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이수는 의사에 말에 또 다시 하늘이 무너지는것
같았다.
옆에 앉아 이수의 손을 잡고 있는 태웅의 손에도
힘이 들어간다.
힘없는 모습으로 진료실에서 이수와 태웅이
걸어나온다.
태웅은 이수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어
밝은척 말을 꺼낸다.
"우리, 맛있는거 먹으러 갈까?"
넋이 빠진 사람처럼 멍한 표정의 이수가 대답한다.
"태웅씨..나 눕고싶어요.."
"그래, 아침부터 나와서 피곤하지.."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도 이수는 말 한마디
하지않았다.
그런 이수의 곁에서 태웅은 불필요한 말들을
주저리 주저리 꺼내놓는다.
나사하나 빠진 사람처럼 떠드는 태웅의 모습을
곁눈질로 보던 운전기사 현석은 오늘도 실패구나
혼자 짐작해본다.
이수와 태웅이 결혼을 한지 10년
결혼을 하고 2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산부인과를 찾았던 이수는 자신에게 불임의 원인
있다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몸에 좋은 음식 운동
심지어 미신으로 내려오는 민간요법까지
안해본게 없다.
태웅은 아이가 없어도 된다,
둘이서 사는것도 좋다, 꼭 아이가 필요한가
이수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이수는 그럴수록 욕심이
생겨났다.
원치않는 임신으로 아이를 죽이는 부모가 나오는
뉴스를 볼때면 가슴속에 무언가 화르륵 타오르는것 같다.
집에 도착해 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눕는 이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이불을 여미어 주는
태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한숨 푹자, 회사 잠깐 들어갔다가 바로 올게."
대답없는 이수는 눈을 감아버렸다.
태웅이 방문을 조용히 닫고 나온다.
그리고..
태웅은 문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방문 넘어로 들려오는 숨죽여 흐느끼는
이수의 울음소리.
병원에 다녀오는날이면 자신의 앞에서 태연한척
뒤에서 혼자 우는 이수를 보면 마음이 찢어질것같다.
악몽같은 하루가 지나고 식탁앞에 마주앉은
이수와 태웅.
밤새 얼마나 울었는지 이수의 얼굴이 퉁퉁부었다.
이수는 아침인데도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위에 음식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먹고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아주머니한테 당신좋아하는 백숙 해달라고했어,
입맛없어도 먹어봐."
이수는 자신이 뭘 잘했다고 먹을 자격이 있나
자괴감까지 들었다.
태웅이 두 팔 걷어 부치고 먹기좋게 살을 발라낸다.
"맛있겠다 자, 얼른먹어."
여전히 그릇만 바라보고 앉아있는 이수가 입을뗀다.
"..태웅씨.."
태웅은 가라앉은 이수의 목소리에 얼굴을 쳐다본다.
"..우리..그만해요.."
이수의 말에 뒷통수를 얻어맞은것 같다.
뭘 그만하자는거지. 설마 헤어지자 말하는건가?
태웅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수의 말에 입맛이 뚝 떨어져버렸다.
여전히 눈동자에 힘이 없는 이수는 다른곳을 보고있다.
시간이 멈춘듯 정적만이 흐른다.
그 짧은 몇분이 몇시간 몇년과도 같은 느낌이다.
정적을 깨는 태웅의 목소리.
"당신, 지금 뭐라고 한거야?"
이수가 태웅의 두눈을 바라보며 말을 꺼낸다.
"이혼해요 우리.."
"왜그래 당신, 장난이 심하잖아."
태웅은 이수의 입에서 이혼이라는 말이 나올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농담하는거 아니에요..많이 생각하고 고민해서
얘기하는거에요"
태웅은 화가 치밀었다.
"그럼 더!!..더..생각하고 고민해봐.."
태웅은 심장이 쿵쾅거리는게 답답함마저 느껴진다.
"나보다 더 좋은여자만나 태웅씨"
"나 아이없어도 돼!!당신만 있으면 된다고했잖아!!
난..죽어도 당신하고 이혼못해"
이수는 얼굴이 붉어져 어쩔줄 모르는 태웅을 보니 자신이
정말 죽을 죄를 지은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나부터 살고봐야겠다.
마음의 짐은 이수의 몸까지 무너트리고있었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스스로의 죄책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려 이제는 모든걸 내려놓고싶다.
화제전환을 해보고자 태웅이 급하게 말을 꺼낸다.
"당신, 지금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어서그래,
우리 어디 여행갈까? 가서 머리좀 식히고 쉬다오자 그럼,"
"태웅씨...나 너무 힘들어..이제 그만하고싶어요.."
태웅의 말이 끝나기도전에 말꼬리를 자르는 이수의
결정적 한마디 힘들다는말,
한번도 없었다 아니 처음이다.
십년이라는 시간동안 이수는 한번도 힘들다,
먼저 얘기한적 없었다.
힘들면 다 얘기하라고 자신은 괜찮다고 말했던 태웅은
그녀의 힘들다는 말 한마디가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힐줄은 몰랐다.
태웅은 무슨말을 해야하는지 아무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헤어지자는 말만하지마."
애처롭기까지한 태웅의 말들이 이수의 가슴에 꽂힌다.
"당신이 잘못한거 없어,여기까지 끌고온것도 나잖아..
그러니까 나 좀놔줘요 태웅씨.."
"아니 난..그렇게 못해..나 아이 필요없다고 했잖아!!"
이런 상황이 될때까지 끌고 온건 이수의 욕심
때문이였다.
그냥 아무생각하지 않고 싶다.
자신을 곁에서 지켜준 태웅에게는 죽을죄인걸
알면서도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것만 같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기적이였다.
"나 먼저 일어날게."
태웅이 깊은 한숨을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혼자 남겨진 이수는 머리속이 복잡하게 뒤엉켜간다.
태웅은 말단 사원으로 입사해 지금의 자리까지
올랐다, 평판도 좋고 회사에서는 중역으로 일을하고있다.
탄탄대로의 그의 인생에 이혼은 예기치못한 변수다.
이수가 아이를 갖기힘들다는 얘기를 들었을때도
이렇게 절망적이진 않았다.
둘이서 더 행복하게 살수 있을거라 믿었다.
오늘은 그의 인생중 최악의 날이다.
임원들과의 회의시간도 무슨 정신으로
버티고 앉아있었는지 모르겠다.
넋을 놓고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는 태웅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태웅혼자 알아채리지 못할정도였다.
모두가 퇴근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않아,
사무실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태웅은
문득, 이수와 처음만난날이 생각난다.
12년전..
이수는 대학을 졸업하고 태웅의 회사에 입사한
신입사원 이였다.
태웅은 이수가 첫 출근날 생기가 넘치고 예쁘고 참한
모습에 첫눈에 반했다.
그래서 괜히 더 많은 일을시키고 짖궂게 굴었다.
태웅은 초등학생 남자아이같은 표현방식이
먹힐거라고 생각했던걸까..
그러는동안 태웅의 생각과는 달리 이수의 마음속에는
억울함이 쌓여있었던 모양이다.
첫 회식날 여기저기서 따라주는 술을 모두 받아마시고
잔뜩 취한 이수를 옆에서 챙겨주던 태웅은
이수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정말, 뒷통수를 쎄게 얻어맞았다.
이미 팀원들은 모두 얼어붙어 이수와 태웅을 번갈아
살피고 이수를 말리는 팀원도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태웅의 눈앞에 손가락을 들이대며
삿대질까지 해대는 이수.
태웅은 그런 이수의 모습이 기가막히다못해 귀여웠다.
"야!!니가 그르케 잘났냐!! 이씨.. 못생긴게 성격도
드~러워가지고, 너~!! 그렇게 살지마~!"
그 말을 쏟아내고 이수는 기절했다.
그날부터였다.
태웅은 자신의 뒷통수를 때린 이수에게 콩깍지가
제대로 씌였다.
자신에게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비는
이수에게 태웅은 한마디뿐이였다.
"죄송합니다 팀장님..술이 너무취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죄송하면 나랑..연애하자."
그게 둘의 첫 시작이였다.
늦은밤이 되서야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태웅의
눈앞에 벌어진 광경.
"늦었네요.."
큰박스가 두개에 작은 박스 여러개가 거실에 나와있다.
이수가 짐을 나르느라 분주하게 움직인다.
"지금 뭐하는거야..?"
"말했잖아요.."
이수가 아무렇지 않은듯 말을하고 다시 짐들을 방에서
꺼내온다.
"생각보다 필요없는 물건들이많아서 여기저기
후원도보내고 하려구요."
태웅은 화가 치밀어오르는걸 꾹 참아내고 입을 연다.
"그만해.."
태웅이 이수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는다.
"진짜 어디까지 할거야!!"
"한번 더 얘기해줘요? 이혼하자구요 우리."
"한이수!!"
더는 못참겠는 태웅이 소리를 질러버렸다.
"너 혼자 그렇게 정리하면 끝나는거야 난..
나는 어떡하라고.."
"..이렇게라도 안하면..미칠것같아서 그래요!!"
태웅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것 같은
이수의 눈을 들여다본다.
"당신한테는 죽을죄지는거 아는데..
당신이 얼마나 힘들줄아는데..그래도 이렇게 안하면
내가 죽을것같아 태웅씨.."
울고있는 이수를 태웅이 끌어안아 품에 가둔다.
이별을 준비하는 둘의 밤이 지나간다.
가라앉은 집안 분위기.
아침식사를 하기위해 식탁에 마주앉았지만
정작 음식엔 손도 대지 않고있다.
긴 침묵이 흐르고 그 침묵이 지루해갈즈음
태웅이 입을 연다.
"밤새 생각해봤어..그런데 도저히 이혼은 못하겠어.."
이수는 듣고만 있을뿐 말이 없다.
"잠깐..떨어져서 살아보자,그 정도는 할수 있을것같아."
어려운 결정을 내린 태웅은 밤사이 헬쓱해진것같다.
"꼭 당신이 나가야겠어 내가 나가는건어때..?"
"당신하고 행복했던 추억도 많지만, 힘든기억도 많아요,
다른곳에서 지내고 싶어.."
"그래.."
잠시 침묵이 흐른가 싶었지만 곧 입을 여는 태웅
"대신, 따로 나가서 살집은 내가 알아볼게,
멀지않았으면해. 당신이 이집을 나가면..
이미 나한테서 멀리 떠나는거니까.."
이미 태웅이 자신에게 많은 배려와
큰 양보를 해줬다는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있기에
이수는 듣고만있다.
"장모님께는 말할 생각이야?"
이수가 엄마얘기가 나오니 그제서야 입을 뗀다.
"..내가 할게요.."
"그래.. 그건 당신이 알아서해.."
"...고마워요.."
태웅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이혼은 보류되고 별거를 하기로 결정되었다.
둘은 결혼 10년만에 서로의 삶에서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태웅은 집근처에서 버스로 세 정거장 정도 쩔어진곳에
이수가 지낼 아파트를 준비했다.
떠날준비는 예상보다 빨리 끝이났다.
모든 물건들을 정리하고 평소 즐겨보던 책과 필수품들을
챙겨놓은 박스는 이미 태웅이 아파트에 모두 가져다
놓았고 필요한만큼의 옷가지들을 담은 캐리어를 태웅이
손수 트렁크에 실어주고있다.
"이게 다야?"
이제는 떠날 집을 눈에 담아보던 이수가 태웅의
물음에 태웅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그거면 되요."
"그래..내가 데려다줄까?"
"아뇨, 혼자갈게요.."
태웅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이수를 안아본다.
사랑하는 아내와의 별거라니 태웅은 믿기지 않는다.
태웅이 마지막 당부를 하듯 입을 연다.
"..아프지말고 잘지내..무슨일있으면 꼭 전화하고."
"..당신도..잘지내요.."
포옹이 풀리고 보내기 싫은 눈빛이 역력한 태웅이 먼저
이수를 놓아준다.
"갈게요.."
이수가 차에 올라타고 망설임없이 출발해 태웅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진다.
떠나는 이수도..
떠나보내는 태웅도..
자꾸만 눈앞이 뿌옇게 번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