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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다 론도
작가 : 녹차양
작품등록일 : 2017.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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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죽음과 용의 세계 (10)
작성일 : 17-06-19     조회 : 301     추천 : 0     분량 : 4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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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밝자 샤를롯테는 민가로 향했다. 무척 습하고 먹구름이 잔뜩 껴 어둑어둑한 날이었다. 나들이에 결코 좋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살롯은 처음인 버번과 에릭슨도 흥미로운 얼굴로 길거리를 구경했다. 여태까지 보아왔던 빈민 소굴 같던 영지와는 달리 사뭇 평온한 얼굴의 사람들이 이쪽을 흘깃거리며 쳐다보았다.

 

 

 한낮이라 그런지 저 멀리서 한창 밭일로 바쁜 사람들도 보였고 아이를 보살피면서 물레를 감는 부인들은 정겨운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한쪽에선 빵 굽는 냄새가 고소했고 다른 쪽에선 삯바느질감을 들고 가던 아가씨가 그 냄새에 홀린 듯 가게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길모퉁이에서 누더기 차림새의 노인을 보기 전 까지는.

 

 

 노인이 기운 없이 차가운 길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기대어 웅크리고 있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노인은 추운 지 어깨를 껴안은 손가락을 떨고 있었다.

 

 

 "에릭슨경, 가서 먹을 것이라도 좀 사오너라."

 

 샤를롯테의 의도를 알아챈 에릭슨이 짧게 대답하여 버번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는 서둘러 뛰어갔다.

 

 

 "그대는 어찌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것이오? 아직 새벽이슬이 채 마르지도 않았고 곧 비가 올 것 같은데."

 

 노인은 눈 에 비싼 재질의 구두가 보이자 휘둥그레져서 고개를 바싹 치켜들었다가 놀라 넙죽 엎드렸다. 한눈에 봐도 지체 높은 귀족 아가씨였다.

 

 "소인은 질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인지라… 아직 머물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궁색한 변명이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질트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다면, 그 전에는 어디에 있었는가?"

 

 "태생이 정처 없이 떠도는 유랑상인인지라, 이곳저곳 다녔다가… 이제는 늙어 라후아에서 여생을 보내려 했으나 그곳도 사정이 좋지 않아 질트까지 왔습니다."

 

 "라후아가 어떻기에 그러느냐? 전염병 때문에?"

 

 라후아의 얘기가 나오자 샤를롯테가 조급한 마음으로 캐물었다. 노인은 그 모습이 의아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병도 병이지만, 그곳은- 전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요 몇 년간 그게 더 심해져서…"

 

 "이상한 일이라니?"

 

 이살롯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것으로 보아 노인은 적어도 이 귀족 아씨가 외지인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아주 곱게 자라 세상 사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거나.

 

 

 "높으신 분께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라후아는 비가 잘 오지 않는 곳이어서 가뭄이 들 때면 기우제를 지냅니다. 산제물을 바쳐 바다신의 분노를 잠재운다거나 뭐 그런 옛날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지요. 근데 그렇게 지내도 요 십여 년간 비는 눈곱만큼만 왔고 높은 파도가 영지를 덮치는 바람에 흙이 전부 못쓰게 되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어찌 사람이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영지 전부를… 파도가 그렇게 높았단 말이냐?"

 

 "소인도 실제로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제가 라후아에 갔을 때 이미 밭농사를 포기한 사람들이 즐비해 있었습니다요.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든데, 안 된 일이지요."

 

 

 계속된 대화로 노인은 숨이 찬 지 잠시 헐떡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이례적인 사건으로 순식간에 위기에 몰린 라후아의 영주가 주변 영주들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그들도 전염병으로 사정이 좋지 않아 외면했다. 소금물에 폭삭 젖은 땅은 무엇을 심어도 자라지 않았고 마실 물도 전부 짜게 변하니 병에 걸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했다고 한다. 땅을 다시 갈아엎고 어부로 나서는 이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엄청난 높이의 파도가 영지를 덮치는 일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점점 그 규모가 커져 바다에 그대로 쓸려가 실종된 사람들도 생겼으며 배를 타고 나간 이들은 돌아오지 않아 생사를 알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라후아의 앞바다는 가장 잔잔하기로 소문이 났는데 지금은 유독 그곳만이 거듭되는 재해로 피해가 커지고 있었다.

 

 노인은 유랑상인이어서 영지에 얽매이지 않고 다니기에 질트에 오게 되었다고 했으나 영지 밖을 벗어날 수 없는 라후아의 사람들은 희망도 없는 곳에 죽음을 무릅쓰고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샤를롯테는 그것이 혹시 파사딜의 '요람으로의 회귀'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물론 인간에게 호의적이었다던 파사딜이 저런 재해를 일으켰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근래에 들어 이상한 일들이 많다는 점은, 그곳에 확실히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파사딜이 라후아에 맞닿은 바다가 되었다더니… 정말 바다가 된 것인가?'

 

 

 어디까지나 항간에 떠도는 속설이라기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는데 정말 사실인가 싶기도 했다. 생각에 빠진 샤를롯테를 깨운 것은 에릭슨이었다. 건장하고 듬직한 사내가 한 손에 작은 빵 봉투를 든 모습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수고했네, 에릭슨경."

 

 샤를롯테는 봉투를 건네받고 그대로 엎드린 노인의 앞에 놔주었다. 화들짝 놀란 표정의 노인의 눈망울에 울음이 그렁그렁 맺혔다.

 

 "좋은 이야기에 대한 답례입니다. 별 것 아니나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군요."

 

 돌아서는 샤를롯테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까마귀가 머무는 방을 찾은 샤를롯테는 대낮에도 소파에 축 늘어져 있는 까마귀를 보고 혀를 찼다.

 

 "아직도 상태가 안 좋은가 보구나."

 

 "어어, 샤를롯테님. 오늘은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차마 샤를롯테의 앞에서 예의 없게 누울 수 없었던 까마귀는 끄응, 신음소리를 억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라후아에 최근 이변이 잦다고 들었어. 아마 파사딜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은데… 어찌 생각하느냐?"

 

 "샤를롯테님이 그렇게 생각하시면 그게 맞나보죠, 뭐."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샤를롯테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으나 까마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쩌억 하품을 했다.

 

 

 "언제쯤 출발하면 좋겠니? 마차멀미가 심하면 여기서 너 혼자 탈 말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진심으로 걱정하는 물음에 까마귀는 멋쩍게 웃어보였다. 마차멀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그보다 탈리스의 몸에 대한 거부반응이 더 걱정이었다. 이 여행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인데.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예 탈리스의 영혼을 삼켜버릴까, 생각도 했다. 그럼 이 육신도 자신의 것이 될 텐데…

 

 "마차보단 좋을 것 같네요. 이젠 마차라면 신물이 납니다!"

 

 "그럼 버번경에게 말해 놓을 테니, 좀 쉬거라. 난 조금 있다 부인과 오찬이 있어 준비를 해야겠다."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진저리를 치는 모습에 샤를롯테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애께서는 파니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로즈가 오찬에 입을 드레스들을 하나씩 선보이며 제가 더 수줍어했다.

 

 "파니에라면, 치마가 둥글게 부푼 그것 아니냐."

 

 알렝지아가 입었었던 엄청난 드레스를 떠올리던 샤를롯테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님이 말씀하시길, 영애께서는 수수한 옷도 청초한 매력으로 승화시키시니 이렇게 틀이 작은 파니에가 잘 맞으실 것이라고 손수 골라 주셨습니다."

 

 로즈는 적당히 부푼 파니에를 들어 올리며 알렝지아의 말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알렝지아가 반드시 류드밀라의 마음에 들게 최대한 좋은 옷들을 골라주며 말하라고 했었는데 머리가 나빠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 이 파니에는 고래수염으로 만든 것이라 자연스러운 드레스 라인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또…"

 

 데굴데굴 눈동자를 돌리며 할 말을 찾는 로즈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샤를롯테는 알렝지아가 손수 골랐다는 말에 더는 거절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로즈의 얼굴도 환해졌다.

 

 

 

 거울에 비친 샤를롯테의 차림에 로즈가 얼굴을 붉히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샤를롯테는 주인의 비위를 맞추려는 하녀의 감언이설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는데, 알렝지아의 칭찬세례에 정말 이런 옷이 유행인가 싶어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소매 끝을 만지작거렸다.

 

 "영애께서 라후아에 가신다길래 그곳의 영주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샤를롯테는 양고기 한 점을 먹고 역시나 과한 향신료 맛에 얼른 입을 헹구었다.

 

 

 "요즘 라후아의 사정이 좋지 않다면서요?"

 

 "예, 그래서 영애께서 머물 곳이 마땅치 않을까 걱정이랍니다. 라후아도 예전 같지 않으니…"

 

 근심이 많다는 알렝지아의 표정에 샤를롯테는 잠시 말을 아꼈다. 이래 뵈어도 십 수 년간 많은 귀족들을 상대했었던 지라 알렝지아가 무언가를 요구하기 위해 잘해주는 것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거래인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가진 것이 없는 망국의 여왕이었다. 가진 패가 없으니 내어 놓을 수도 없었다.

 

 '또 오셀롯에게 빚을 지워야 하나…'

 

 마뜩치 않았으나 은근한 눈치를 주는 알렝지아에게 답을 더 미룰 수도 없었다.

 

 

 "그렇게까지 염려해주시니 감사하군요, 부인. 저희 후작가는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원하는 바가 있으십니까?"

 

 

 "어머나… 보답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이살롯의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어린 영애께서 힘드실까 걱정이 된 것을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알렝지아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지만 샤를롯테는 그것이 형식적인 대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 속을 떠보며 눈치싸움을 하는 것은 그녀가 질색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렇게 사양하실 필요 없습니다."

 

 샤를롯테의 단호해진 표정에 알렝지아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영애께서 이살롯에 오신 것처럼, 저도 몬테에 가보고 싶군요."

 

 은근한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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