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롯테는 전신에 닿는 차가움에 눈을 번쩍 떴다. 잠깐 사이에 바닷속에 들어온 것이다. 햇살이 내리쬐는 푸른 바닷속은 사파이어보다도 투명했고 작은 치어들이 무리지어 쏘다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샤를롯테는 잠시 그 풍경에 넋을 빼앗겼다 금세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나 잘 되었다. 기척이 느껴지는 쪽으로 가려는 데 거대한 생명체가 느릿하게 다가와 마치 따라오라는 듯 배회했다. 크고 둥그런 등껍질 안에 팔 다리로 열심히 헤엄치는 모습이 자못 귀여워 샤를롯테는 그 등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물 밑으로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자 하얀 모래와 검은 바위 사이에 작은 빛구슬이 있었다. 은은한 빛이 나는 것이 마치 달빛에 비춘 진주 같았다. 무엇일까 가늠해보던 샤를롯테가 조심히 구슬에 손을 대자, 순식간에 시야가 뒤바뀌었다. 마치 다른 이공간에 들어 온 것처럼.
온통 검푸른 빛이 가득 찬 곳이었는데 언뜻 보면 바닷속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엄청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호기심이 일 법한 공간이었다.
눈앞에는 집채만한 용이 그르렁거리며 샛노란 눈으로 샤를롯테를 응시하고 있었다. 샤를롯테는 이 엄청난 크기의 생명체는 처음 보았으나 그것이 용의 본질임을 눈치 챘다. 하우드에게서도 언제나 같은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용이 숨을 내뱉을 때마다 공기가 진동하듯 울렸고 샤를롯테는 그 압도적인 분위기에 가만히 용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푸른 용 파사딜입니까?"
샤를롯테가 조심히 한발자국 다가가 묻자 대답 대신 성대를 긁는 듯 한 울림이 들려왔다. 단지 그뿐이었는데도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저는 샤를롯테입니다. 당신에게 여쭐 것이 있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파사딜은 또다시 조용히 샤를롯테를 응시하더니 순식간에 변모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우드가 날카롭고 거친 느낌이었다면 파사딜은 무척 차분한 느낌이었다.
"나는 지쳐서 쉬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샤를롯테의 용건을 들어주려는 태도였다. 샤를롯테는 빙긋 웃었다.
"당신도 용이시니 용의 섭리에 대해 알고 계시지요? 혹 하우드가 어디에 있는 지 아십니까?"
파사딜은 샤를롯테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그 하우드가 스스로 목숨줄을 지상에 묶어두었다더니, 그 맹약자가 그대로군.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을 보니 보통 인간은 아닌가보구나."
책망의 말투는 아니었으나 샤를롯테는 밀려드는 죄책감에 안색이 흐려졌다. 파사딜은 잠시 한숨을 쉬었다.
"…섭리를 거역한 용은 하우드뿐이 아니었다. 이 세계엔 인간들이 모르는 많은 용들이 다녀갔고 그 중 섭리를 거부한 용도 분명 있었지."
파사딜은 추억에 잠긴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때가 되면 다른 세계로 옮겨가지. 하지만 용이라고 모두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그곳에 가기 위해 지상에서 수 없이 덕업을 쌓아야 한다."
"다른 세계…?"
"흔히 인간들이 말하는 천상세계라 생각하면 된다. 다만 그곳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낙원의 공간이 아니라 진리와 관념과 이성의 세계일 뿐이다. 태초의 질서가 만들어진 곳이지."
파사딜의 손끝이 샤를롯테의 뺨에 닿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 요람으로의 회귀.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인 것이다. 인간을 돕는 것은 수단일 뿐,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지. -어쨌든 그 섭리를 거역한 용은, 즉 지상을 떠나야 하는데도 떠나지 않은 용은 이 세계가 결코 용납하지 않아."
"용납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찬 샤를롯테의 눈동자를 보며 파사딜이 그녀의 금발을 뒤로 넘겨주었다.
"세계의 힘이 닿지 않는, 아주 먼 땅속으로 추방당한다는 것이다. 죽음과 영혼의 세계, 우리들은 그곳을 '카타콤(Catacomb)'이라 부르지. 영원히 죽는 자들이 가는 곳이다. 하우드도 아마 그곳에 끌려갔을 것이야."
그 말은 하우드가 정말 죽었다는 뜻일까,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에 샤를롯테가 파사딜에게 매달렸다. 뚝뚝 흐르는 눈물이 파사딜의 소매를 적셨다.
"그럼 하우드는 죽은 존재가 된 것인가요? 카타콤에, 제가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하우드는 저 때문에, 제 잘못 때문에 섭리에 순응하지 못한 거예요! 죄가 있다면 제가 대신 받아야 할…"
"이봐!"
정신없이 우는 샤를롯테에게 파사딜이 가볍게 뺨을 두드렸다. 차가운 손길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하우드가 죽은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카타콤에 갈 방법은 하나다. 네가 죽는 것.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도 그뿐이다."
샤를롯테는 사형선고같은 대답에 그대로 주저앉아 울었다. 론도가 죽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창조주 아델론이 직접 그 숨을 앗아가는 것뿐인데 이곳은 차원이 다른 곳이니 그 힘이 미칠 리가 없었다. 자신이 원한다고 죽여줄 리도 없었다. 하우드가 원하는 삶을 살라며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깨웠으나 그 삶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방법이 그것 밖에 없는 것인가, 샤를롯테는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 무엇인지 절감하고 있었다. 넋 나간 표정으로 하염없이 울고 있는 샤를롯테를 보며 파사딜이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죽음이 무서운가?"
"죽음이 제게 올 리 없으니 그것이 더 무섭습니다. 전, 론도니까요…"
"론도?"
파사딜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샤를롯테의 설명을 기다렸지만 샤를롯테는 입을 꾹 다물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정말 다른 방법은 없나요? 그곳으로 가는 길은 아예 없나요?"
의미 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샤를롯테는 괜히 파사딜을 잡고 늘어졌다. 자신의 무력함과 무능함에 미칠 것만 같았다.
"파사딜, 당신은 지상을 떠났다고 했으면서 다시 돌아왔죠. 그런데 카타콤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일말의 희망이라도 건져보고자 꺼낸 말이었으나 파사딜은 미간을 찡그렸다.
"용이라면 누구나 요람에 가고 싶어하지. -누구나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완전한 질서와 이성의 공간에 들어서기 위해선 자신 역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데… 난 인간의 온정에 끌려 살았기에 그 문턱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이미 지상을 떠나면서 탈피를 거친 후였고, 더는 용이 아니게 되었으니… 나도 시간이 더 흐르면 이 바다에 융화될 것이다."
덤덤하게 내뱉는 말에 샤를롯테는 면목이 없었다. 눈앞이 까마득했다.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물밀듯 들이닥쳤다.
암전.
-
어린 날의 파사딜은 새로운 용이 탄생한 기척을 느끼고 당장 그곳으로 갔다. 온통 검은 빛의 어린 용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그대로 파사딜을 투영하고 있었다. 그것이 파사딜을 기쁘게 했다. 감정이 제거된 용일 수록 요람으로 갈 확률이 높다. 자신이 이 용을 잘 이끌어 지극히 이성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그것도 기쁨일 것이다. 파사딜은 검은 용에게 하우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하우드는 조금도 이성적이지 않았고, 파사딜은 번번이 실망을 금치 못했다.
검은 용은 인간을 도와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며 귀찮게 하는 인간들을 모조리 도륙 내버렸다. 파사딜은 그 피로 얼룩진 상황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갖은 충동과 감정 덩어리들의.
「 하우드, 넌 절대 용이 될 수 없을 것이다! 」
그 말을 남기고 다시는 그를 찾지 않았다. 탈피를 앞둔 때, 하우드가 스스로 한 여인을 위해 섭리를 거역하리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