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고에서 가져온 책을 쌓아두고 읽고 있었다. 까마귀는 오셀롯이 곧 올 것이라며 여태까지 만든 쓰레기들을 치우러 갔다. 자신이 치우라고 할 때는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작품이랍시고 자랑하더니 오셀롯에겐 껌뻑 죽는 괴리감에 웃음이 나왔다.
"오셀롯이 그리도 무서우니?"
발치에 떨어져 있는 구겨진 색지를 던져주자 까마귀가 씩 웃으며 호쾌하게 받아냈다.
"아마 샤를롯테님은 모르실 걸요. 눈꼬리가 이-렇게 올라가서 노려보시는데… 어휴, 심장이 다 오그라들더라구요!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길게 올리며 나름 근엄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데 그게 더 웃겼다. 늘 무표정이 아니면 웃는 표정이었던 오셀롯이 새치름하게 노려보는 표정이라니, 상상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와 소리 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입을 가렸다. 한참을 그렇게 웃으니 까마귀의 표정이 묘했다.
"샤를롯테님이 이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사뭇 진지한 모습이었다. 생각해보니 깨어난 이후로 이렇게 크게 웃어본 적이 없었다. 그럴 경황도 없었고 웃을 일도 없어서… 저렇게까지 놀란 모습을 보니 내 심경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구나하고 생각하게 된다.
"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치우기나 해라. 복도에 던져둔 것도 정리하고."
넋이 나간 까마귀를 모른 척 하고 다시 책장을 넘기자 후다닥 복도로 나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저런 면은 또 사제들과 다를 바가 없어보여 귀엽기까지 했다.
성이 다시 시끌해진 것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정원으로 나서려던 참이었다. 기사들이 본성 정문에 대열을 맞추어 서고 있었다. 오셀롯이 도착했나 싶어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니 마주치는 사제들마다 깊이 허리 숙이며 도망갔다. 늘 인사를 나누던 기사들도 입을 꾹 다물고 눈짓으로 반가움을 표했을 뿐이었다. 의아하여 사제를 붙잡으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산책하시려고 이리 차려 입으셨습니까."
"오셀롯!"
반색하며 뒤돌아보자 오셀롯은 무릎을 꿇으며 내 손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생각보다 늦어져 송구합니다. 무탈하신 모습을 보니 이제 안심이 되는군요."
"하려던 일은 잘 마무리 되었고?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
괜히 급한 마음에 그의 손을 끌고 정원으로 향했다.
"그간… 많이 활달해지셨군요."
작게 중얼거리는 그 말을 샤를롯테는 듣지 못했다.
*
정원에 준비된 티테이블에서 샤를롯테와 오셀롯이 담소를 나누는 그 시각, 타냐는 성 뒤쪽에서 사제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구박을 받고 있었다.
"너 정말 뻔뻔하구나?"
수석 여사제 엘러트의 말에 주변의 다른 사제들도 서로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분위기에 타냐는 식은땀을 흘렸다.
"너처럼 신녀님께 잘 보이려는 애들이 한둘인 줄 아니? 그런데 다들 규칙을 지키고 있는 거란다. 오로지 너빼고! 너, 이곳에 차출 오면서 탈리스경에게 아무 주의도 못 들었어? 여긴 네 학구열이나 충족시키기 위한 곳이 아니야! 우린 신녀님을 보필하기 위해 온 것이고 다들 긍지를 가지고 있어!! 네 경망스러운 행동에 이젠 신녀님은 우릴 찾지 않으실 거야!"
벼락처럼 떨어지는 호통소리에 타냐는 말없이 움찔거렸다. 자신이 경솔했다. 좀 더 차분한 상황에서 신녀님과 친해진 후에 말하려고 했는데, 그 푸른 눈동자를 마주친 순간,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것이 패인이었다.
"내 당번을 하루만 바꿔달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요! 타냐, 너 내년에 있을 시뇰(고위 성직)선발에 쓸 논문 때문에 그런거지?"
같은 방을 쓰던 샤런이 차갑게 내쏘았다. 타냐와 샤런은 수도원시절부터 늘 같은 방을 써온 사이였는데 몇 년이나 지냈지만 결코 친해질 수 없었다. 샤런은 사제로서의 품위가 절대적인 사람이었지만 타냐는 그에 반해 셀다에 관한 학식이 지위나 품위보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시뇰은 여사제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직위였다. 타냐에겐 그 직위보다 더 탐나는 것이 있었다. 비밀 서고의 자유로운 출입. 대현자로 칭송받는 엘가의 자서전도 금서로 지정된 여러 책들도 모두 있는 진리의 창고. 타냐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그곳에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다른 사제들보다 가장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시뇰이 되려면 가장 어려운 논제를 다루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셀더교가 몇 백 년에 걸쳐 증명해내지 못한 것, 셀더교 본질에 관한 것. 마법의 실존.
셀더교는 몬테 왕가의 전신, 건국신화에 나오는 여신 샤를롯테의 위대한 행적을 탐구하고 그 업적을 탐미하는 집단으로 시작했다. 아무도 믿지 않는 허구의 이야기라 치부되었으나 셀다 론도에 대한 이야기는 이상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자세히 곳곳에 남겨져 있었다. 타냐는 그 신비로운 나라에 흠뻑 심취했고, 여신이 행한 기적- 마법에 대해 굉장한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셀더교는 몬테인에게도 외면 받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셀더교를 헛된 일에 시간을 보내는 미치광이 정도로 취급했다. 그나마 이단으로 취급받지 않은 것은 몬테 왕조가 암암리에 그 존재를 묵인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떤 외부의 지원 없이 가문의 사비를 털어서, 혹은 수도원 내에서 자급자족을 하며 명맥을 이어왔다. 그런 셀더교의 한줄기 빛은 새로 등극한 몬테의 젊은 왕, 오셀롯이었다. 그는 역대 왕들과는 달리 즉위식에서 몬테는 셀다 론도의 후계임을 천명했고 여신 샤를롯테에게 선택받은 몬테인과 몬테 왕조에게 신성성을 더했다. 그리고 그것을 믿기 어려워하는 백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셀다 론도의 흔적을 찾았고 전설 속의 크라우스트성을 찾기까지 했다.
사제들은 모두 셀다의 진실을 찾기 위해 자원한 영예로운 공헌자였다. 타냐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증명되지 않았다.
마법. 타냐에게 있어서 그것은 셀다에 대한 믿음 전부였다. 하지만 모두가 추앙하는 신녀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왕의 뒤에 감추어진 아주 비밀스러운 존재일 뿐. 그녀가 과연 신녀가 맞을까? 왕이 거짓으로 꾸며낸 것은 아닐까? 그런 의심으로 기회를 노리던 그녀는 신녀에게 더 다가갔다. 왕의 부재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모든 의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압도적인 그 분위기와 시릴 정도로 푸른 그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째서 다른 사제들이 신녀를 어려워하는 지 알 것 같았다. 마치, 다른 존재처럼, 그곳에 있었다. 여신 샤를롯테와 같은 얼굴로.
"어찌되었든, 넌 앞으로 한 달간 본성 출입금지야! 별관에서 빨래나 하렴."
엘러트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타냐를 세게 밀치고 갔다. 뒤따르던 사제들 모두 처벌이 약하다며 불평하고는 사라졌다. 사제들이 전부 가자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타냐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쫓겨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게 그렇게나 궁금하셨습니까?"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샤를롯테에게 오셀롯은 살짝 눈웃음치며 무화과를 얹은 타르트 접시를 내밀었다. 하지만 샤를롯테는 포크로 쿡쿡 쪼개기만 했다.
"오셀롯, 그대는 이곳의 시종들이 사제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지. 셀더교라는 괴상한 종교도 처음 알았어. 무엇을 더 숨기려는 거지? 그대가 가져다 준 바얄로와 왕비의 일,"
오셀롯은 기민하게 쉿, 손짓을 했다. 미간을 찌푸린 것이 바얄로와라는 단어는 듣기도 싫다는 기색이었다. 샤를롯테는 그 묘한 박력에 입을 다물었다.
"가능하면 샤를롯테님이 더 이상 인간과 엮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뭐?"
뜬금없는 말에 샤를롯테는 기가 찼다. 인간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인간과 엮이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은 무슨 색다른 궤변이란 말인가. 그럴 것이라면 자신은 왜 깨어난 것이란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안색이 점점 굳어가는 샤를롯테를 보고 오셀롯은 급히 말을 이었다. 그녀가 오해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샤를롯테님이 론도라는, 다른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폭로에 샤를롯테는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샤를롯테님이 이 땅에 왜 내려온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지키려고 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샤를롯테님이 아직도 기억에 혼란이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일어나시자마자 찾지 않으셨으니까요."
"혹시, 안드라페를 말하는 것이냐?"
오셀롯은 살풋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안드라페가 무엇인지 모르시는 것을 보니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다행입니다. 저는 당신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궤변이 늘어질수록 샤를롯테는 분노마저 치밀었다. 기억이 없는데 그것이 사실 가장 중요한 기억이어서 내가 왜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해 회의감이 드는, 그런 것을 누가 알까. 적어도 자신의 기억은 제 3자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셀롯은 다만 자신을 기만하려는 것 같았다!
"제가 처음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주 어린 나이였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갈 곳이 없는 가여운 백성을, 위대한 존재가 나타나 구원해주는 신비로운 이야기. 다들 그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전 그것이 더 이상했습니다. 당신은 그저 지켜야 할 것이 있어 이 땅으로 도피해온 것이고 우연하게 추방당한 죄인들을 마주했습니다. 그들은 절박했겠죠, 그래서 당신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쳤어요. 당신은 그들을 거두어 살필 의무가 없었는데도 그들은 당신에게 모든 책임을 넘긴 것입니다."
"오셀롯, 지금,"
"그들은 당신에게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인간들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당신이 들어주었죠. 그러나 당신이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실체 없는 명예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의 손해가 더 컸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인간들에게 무엇 하나 요구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인간들은 알고 있었어요. 상냥한 당신이라면, 다 해줄 것을."
"샤를롯테, 당신은 그렇게 이 땅에 묶이고 만 것입니다. 지상의 더 넓은 곳, 더 아름다운 곳 하나 둘러보지 못하고 좁은 이 땅, 이 성에 묶여 갇혀 지내는 삶. 결과는 그것뿐입니다."
차분한 오셀롯의 말에 샤를롯테는 울컥하려다 말았다.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기에 그것이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