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 샤런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샤를롯테를 보며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신녀의 시중은 사제들이 돌아가며 들기로 약속하였으나 사실상 선배 사제들이 갖은 이유를 들먹이며 기회를 독차지하려고 해서 샤런은 늘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게다가 모처럼 시중을 들 기회가 돌아왔을 때에도 타냐가 급한 사정이라고 빌면서 부탁하는 바람에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선배 사제들의 눈치를 보며 허락해주었다. 타냐의 무례에 다들 신녀님이 다시는 사제를 가까이 하지 않을 거라는 실망감에 차 있었는데 샤런 자신은 선택받은 것이었다!
"카르밀라는 나흘에 한 번씩 물을 흩뿌리듯 주어야 하고 혹시라도 끝이 시든 잎이 있거든 바로 솎아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쪽 푸른 수국과 붉은 수국은 흙이 섞이지 않게 조심하고 흙이 마르면 물을 주어야 해. 저쪽에 있는 불두화와 비슷하다고 헷갈려서는 안 되고…"
신녀가 잠시 성을 떠나 있을 거란 얘기는 사실이었는지 신녀는 자신을 붙잡고 정원을 돌며 꽃과 수목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 지 끊임없이 말했다. 샤런은 손으로는 열심히 받아 적으면서도 눈은 샤를롯테의 손짓 하나 눈길 하나를 따라갔다. 꽃과 향기가 가득한 정원 한 가운데에서 마치 홀로 존재하는 것 같은 경이로움이었다.
샤런은 마법 따위에 연연하여 신녀를 의심하던 타냐를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이 고아한 기품은 흉내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도에서의 레이디들이 해괴하게 부풀린 드레스를 입고, 모자가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장신구를 쌓아 올리는 것을 품위 있다고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고결하지 않은가. 끝이 금자수로 마감된 수수한 키톤풍의 드레스가 조금도 촌스럽지 않았다. 억양이 산뜻하며 왕족들이나 쓰는 문법은 마치 처음으로 고대어로 쓰인 경서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만약 여신 샤를롯테가 강림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더 늘어놓을 필요 없이, 샤런은 그저 황홀경에 빠진 상태였다. 어딘가 넋이 나간 얼굴이었는데 입은 영혼 없이 네, 네 대답하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 엄청난 속도로 필기를 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수상쩍었다. 샤를롯테는 사제가 아픈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되었다.
"상태가 좋지 않으면 이만 돌아가서 쉬어도 된다."
샤를롯테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샤런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아닙니다! 송구하게도 제가 다른 생각을 하느라…"
하지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 열이 있어 보이는데… 저렇게 격렬하게 아니라고 하는 데 돌려보내는 것도 무안하겠다 싶었다. 샤를롯테는 더 빼놓은 것은 없는지 한 바퀴 휘 둘러보고는 고개를 까닥였다.
"그럼 되었다. 주의 깊게 관리할 것은 이 정도뿐이고… 네 이름이 무엇 이느냐?"
"샤, 샤런입니다."
"그래, 샤런.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노고가 많겠지만 하나 더 부탁해도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어떤 명이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샤를롯테는 정말 부탁해도 되겠느냐는 투로 물어본 것이었으나 사제는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돌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비장하게 대답했다. 예전에도 받아 본 적이 없는 극진한 예우였다.
"…꺼림칙할 것임은 알지만, 별관에 머물고 있는 에밀이라는 여인을 잘 보살펴다오. 옮는 병은 아니니 걱정할 것은 없다."
에밀의 말을 꺼내자마자 샤런의 얼굴 처참하게 구겨졌다. 물론 고개를 숙이고 있어 샤를롯테가 보이진 않았지만. 사제들 사이에서 이살롯의 평민 여자는 평판이 좋지 못했다. 특히 처음 실신한 상태로 업혀온 그 여자를 보았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너무도 더럽고 남루해서 아무도 그 여자를 씻기려고 하지 않았다. 고약하게 풍겨오는 썩은 내에 가까이 갔다가 몇 번이나 구역질을 했다. 정체모를 여자를 간신히 씻겨놓았더니 그 다음은 더 가관이었다. 실성해서 난잡하게 방을 어지르고 기괴하게 울어댔으며 희번덕한 눈빛은 소름끼치기까지 했다. 실제로 엘러트는 식사를 가져다주다 달려드는 여자에게 떠밀려 엉덩방아를 찧었었다. 서슬 퍼런 얼굴로 숙소에 돌아와서 어찌나 불평을 하던지.
그런 여자를 신녀가 직접 보살핀다고 했을 때는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왕께서도 탐탁해 하지 않는 눈치였고. 최근엔 신녀의 극진한 보살핌에 많이 얌전해졌다지만 샤런은 첫 인상이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경애하는 신녀의 부탁은 거절할 수 없었다. 다른 많은 사제들을 두고 자신에게 부탁한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리라 믿었다.
맡겨만 달라는 샤런의 흔쾌한 대답에 샤를롯테는 안도하며 그녀를 손수 일으켜주었다.
"그대 덕분에 마음 편히 다녀올 수 있겠구나."
샤를롯테의 해맑은 웃음에 샤런은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
"아, 거참. 라후아가 꽤 멀긴 하지만 이렇게 많은 짐은 거추장스러운데, 안 그래요?"
샤를롯테와 까마귀는 마차에 가득 실려 있는 짐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마차가 성까지 올 수 없기에 기사와 사제들을 모두 대동하여 이샤숲 아래까지 내려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셀롯이 필요한 것들만 챙겼으니 괜찮을 거라고 해서 그렇게 믿었는데…
"인원이 많으면 기동성이 나쁘니 기사 둘이면 될 것입니다. 통행시 이것을 보여주면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구요."
오셀롯은 무엇이 문제냐는 듯 웃었고 마부겸 호위기사로 자청한 에릭슨과 버번은 눈이 마주치자 머쓱하게 웃으며 마편을 흔들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오셀롯, 저 짐들은 다 무엇이지? …말이 과로사할 것만 같은데."
마차의 뒤편엔 큰 짐들이 차곡차곡 마차의 상단부보다 높이 쌓여 있었다.
"라후아까지 강행군으로 가도 열흘은 넘게 걸립니다. 지금 이살롯은 식량난이니 돈이 있어도 제대로 된 식사는 하기 힘드실 것이니 이 정도는 챙겨야합니다. 그리고 피곤하실 때 꼭 간식을 드시지 않습니까? 정말 필요한 것만 꾸렸습니다."
무슨 먹을 것이 저렇게 많으냐고 따지려다 까마귀와 기사 둘을 쳐다보았다. 남성 인간은 체격이 큰 만큼 많이 먹는다고 들었던 것도 같았다. 또 혹시 모를 일이니 없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나라가 궁핍하면 도적이 승하는 법이고 일전에 메라튼에서 본 굶주린 자들의 눈빛이 생각났다.
"저도 조만간 수도로 가봐야 할 것 같으니 급히 전할 말씀이 있으시면 콕스하펜으로 기발을 보내십시오. 자세한 것은 에릭슨경에게 일러두었으니 그에게 물어보면 될 것입니다."
이후에도 오셀롯의 걱정 어린 잔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처음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던 샤를롯테도 같은 얘기를 몇 번이나 하는 통에 질린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벌써 마차 짐칸에 올라탄 까마귀는 못들은 척 눈 감았고 오셀롯의 뒤로 정렬한 사제들은 허리 굽힌 자세가 힘든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아시겠습니까? 절대 이살롯인들이 불쌍하다고 이것저것 나누어 주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오셀롯. 다녀오마."
"…!!"
결국 샤를롯테는 오셀롯의 입을 막기 위해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날리고는 잽싸게 마차에 올라탔다. 버번경이 신난 얼굴로 그녀를 부축했고 곧 힘찬 소리와 함께 마편이 휘둘러졌다.
창밖을 내다보자 새빨간 홍당무같은 얼굴의 오셀롯이 가볍게 목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