 」
무엇을요? 제가요? 잠시만, 당신은 누구시길래…
영문도 모른채 손에 무언가가 쥐어졌고 마음이 쿵 내려앉듯 무거워진다.
「 이름도 없는 네가 마지막 론도가 되겠지. 그렇다면 … 네가 이것을 영원히 수호해야할 것이다.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알겠느냐? 」
잠깐만요, 가지 말아요! 기다려주세요. 잠시만요, 아, 아-
"헉- 콜록, 콜록."
반짝 뜨인 시야에 놀랄만큼 환한 빛이 비추어진다. 잘못 들이킨 숨때문에 기침이 격하게 터져나왔다. 다시 가만히 숨을 고르려고 하자 누군가 가붓이 등을 쓰다듬는다. 잠깐, 사람?
"누, 누구…"
쉿-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술에 손가락이 와 닿았다. 낯선 타인. 곁에 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너무 놀라 숨마저 멈추었다. 눈을 슬며시 뜨니 적응된 시야에 익숙한 방이 들어찬다. 아, 내 침실. 고개를 슬쩍 돌리니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막 일어나신 참이시니 한동안 운신이 어려우실 겁니다. 일단 목부터 적시지요."
입가에 댄 손가락이 거두어지고 따뜻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물잔이 입술에 대어졌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의심도 없이 한 모금 한 모금 물을 삼켰다. 아, 따뜻하다. 몸이 손끝하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나른하고 옆에 낯선 사람이 있는 데도 어딘가 마음이 편히 놓인다.
멍하니 물을 삼키며 침실을 둘러보았다. 내가 좋아하던 다홍색 카펫은 투박하게 변색했고, 촛농이 아무렇게나 엉겨 굳은 은 촛대엔 누런 녹같은 것이 붙어있다. 거울은 먼지가 가득 쌓여 전혀 보이지 않았고 창문 역시 때에 찌들었다. 세상에, 난 얼마나 잔거지?
"아, 제가 사람들을 시켜 이곳을 정돈해보려고 했지만 아직 샤를롯테님의 허락이 없어서인지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 방이 가장 깔끔하여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나긋하고 다정한 목소리. 고개를 살짝 들어 시선을 맞추니 단정한 눈매가 살짝 올라가고 그의 고개가 푹 꺾였다. 부끄러워하는 걸까?
"난 그대를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낯이 익구나. 그대는 누구인가?"
목이 잠겨서인지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다시 물을 한 모금 넘기자 한결 편안하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사내의 생김새가 조목조목 눈에 들어왔다. 정돈된 머릿칼과 부드러운 옷감, 상류층 문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니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겠지. 설마하니 이살롯의 왕족은 아닐테고.
"저는 당신의 기사 엘드리치 몬테의 후손, 오셀롯 드뷔안 몬테입니다."
오셀롯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한 손을 왼쪽 가슴께에 가져다 댔다. 그 모습이 그리운 이름과 함께 어딘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엘드리치 몬테.
내가 사랑했던,
나를 사랑해주었던,
「 당신을 제 주군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이 엘드리치, 당신의 검이 되고 방패가 되겠으니 원하는 대로 써주십시오. 」
그 이름.
"어째서 우십니까?"
오셀롯이 눈물을 가볍게 훔친다. 뿌리쳐야 하는데, 잠시라도 그 온기를 느끼고 싶어 가만히 있는다. 그의 얼굴 곳곳에 엘드리치의 모습이 보인다.
샤를롯테의 손이 그의 얼굴에 닿았다. 오셀롯은 터질 것처럼 박동하는 심장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어루만지는 손길이 너무도 다정하여 자리를 비킬 수 없었다. 그녀가 그의 얼굴에서 무엇을 찾아내고 있는 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엘드리치는 죽은 지 수백년이 지났고 이곳에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이미 죽은 자를 연적으로 삼기엔 그는 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내가 잠든 동안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 다오. 나의 또 다른 기사, 하우드는 어디에 있느냐? "
오셀롯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하우드경은 이곳에 없습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샤를롯테를 가만히 내려다 보며 다시금 말했다.
"당신이 잠든 지 천년이나 지났고, 그는 이제 이 땅에 설 수 없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오셀롯이 마지막으로 만난 하우드는 미치광이의 모습이었다.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살기로 푸르등등한 눈동자는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서사시 속의 천진난만하고 사랑에 빠져 이 땅을 떠날 수 없게 된 용은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했다.
「 오랜만이구나, 어린 몬테. 」
용은 늘 시선을 비스듬히 맞추고 사람의 내면을 파헤치듯 읽어 내렸다. 그럴 때면 늘 정신이 황폐해지는 듯 했고 구역질이 났다. 그런 오셀롯의 비위 상한 표정을 용은 비웃고는 했다.
「 어쩐 일이십니까. 이살롯과의 협상이라면 천천히 압박수위를 높이고 있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
「 곧 지상을 떠날 것이다.」
「 예? 」
뜬금없는 용의 말에 오셀롯은 품위도 잊고 반문하고 말았다. 용은 성룡이 되면 지상을 떠난다. 그것이 용들의 섭리라고 하우드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용들의 범주에 하우드는 늘 예외였다. 그는 스스로 목줄을 매어 샤를롯테의 기사가 되었으며 평생을 이 땅에 머물며 셀다 론도를 수호하겠다고 맹약했기 때문이었다.
「 멍청한 표정이군. 」
머릿속은 뒤죽박죽인데 용은 또 비웃었다. 오셀롯에게 용은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다만, 샤를롯테가-
「 난 더 이상 이 땅을 밟을 수 없게 된다. … 샤를롯테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
담담히 내뱉은 말과는 다르게 용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있었다. 미치광이의 그런 얼굴이라니, 오셀롯은 그 끔찍함과 함께 어렴풋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같잖은 연민이었다.
“용은 때가 되면 지상을 떠나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섭리라고요. 허나 샤를롯테님도 아시다시피 하우드경은 섭리에 순응하지 않았죠.”
미간을 일그러뜨린 오셀롯은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 그런 용을 세계가 인정하지 않고 계속 밀어낸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마치 없는 존재처럼요.”
그의 말에 마치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섭리? 믿을 수 없었다. 하우드는 나와 약속했다. 눈을 뜨는 그 순간, 그 옆에 있을 것이라고. 자신은 용이니까- 괜찮다고… 시간의 흐름 같은 건 금방 비켜갈 수 있다고…
“…내가 어리석었어.”
언제나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던 이니까, 거짓말을 했겠지. 내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항상 그랬듯이 그때에도 그랬을 것이다.
“샤를롯테님,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이야기는 그만하고 좀 더 안정을 취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오셀롯의 걱정 어린 말에 또 마음이 흔들린다. 그래, 아직 정신이 없고 혼란스러우니까 조금만 시간을 갖고 생각을 정리해보자. 나는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고 깨어난 이상 또다시 많은 것들을 해야만 하니까.
그때 그 날, 몇 년에 걸친 이살롯과의 전쟁으로 셀다 론도는 황폐해졌다. 나의 백성들은 무참히 죽어가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비옥했던 땅은 불태워졌고 시체와 피로 물들었다. 비통한 표정으로 보고를 하던 부관 로엔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살롯의 군대는 그 수가 우리와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많았기에 울창한 숲을 이용한 전략으로 버텨왔다. 하우드는 최전선에서 온몸에 피칠갑을 하여 돌아왔고 전우들의 죽음에 울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기억을 더듬어 내려가자 다시금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그 전쟁은 왜 일어났었지? 분명 남은 백성들을 몬테에게 맡기고 이주시킨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는 왜 굳이 셀다 론도를 봉인했을까? 왜? 단지 전쟁을 끝내기 위한 눈속임으로?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천년이나 잠들어야 했나?
속이 울렁거린다. 마치 누가 내 기억을 억지로 헤집어 놓은 것처럼.
“오셀롯.”
“부르셨습니까.”
막 방문을 나가려던 그를 붙잡자 빙그레 웃으며 다가온다.
“내 몸에 손댄 자가 있느냐?”
슬며시 웃던 오셀롯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
“…당신의 봉인을 건드릴 수 있는 자가 용과 몬테의 피 이외에 또 있습니까? ”
오셀롯의 대답에 달리 대꾸할 말이 없다. 이 땅에 론도는 나뿐이고 론도의 힘으로 친 결계는 나와 맹약을 나눈 몬테와 하우드의 피로 풀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둘은 내게 절대 손 댈 리 없었고, 나 역시 오랜 수면동안 그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봉인을 풀면서 잠시 기억에 혼란이 생긴 것 같구나. 그만 나가보아도 좋다.”
그래,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걸 거야. 좀 더 쉬고 힘을 회복한 다음에 기억을 찾고 하우드를 만나러 가봐야지.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자. 나는 늘 쉽게 단정 짓는 버릇이 있으니까.
다시 까무룩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밖은 벌써 깜깜했고 탁자엔 새로운 촛대가 놓여 있었다. 잠든 사이에 오셀롯이 들렸던 걸까. 간단한 요깃거리와 물수건도 같이 준비돼 있었다. 그 옆의 낡은 은촛대가 가련해 보인다. 내 시종이었던 사라가 선물로 주었던 건데……
손끝을 탁자에 두어 번 두드리자 희미한 빛이 성을 감싸 돌았고 낡고 때 묻은 방이 환영처럼 벗겨졌다. 벽돌 사이의 먼지, 변색된 벽지, 삭아버린 샹들리에들이 새것처럼 깨끗해졌고 청량한 공기가 방을 채웠다. 오랜만에 힘을 운용했더니 기운이 쭉 빠진다. 무릎을 모아 얼굴을 기대본다.
침묵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마음이 너무도 착잡하고 눈물이 자꾸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제 없을 거라는 그 상실감. 상실감. 상실감!
한결같이 곁을 지켜주었던 엘드리치
꽃을 사랑했던 사라
론도 일족에 학구열을 보였던 괴짜 엘가
내게 인간의 예절을 가르쳐주었던 볼티르 부인
늘 접시나 그릇을 깨버리곤 했던 개구쟁이 아라얀
마을 소식을 들려주던 소년 광대 잭 …
론도에서는, 아무도 날 필요로 하지 않았었는데 이곳의 사람들은 나를 사랑해주었었다. 너무도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가장 소소한 것들에 행복을 느꼈던 그런 날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내게 남은 건 이 땅과 몬테의 후손과 하우드뿐.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너무 외롭고 …
홀로 인내하는 새벽은 너무도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