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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다 론도
작가 : 녹차양
작품등록일 : 2017.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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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죽음과 용의 세계 (8)
작성일 : 17-06-19     조회 : 281     추천 : 0     분량 : 4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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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를롯테는 은은한 장미향이 퍼지는 차를 입에 머금고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응접실엔 각각의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시고 있는 홍차만 해도 향이 결코 약하지 않은데 응접실 곳곳에 붉은 색으로 마감한 청동향로에서 끊임없이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바삐 오가는 하녀들은 이 냄새에 익숙한 것인지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비스퀴와 스콘을 접시에 담아냈다. 까마귀는 그 옆에서 2단 세르방(티테이블)에 꽉 채워진 각각의 과자와 케이크들을 탐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오, 질트 그뢰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영애."

 

 이내 엄청나게 부푼 치마를 흔들며 중년의 여인이 다가왔다. 샤를롯테는 그 독특하다 못해 기괴한 치마에 눈길을 주다 자리에 일어나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류드밀라 지스몬드 알폰스라 합니다. 초대에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간결하고 품위 있는 말씨에 여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여인은 조신하게 소파에 앉았는데도 엄청나게 부푼 치마 때문에 풀썩-하고 다소 경망스러운 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저는 영주대행으로 있는 알렝지아 드본 질트 그뢰데입니다. 제 남편, 질트 그뢰데 자작께선 지금 몸이 좋지 않아서요. 양해 바랍니다."

 

 "…쾌차하셨으면 좋겠군요. 그런데, 부인."

 

 "예, 말씀하시지요."

 

 알렝지아는 화려한 은식기를 보라는 듯 휘저으며 형식적으로 대답했다. 눈앞의 영애는 볼륨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촌스럽고 수수한 드레스에 장신구도 몇 없는 것으로 보아 대접할 가치는 없어 보였다. 간만에 방문한 외지인이라 반갑게 맞이했는데 생각보다 실망스러운 차림새였다. 설마하니 그 몬테에서 유행하는 옷이 저런 것일 리는 없고 몬테의 귀족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는 그녀는 알폰스라는 성도 한미해 보였다.

 

 "향로가 무척 많던데 향을 좋아하십니까?"

 

 환기가 되지 않는 방에 향로만 4대가 있다 보니 샤를롯테도 점점 코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 모습에 알렝지아는 코웃음을 쳤다. 향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얼뜨기 계집애였군! 물론 친절한 가면은 벗지 않았다.

 

 

 "몬테에서 오셨다니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이 향은 장미나무와 목단, 작약, 샌들우드와 그 외에 30가지의 향료들을 배합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살롯의 전염병은 더러운 공기로 인한 것이니 이렇게 좋은 향을 피우면 병도 물러간답니다."

 

 

 은근히 뽐내듯 말하는 알렝지아에 샤를롯테는 조금 안타깝기까지 했다. 그렇게라도 병을 피해가려는 게 안타까웠고 전염병과 조금도 관계없는 향료들을 펑펑 사용하며 낭비하는 것도 안타까웠으며 이런 낭비로 영지민들이 허리 필 새 없이 일하고 있다는 점도 안타까웠다.

 

 

 "그런데 여행을 오셨다면서요? 어디로 가시려 하십니까?"

 

 

 알렝지아는 전염병으로 드글거리는 이살롯에 굳이 찾아온 철없는 영애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병을 이유로 타국과의 무역도 절반 이상이 끊어진 상황이었고 백성들의 태반이 죽어나가 이살롯 전체가 예전처럼 유흥으로 오기엔 좋지 않았다. 치안이 나쁜 것은 둘째 치고 누가 죽으러 온단 말인가?

 

 

 조심스레 묻는 알렝지아의 말투와는 달리 샤를롯테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무척 곤란했다. 알렝지아가 묻는 의도를 알기에 그녀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야 하는데, 생각이 나질 않았다.

 

 "저희 아가씨는 몬테에서도 명성이 드높은 알폰스 후작가의 무남독녀이십니다."

 

 태연하게 운을 띄운 것은 까마귀였다. 대화에 끼어든 무례에 호통하려던 알렝지아도 후작가라는 말에 표정을 달리했다. 그리곤 재빨리 샤를롯테를 다시 훑어보았다. 그 속물적인 태도에 까마귀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명실 공히 후작가의 당당한 후계이신데 방계 쪽에서 말이 많아서요. 라후아에 있는 알폰스가의 유산을 찾으러 가는 중입니다."

 

 "어찌 후작가의 유산이 이살롯에 있단 말인가?"

 

 구미가 당기는 말에 알렝지아가 아예 까마귀 쪽으로 몸을 틀었다. 샤를롯테는 말없이 차를 들이켰다.

 

 

 "가문의 사정이니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래전에 후계다툼이 있었을 때 당시의 후작께서 그곳에 왕으로부터 직.접 하사받은 것을 숨겨놓았다고 합니다."

 

 까마귀의 말이 길어질수록 알렝지아는 점점 웃는 낯이 되었다. 샤를롯테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입에 꿀을 바른 것도 아닌 것이 거짓말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덕분에 곤경은 면했지만 기분이 찜찜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머, 가문의 사정이니 당연히 이해해야지요. 저희 가문이 미천하지만 이살롯에서 재력으로는 뒤떨어지지 않으니 영애께 드릴 도움이 있다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호호 웃으며 케이크를 권하는 알렝지아 부인과 잘하지 않았냐며 옆에서 눈을 찡긋거리는 까마귀의 모습에 샤를롯테는 허허롭게 마주 웃었다.

 

 

 

 샤를롯테는 안내받은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버번과 에릭슨은 짐을 풀러 갔고 까마귀는 샤를롯테의 드레스와 장신구들이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쭐레쭐레 따라 들어왔다.

 

 

 침실은 과연 사치와 향락의 나라 이살롯의 명성에 꼭 들어맞게끔 화려함의 극치였다. 벽엔 화려한 장식을 그린 패널(부아즈리, Boiserie)로 명화 속에 들어 온 느낌을 주었다. 방의 양옆으로는 또 다른 방이 이어져 있었는데 하나는 화장을 하는 방인 투알렛이었고 다른 방은 다과를 즐기거나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부두아의 공간이었다. 알렝지아 부인이 신경을 많이 썼는지 맨드라미 나무로 화려하게 장식한 쿠아푀즈(화장대)와 머리손질용 안락의자, 화장용 분 단지와 기름그릇, 세안용 컵 등이 빠짐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크라우스트 성에선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많아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샤를롯테는 알이 큰 진주로 장식한 사탕 통을 대충 열어보고는 그대로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많이 피곤하십니까?"

 

 웃음기 하나 없는 샤를롯테의 지친 모습에 까마귀도 조금 차분해졌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건가 싶어 샤를롯테가 희미하게 입 꼬리를 들어올렸다.

 

 "향 때문에 머리가 아프구나. 하녀를 좀 불러 치우게 하고 창문도 열어주렴."

 

 똑똑. 까마귀가 창문을 열려고 움직이자 때마침 간결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말끔한 복장의 하녀가 들어오며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한동안 영애를 보필하게 된 로즈라고 합니다."

 

 콧등의 주근깨가 돋보이는 하녀는 아주 지체 높은 귀족 아가씨라는 이야기를 듣고 왔기에 감히 허리를 필 생각도 못하고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며 굽실거렸다.

 

 

 "마침 잘 되었구나, 로즈. 머리가 아프니 저 향로를 좀 치워주겠니?"

 

 그러나 생각보다 상냥한 말투에 로즈는 제대로 정신 차릴 새 없이 예,예 하며 바삐 움직였다. 까마귀가 가져온 짐들도 야무지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너도 멀미로 고생이 많았으니 오늘은 가서 쉬거라."

 

 까마귀는 어느새 사탕통에서 노란 사탕을 꺼내 먹고 있었다. 응접실에서부터 단 것에 눈을 떼지 못하던 것이 피로해서 그런가 싶었다. 샤를롯테도 조금만 더 쉬었다 움직일 생각이었다. 알렝지아가 서재와 정원 등 모두 출입해도 상관없다 했으니 조금 둘러볼까 했다.

 

 

 "마차에서 내리니 괜찮아졌습니다. 샤, 아니 류드밀라 아가씨는 좀 쉬고 계시죠. 전 잠시 버번경과 함께 주변을 좀 보고 오겠습니다."

 

 그는 언제 피곤했냐는 듯 쌩하고 나갔다. 하녀는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기사의 모습에 당황한 듯 멍한 표정이더니 다시 차근차근 정리를 했다. 방 안이 조용해지자 샤를롯테는 창가 의자에 앉아 바람을 쐬며 눈을 감았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오랜만에 듣는다. 저택이 분주한 듯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나쁘지 않았다.

 

 

 

 

 알렝지아는 더없이 바빴다. 예정에 없던 손님을 맞이한 탓에 저택 곳곳을 다시 손보아야 했고 조금 후에 있을 석식 준비도 부족함이 없어야 했다. 하인과 하녀들을 모두 모아 조목조목 잔소리를 시작했다. 하필이면 집사가 부친상으로 자리를 비운 참이어서 할 일이 더 많아졌다.

 

 "현관에 있는 그 촌스러운 독수리 상을 모조리 치우고 화병을 좀 더 가져다 놓거라. 그래, 질트의 백장미가 좋겠구나! 그리고 살롱의 태피스트리도 밝은 것으로 바꾸고 가블렝의 작품들도 전시하는 게 좋겠어."

 

 "마님, 저희 영지의 모든 꽃은 지난번 공주님의 탄신 무도회때 가져다 드린 터라 더는 없습니다."

 

 하인은 알렝지아가 불같이 화낼 것을 알지만 정말 꽃을 구할 방도가 없기에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알렝지아는 들고 있던 부채로 하인의 뺨을 후려쳤다. 부채에 장식되어 있던 조개껍질이 살갗을 긁으며 긴 상처를 냈다.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뭐든 해봐야 할 것이 아니냐! 후작가라니, 이번만큼 좋은 기회가 없어. 발품을 팔아서라도 가져오거라! 얼른!"

 

 불같은 호령에 겁에 질린 하인과 하녀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알렝지아는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류드밀라 영애에게 조금의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무려 후작의 작위를 이을 사람이었고 부강한 몬테의 귀족이었다. 망해가는 이살롯에서 어떻게든 버텨왔지만 이것도 얼마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몬테쪽과 무역이라도 틀 수 있다면 질트 그뢰데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지만 전염병이 들끓는 이살롯의 도시를 거쳐 올 상인들이 있을 리가 없으니 몬테로 귀화하는 것이 더 현실성 있었다. 최근 몰래 몬테로 도주하여 이스델로 귀화한 귀족의 소식을 들었었다. 그건 한줄기 희망이었다. 몬테든 이스델이든 어디여도 상관없다. 이살롯만 아니면! 류드밀라 영애는 은혜를 저버릴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니 극진히 대접하면 응당 보상을 해 줄 것이다. 알렝지아는 굳게 주먹을 쥐었다. 최대한 영애를 오래 붙잡아 환심을 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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