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들어라."
무례하게 실실 웃으며 능글맞게 굴었던 모습과는 달리 진중하게 예의를 차리니 오히려 기분이 더 나빴다. 탈리스는 냉큼 자리에 일어섰으나 샤를롯테 옆의 추레한 여인이 빌빌대며 있자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하우드는 어디에 있지?"
"역시 영명하신 여왕전하! 제가 용의 신하인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묻지 않느냐, 하우드는 어디에 있지?"
일부러 인상을 더 험하게 구기고 물어보았으나 탈리스는 도통 대답할 기미가 없어보였다. 탈리스가 하우드의 심복인 것을 유추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전형적인 몬테인과는 아주 다른 이목구비를 가졌으며 그렇다고 이살롯인이라 보기에도 어려운 체형이었다. 이방인이 몬테의 왕을 가장 가까이 섬길 수 있다는 것부터 의심쩍긴 했다. 전염병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 몬테는 그 천성이 나에 관한 일이라면 불 속에도 뛰어들 위인이니 그렇다 쳐도, 탈리스는 정말로 '자신은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그 전염병이 사실 용의 저주인 것을 알아챈 지금, 그가 하우드일 리는 없으니 적어도 그의 심복이라 생각했다.
하우드는 지상에 없다. 그렇다면 이 저주는 지상을 떠나기 전에 내린 것일까? 분명 전염병이 이살롯 전체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 10여년 정도 되었다고 했지. 그럼 그 사이에 하우드는 어디에 갔을까? 왜 저주를 내렸지? … 이살롯에 대한 증오가 남아서?
하우드는 인간의 일에 매사 무관심했던 용이었다. 이 땅의 용은 무릇 위대한 존재로 추앙받아 곤경에 빠진 인간을 돕고 어려운 일들을 심판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처음 하우드를 만났을 때도 그랬고, 그는 인간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고 인간들도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랬던 그가 처음으로 인간을 아끼게 된 것은 나의 부탁으로 이살롯과의 전쟁에 나서게 되면서였다.
처음으로, 하우드의 절규를 보았다.
「 샤샤!! 나도, 날 너의 기사로 전장에 서게 해다오. 저들의 살을 바르고 뼈를 발라 이 땅에서 삶도 죽음도 누릴 수 없게 할 것이다! 」
처음으로, 하우드의 눈물을 보았다.
「 내 전우들은 모두 죽었고, 엘드리치도 한쪽 팔을 잃었지… 그래도 내가 더 참아야 한단 말인가? 넌 너무 상냥해서 모두 너의 책임으로, 너의 희생으로 돌리려고 해. 그것이 더욱 날 화나게 만들어. 」
하지만 내가 셀다 론도의 모든 것을 땅 속으로 끌고 내려가기 전, 하우드는 약속했다. 내가 깊은 잠에 빠지는 동안 다만 나를 지킬 것이요, 이살롯도 수천의 병사를 잃었으니 더는 분노하지 않으리라고.
나직하게 씁쓸하게 웃던 하우드의 얼굴은 아직도 기억난다. 그랬던 그가 이제와서 이살롯에 대한 분노로 이런 저주를 남겼다고 보기 어려웠다.
다시 초점이 풀려 중얼거리는 에밀을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강대했던 이살롯이 이젠 쇠락의 길을 걸으니 나 역시 더는 이살롯에 대해 원망의 마음이 남아있지 않았다. 난 더 이상 셀다 론도의 여왕이 아니었고, 내가 지켜야 할 백성도 없으니 이제 나의 근심과 걱정은 몬테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렇다고 이살롯 전체에 걸린 그 저주를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풀고 싶지도 않다.
하우드가 보고 싶다. 이 땅에서 내가 있을 곳이 없다. 인간들에게 배척받던 너 역시 이런 심정이었을까? 사무칠 정도로 외롭고… 내가 한낱 먼지만도 못한 존재가 된 기분.
"본궁으로 모시겠습니다."
탈리스는 여전히 내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은 채 싱긋 웃을 뿐이었다.
"…하우드는 잘 지내느냐? 날, 원망하지는 않고? "
더는 질문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천년의 시간동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탈리스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대답이 두려워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오랜만에 성을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여태까지는 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오셀롯이 구해다 줘서 침실과 응접실 이외에 제대로 살핀 곳이 없었다. 옛날엔 이곳도 사람으로 넘쳐 온기가 가득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내 발자국 소리마저 너무 크게 들렸다. 복도는 한산했고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만이 따사롭다.
「 전하께서는 너무 걸음걸이가 자유분방하십니다! 머리 위 접시가 또 바닥을 뒹굴면 좋아하시는 간식은 앞으로 일주일 간 금지하도록 하겠습니다. 」
머리와 두 팔 위에 유리접시를 얹고 복도를 끝에서 끝까지 걸었던 적이 있었다. 볼티르 부인은 내가 너무도 품위 없고 날뛰는 망아지처럼 행동한다고 매일같이 야단쳤었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매일 혼나니 가끔 서러워서 엉엉 울었었는데, 그때면 엘드리치가 와서 다독여주곤 했다. 볼티르 부인을 따끔하게 혼냈으니 걱정 말라고. 그래도 볼티르 부인이 상냥해지는 일은 없었지만 그녀의 가르침은 늘 도움이 되었었다. 그때는 그녀가 날 미워하는 게 아닌가하고 의심했었는데… 그녀는 내 음식을 기미하다 독살 당하였다. 피를 한 움큼씩 토하며 자신의 역할을 끝까지 수행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마지막엔 미소마저 띄웠던 것 같다.
'모두 과거의 일이지.'
이제 와서 그리워해도 그녀가 살아 올 리도 없고 내가 천 년 전으로 돌아갈 리도 없다.
하우드를 찾자. 나로 인해 더는 세상에서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니 만나서 사죄를 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자. 까마귀는 내게 아무것도 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이니 일단 서재에 들려 관련된 책이라도 찾아봐야지. 계단을 오르고 알현실을 지나자 커다란 검은 문이 보인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곳일 텐데. 안쪽에서 수군수군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사람들이 있나? 호기심에 문을 젖히자 모두 같은 복장의 여성 여럿이 깜짝 놀라 일제히 토끼눈을 뜨고 쳐다보았다.
"신녀님!"
"세상에! 신녀님!"
그녀들은 꺄아꺄아 자그맣게 비명을 지르며 우르르 달려 나와 무릎을 꿇었다.
"절대, 절대 농땡이 피운 것이 아니오라 쟤가 여기에 샤를롯테님의 초상화가 있다고 해서…"
"뭐라고? 아니에요! 저는 안 된다고 했는데 쟤가 몰래 보자고 꼬드겨서!"
서로 투닥투닥 거리면서 아니다 맞다를 반복하는데 조금 귀여워보였다. 그러고 보니 내게 신녀라고 불렀지 않았나? 대체 무슨 신녀? 오셀롯이… 그렇게 둘러댔나? 하기사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옛날 사람이 아직도 살아있다면 파장이 클 법도 하지.
"너희들은 이곳의 시녀들이냐."
"시녀까지는 아니옵고… 본디 몬테 왕립 수도원의 사제들이온데 이곳에 자원하여 신녀님을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신녀님께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셔서 조용히 있었사옵니다."
왕립 수도원에 사제라니. 대체 몬테에는 어떤 종교가 있기에 이렇게나 선망의 눈길로 쳐다보는 걸까. 부담스러운 눈빛 공격에 움찔 뒷걸음쳐졌다.
"셀다 론도는 단지 건국신화일 뿐이라고 다들 저희를 바보 취급했었는데 이렇게 실존하는 크라우스트성을 밟아도 보고 샤를롯테님을 쏙 빼닮으신 신녀님까지 계시니, 이제 다들 저희 셀더교를 업신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또다시 저들만의 세계에 빠져 꺄아꺄아 떠드는 사제들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나 샤를롯테 론도는 천 년 전에 죽고 이곳엔 신녀라는 사람만이 있다니. 오셀롯으로서 어쩔 수 없었겠지라고 애써 이해하려 해봐도 무거운 마음은 점점 침잠해갔다.
사제들을 지나쳐 서재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까지 이어지는 책꽂이에 책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예전엔 책이 너무 비싸고 필사가들이 적어서 많아도 수백 권이었는데 오셀롯이 새로운 책들을 많이 들여놓은 모양이었다. 족히 수천, 아니 일만 권은 되어 보이는데.
<셀더 교리 : 입문> <아우레아 대륙의 역사 : 몬테 왕조 편> <크라우스트 성의 흔적을 찾아서> <역대 몬테 왕가의 업적들> <이살롯은 왜 부흥하였는가> <잊혀진 나라와 여왕에 관하여> ……
"어떤 책을 찾으십니까?"
"저희가 이곳을 정리해서 말씀만 해주시면 바로 찾아드릴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양도 양이거니와 종류도 다양해서 고민하고 있는데 뒤따르는 사제들이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용에 대한 것을 찾고 있다."
또다시 부담스러운 눈빛공격에 시선을 회피하자 또 자기들끼리 주절주절 떠든다.
"어쩜! 너무 낭만적이지 않나요? 저도 '무어위 3편'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여신 샤를롯테님을 위해 지상에서 남은 용이라니! "
"용에 대한 부분은 자료가 많지 않아서 5권 정도밖에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렇게까지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하다. 바로 자신들의 뒤쪽에 걸린 초상화에 바로 그 용이 있는 것도 모르다니.
저 초상화는 내 시녀였던 사라 몬테가 반드시 남겨야 한다고 억지를 부려 화공을 불러 그린 것이었다. 젊은 엘드리치와 나와 어렸을 적의 하우드. 저 때의 하우드는 내 기사가 되기 전이었기에 성에는 가끔 놀러왔었다. 사라가 끈질기게 용을 설득하여 모처럼 셋이서 남긴 초상이었는데…
마치 습관처럼 또 추억에 잠긴다. 안 돼, 더는 안 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책장을 둘러보자 옆에서 주황머리 사제가 책을 슬쩍 내민다.
"이것이 용에 대해 적힌 전부이옵니다. 정말로, 정말로 자료가 몇 없어서…"
아주 얇은 책 3권에 양피지 묶음 2개. 인간과 가장 가까이 지낸 용이었지만 정말 알려진 게 없구나 싶다.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하우드는 자신이 용인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서 내게 용에 대해 잘 얘기해주지도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