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다. 침실은 훈훈한 온기가 감도는데 왜 이리 추운지 모르겠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자꾸만 비실비실 나온다. 어렸을 적엔 울보라고 자주 놀림 받았는데… 마치 그 때로 돌아간 것만 같다. 이 세상은 이상해.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만 벌어지고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는데 육체적 생존에 어떤 의미가 있지?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산다는 것은 뭘까. 타인을 위해 나 자신을 포기하면 그것이 내 삶이라 말할 수 있는가? 이살롯의 사람들은 병든 몸으로도 음식을 빼앗을 궁리를 하지만 치료에 대한 것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다. 에밀은 딸 에밀리를 위해 산다고 했지만 그 딸은 어미의 기대에 부응하기엔 너무도 어린 생명체였고 이미 죽었다.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란, 그 타인이 죽으면 살아왔던 삶조차 무의미해지는 걸까? 에밀은 딸의 죽음을 직시하게 된 순간 실성했다.
그녀는 여태까지 아이의 죽음을 모를 정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아이의 죽음을 외면하기 위해 현실을 도피한 것인지 스스로조차 알 수 없는 상태인 것 같았다. 그녀는 아이의 썩어 문드러진 시체를 끌어안고 힉힉 헛웃음을 내뱉더니 격렬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까무러쳤다. 그녀를 성으로 데려온 것은 내 마음이 약해져서가 아니다. 난 내가 모르던 인간의 일면에 대해 궁금했고 그녀의 전염병을 직접 치료해주면서 병의 원인을 찾아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자꾸 눈물이 나는 이유는,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탐욕에 눈이 먼 인간도, 실성한 에밀도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것이 그들의 생존에 대한 본능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 삶이 의미 있는 삶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은 아주 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온 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모른다.
아델론의 세계에서 태어난 나는 신이 허락해 준 때에야 안식을 얻을 수 있고 죽음은 너무도 먼 이야기였다. 그런 내게 봉인은 죽음과 같은 것일 지도 몰랐다. 하지만 봉인이 깨어진 지금 그것은 단지 찰나의 꿈에 불과했고, 내 백성들은 모두 죽었고 땅은 황폐해졌다.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지? 나는 왜 살아야 하지? 나는, 대체, 왜……
왜 깨어나야 했지?
난 과거의 사람으로 남는 편이 좋았을 지도 모른다. 세상은 너무도 변했고 내가 있을 곳은 이 성뿐. 제일 중요한, 내 삶에 대한 기억조차 없다.
너무 춥다. 오늘 밤도 나에겐 너무도 길다. 또 꿈을 꿀까 무섭다. 피곤하고 지쳤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나를 붙잡는다.
「 샤샤. 」
아득하게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단 한사람에게만 허락했었던 애칭. 하우드.
「상냥한 너는 전부 용서하겠지… 」
시야는 부옇게 번져 보였고 저 너머로 검은 인영이 보인다. 가까이 오는 것 같더니 다시 천천히 멀어진다. 가지마, 하우드. 나도 네가 있는 곳으로 갈래! 나도, 나도 데리고 …
「하지만 난 유일하게 네게 용서받지 못할 거야. 그래도 난 멈추지 않겠지. 」
「한때 네게 미움 받는 게 가장 무서웠었던 적이 있었지만… 네가 없으면 그것도 무슨 소용이지? 난, 절대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
“샤를롯테님.”
차가운 손길에 놀라 번쩍 눈을 떴다.
“오셀롯.”
오셀롯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깜빡 잠에 들었었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키자 오셀롯이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준다. 은은한 오렌지향이 감돈다.
“어제 데려온 여인이 밤사이에 상태가 안 좋아졌습니다. 일단 서쪽 별관에 격리시켜 두었는데… 보러 가실 겁니까?”
침대에 걸터앉고 찬찬히 머리를 빗겨주는 솜씨가 섬세하다.
“이살롯인만 걸린다는 병이라니 의구심이 생기는구나. 알아볼 것도 있고.”
“제가 모시고 싶지만… 잠시 몬테의 영지에 들려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저 대신 제 시종이 부족함 없이 모실 것입니다.”
시종은 따로 필요 없지만 오셀롯은 늘 과보호하려는 경향이 있으니 내버려 두는 게 그를 안심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서쪽 별관은 한때 고위 관직자 혹은 타국의 사신들이 머무는 곳으로 사용했었다. 넓은 홀은 본성에 못지않아서 이살롯과 전쟁할 때엔 다친 병사들을 모아놓고 치료하는 용도로 쓰기도 했었다. 그닥 가고 싶은 곳은 아닌데 오셀롯도 어쩔 수 없었겠지. 에밀은 이살롯인이었고 병에 걸리기도 했으니 몬테의 사람들과 내가 지내는 곳에 같이 머물게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탈리스라고 합니다. 샤를롯테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별관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탈리스는 문을 열고 넙죽 엎드린 채 내 발 끝에 입을 맞춘다. 이런 인사는 노비가 주인에게 한다고 들었는데. 탈리스는 오셀롯의 보좌였고 아무리 보아도 노비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것이 부담되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일어나라. 에밀은 어디에 있지?”
“예. 별관 1층 끝에 있습니다. 어젯밤에 잠깐 의식을 차렸는데 자꾸 헛소리를 하고 열이 많이 오르더군요. 하지만 몬테인 중에선 아무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두게 되었습니다.”
“몬테인 중에선? 그럼 그대는?”
어찌되었든 전염병이라 불렸고 이살롯인만 걸리는 병이라고 해서 전염병 환자에게 가까이 가려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오셀롯과 탈리스는 이상하리만치 초연했다. 어제 메라튼에 갔을 때에도 전염병 환자가 득시글한 곳인데도 가장 깊숙한 곳까지 휘젓고 다녔지 않은가.
“뭐… 타고난 건강 체질인 것 같아서요!”
하하 웃으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는 게 미심쩍었다. 더 캐물을까 했는데 때마침 방에 도착했다. 방 안쪽에서 에밀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저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무슨 일이 있으시면 제 이름을 부르십시오.”
마치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어투였다.
*
일반적으로 전염병은 처음 발병지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는 것이 특징인데 오셀롯은 이번 전염병은 아주 이례적으로 이살롯 전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병되었다고 했다. 초기 증상은 감기 같아서 사람들이 잘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피부 발진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그 다음엔 고열에 시달리고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헛소리를 하고 횡설수설하면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탈수로 몸이 점점 말라비틀어지다가 결국 사망한다고 한다. 항간에서는 이를 미치광이 병 혹은 시체병이라고도 부른다고도 하는데, 마치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은 그 실성하고 비쩍 말라가는 모습이 마치 시체가 살아 움직이는 모습과 같아서 붙여지는 이름이라 하였다.
단순히 잘 먹지 못해서 마른 줄로만 알았더니 몸 자체에서 먹을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먹어도 구토하고 물을 마셔도 탈수 증세는 호전되지 않는 것이었다. 전염병치고 그 증상이 괴이하고 감염경로도 불확실한 것이 수상하기는 했다.
샤를롯테는 가만히 의자를 빼내 앉으며 에밀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멍하니 벽을 보고 있다가도 베개를 끌어안고 그것이 마치 딸 인양 쓰다듬고 중얼거렸다. 초점이 없는 눈동자가 중간에 샤를롯테를 바라보면 가슴이 선뜩해지기도 했다. 가끔은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는데 그럴 때면 하염없이 울면서 딸을 찾았다. 울다 지쳐서 쓰러지면 꿈에서 뭘 보는지 사신이 찾아왔다는 둥 딸을 돌려달라는 둥 헛소리를 했다.
이런 상태의 에밀이어서야 도통 대화가 될 리 없었다. 샤를롯테는 악몽을 꾸는 에밀의 이마에 손을 대고 힘을 불어넣었다. 에밀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기억을 더듬어갔다.
전염병 환자들은 공통적으로 죽음을 보았다, 검은 사신이 보였다고 했는데 에밀 역시 같은 증세인 것 같았다. 눈을 감자 어렴풋이 무언가가 보였다. 에밀이 제정신이 아니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살기등등하게 쳐다보는 붉은 시선이 강렬했다. 온통 검은 색인, 장신의 사내였다. 마치 샤를롯테 자신도 꿈에서 보았었던…
‘하우드?’
헉-
깨닫는 순간 엄청난 반동력으로 꿈에서 튕겨져 나왔다. 아주 잠깐 엿보았는데도 힘이 쭉 빠지고 식은땀이 흥건했다. 에밀은 아직도 살려달라며 끙끙대며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이건, 병이 아니라…”
“아아악!!”
주저앉아 넋을 놓은 사이에 에밀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기어코 꿈에서 깨어났다. 그녀 역시 온통 식은땀이었고 두려움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도망가려는 듯이 꿈지럭댔지만 먹은 것도 없는 몸이 힘을 낼 리가 없었다. 결국 침대 끄트머리에 엎어지듯 누운 에밀은 살려달라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뼈마디만 남은 손가락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샤를롯테는 몸을 일으켜 에밀에게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청량한 기운이 방 전체를 감싸자 에밀은 잠시 제정신을 차린 듯 생생한 눈동자로 샤를롯테를 바라보았다.
“마, 마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절박하게 샤를롯테의 옷자락을 쥐어 잡으며 에밀은 울음을 터뜨렸다.
“누가 너를 해친단 말이냐. 네 병은 병이 아니니 내가 고쳐줄 수도 있다.”
“정말입니까? 불치병이… 아닌가요? 그럼, 그럼 저 말고 제 딸을, 에밀리를 살려주세요!”
아무래도 에밀에게 딸의 죽음을 인지시키는 것은 요원해보였다. 샤를롯테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그녀의 마른 손을 잡아주었다.
“내 질문에 잘 대답한다면,”
“예,예! 무엇이든, 뭐든 대답하겠습니다! ”
에밀의 해사한 표정에 샤를롯테는 잠시 말을 아꼈다. 아무리 강한 생명력을 지닌 론도여도 죽은 생명을 다시 되돌리는 금기의 일은 할 수 없었다. 에밀리는 이샤 숲 한쪽에 묻혔고 샤를롯테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전부였다. 작은 비석을 세워주고 손수 화관을 만들어 그 위에 두었을 뿐이었다. 에밀의 상태가 호전되면 이샤숲의 정원사로 쓸 생각이었다. 딸의 죽음은 언젠가는 직면해야 했다. … 이렇게 심한 상태일 줄은 모르고.
“꿈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상황이 좋지는 않으나 샤를롯테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야 했다.
“사신이… 사신이 제게 찾아와요. 저 말고도 다들 그랬죠… 죽을 때가 되면 죽음의 신이 곁에 온다고… 온통, 온통 검은데… 마치 피처럼 붉은 눈동자로 쳐다봐요. 눈이 마주치면, 몸이 너무, 너무 아프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아요! 매번 꿈을 꿀 때마다 점점 가까워져요, 한걸음, 또 한걸음…”
에밀은 상상만 해도 괴롭다는 듯 몸서리치고 또 몸을 덜덜 떨었다.
샤를롯테는 에밀의 말에 직감했다.
이것은, 저주라고.
“탈리스!”
목소리를 높여 급히 부르자 그는 싱긋 웃으며 천천히 들어왔다.
“너… 하우드의 심복인가.”
저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다고 몬테도 아닌.
탈리스는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까마귀라고 부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