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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다
작가 : sohak
작품등록일 : 2017.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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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시 돌아온 시즈완
작성일 : 17-06-20     조회 : 410     추천 : 0     분량 : 5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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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시 돌아온 시즈완

 

 

 *

 

 <2015년 8월 30일 오후 5시 30분경>

 

 붉은 노을의 해질 녘, 시즈완 해변에 파도가 친다.

 1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즈완의 아름다운 석양도, 코 끝을 스치는 바닷 바람도,

 달라진게 있다면 재인이 가오슝에 다시 오게 된 이유 뿐...

 

 "라이 라이 라이"

 

 "이 소리도 여전하구만"

 

 수 많은 중국 본토 관광객들을 호객하는 확성기 소리는 여전하다.

 바다 건너 붉은 노을은 점점 숨을 죽이며 바다를 물들인다.

 재인이 시간을 확인하면서 시즈완 노을의 절정 시각을 확인한다.

 손목 시계의 시간은 5시 37분을 가리키고 있다.

 

 "아직 쫌 남았네. 아지트나 한 번 가볼까?"

 

 시즈완 바다를 바라보면서 왼쪽으로 돌면 낮은 언덕이 있다.

 언덕은 나무로 만들어 놓은 계단을 타고 올라갈 수 있다.

 계단의 갯수는 약 100여개.

 아직 다 낫지 않은 다리를 이끌고 한 계단씩 천천히 오른다.

 계단을 다 올라가면 끝자락 오른편에 길이 30m 정도의 작은 오솔길이 있다.

 그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작은 쉼터가 나온다.

 쉼터는 시즈완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격으로 나무로 가려져 있어서 뜨내기 관광객들은 당연히 알리가 없다.

 심지어 가오슝 현지인들도 잘 모르는 이곳이 재인의 아지트다.

 아지트는 높이 50cm 정도의 비교적 높은 계단이 4단으로 되어있다.

 또한 4단 계단 양쪽에 계단 하나당 각각 2개씩 작은 계단들이 길이 25cm 정도로 나뉘어서 만들어져 있다.

 재인은 익숙한듯 두 번째 계단에 걸터앉아 양팔을 팔걸이하고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넘어가기를 기다린다.

 그리곤 뭔가 떠오른듯 앉아있던 두 번째 계단 엉덩이 받침 나무 구멍 틈에 손가락을 더듬어본다.

 재인이 무언가를 잡아서 끄집어내는데 길이 5cm 정도의 수십 개의 두루말이 종이가 쏟아졌다.

 그 중 하늘색 두루마리는 십여 개이고 분홍색 두루마리는 수십 개다.

 하늘색 두루마리를 하나 집어서 폈다.

 익숙한 글씨체, 재인의 글씨다.

 

 "2014. 7. 31.

 기다릴게

 재인"

 

 곧바로 가장 가깝게 떨어진 다른 분홍색 두루마리 하나를 집어서 편다.

 

 "2015. 5. 24.

 아직 저를 기억하나요?

 당신처럼 저도 괜찮습니다.

 오늘도 저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패선"

 

 

 **

 

 <2년 전, 2013년 5월 초 어느날>

 

 재인의 모교인 충북대학교 학생 식당은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난 때라서 학생들이 많지 않다.

 재인과 재인의 입학 동기인 법성 스님, 재인의 대학원 석사과정 지도교수인 정세찬 교수가 늦은 점심을 해결하려 학생 식당에 왔다.

 학생 식당에 걸린 벽시계는 12시 45분을 가리고 있다.

 재인은 학생 식당에서 가장 좋아하는 충무 김밥과 우동을 시켰고 법성 스님은 절에서 싸온 도시락을 꺼냈다.

 정세찬 교수는 급한 성격대로 쉽고 빨리 먹을 수 있는 돌솥비빔밥을 시켰다.

 재인이 법성 스님의 도시락을 보더니 살짝 미소 지으며 합장을 한다.

 

 "스님~ 오늘 도시락은 고기가 아주 많네요. 저 주시려고 이렇게나 많이 싸오시다니, 감사히 먹겠습니다."

 

 "어? 김 선생 주려고 싸온 게 아닙니다, 저 먹으려고 싸온 겁니다."

 

 "엥? 스님이 고기를요?"

 

 "허허~ 김 선생이 잘 모르는가 보구만, 원래 절은 채소만 먹는 줄 알고 있지만 보살님들이 시주해 주신 고기는 먹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도 고기를 드셨지요. 에헴~"

 

 "치 그런게 어딨어요? 법성 스님, 스님 맞아요? 스님 면허증 보여주세요~!!"

 

 "어허~ 스님 가지고 놀리면 벌 받습니다. 하하"

 

 재인과 법성 스님이 수다를 떨고 있는 사이 주문했던 음식이 나온다.

 정 교수는 아직 뜨거운 기운이 남아있는 돌솥비빔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에 구겨넣는다.

 입에 남은 밥의 뜨거운 입김을 뱉어가면서 재인에게 한마디 툭 던진다.

 

 "김 선생, 이제 논문 들어가야 하는데 중국에 좀 다녀오지? 중국 철학 전공인데 번역서만 보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 같은데..."

 

 "그러게 말야 나야 평생 불경만 봐와서 한자 원서에 대한 부담은 없지만 김 선생은 중국 철학이 처음 아닙니까?"

 

 법성 스님이 재인의 접시에 스님 도시락의 고기를 나누어 주며 한 마디 거들었다.

 재인이 꼬마김밥에 고추장 양념이 빨갛게 잘 버무려진 오징어무침과 스님이 주신 고기를 올린다.

 정 교수의 말에 넉살 좋게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그렇긴 한데 한 학기 남겨놓고 중국이요? 교수님 아시면서... 저는 한자만 보면 눈 앞이 하얗게 되잖아요."

 

 오징어 무침과 고기 한덩어리가 올려진 꼬마김밥을 입에 넣기 위해 재인이 고개를 숙인다.

 그 때 정 교수가 숟가락을 들어 재인의 머리를 때릴 시늉을 하면서 호통을 한방 날린다.

 

 "김!!! 자네는 입학할 때 그 자신감은 어디로 갔나? 직장까지 때려 치고 공부 시작했으면 확실히 해야 할 것 아니야!!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옆 테이블에서 밥을 먹던 여학생 네댓 명이 정 교수의 호통에 놀라 뒷자리로 이동한다.

 재인이 여학생들에게 미소 지으면서 눈인사로 사과한다.

 

 

 ***

 

 <2년 전, 2011년 대학원 입학 면접 시험>

 

 충북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장실에서 대학원 면접을 위해 전공 교수 6명이 테이블에 앉아있다.

 대학원장 옆에 있던 정년을 1년 남겨놓은 한국 철학 전공 유 교수가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이 빤다.

 대학원장과 정세찬 교수를 제외한 3명의 젊은 교수들이 서로 눈치를 살핀다.

 이를 눈치 챈 대학원장이 유 교수를 향해 약간 짜증난 얼굴로 쏘아 부친다.

 

 "형님! 좀만 참으시지. 면접 보는 자린데..."

 

 "대학원장도 내 나이돼 봐"

 

 "형님이랑 2살 밖에 차이 안나는데 뭘 모르겠습니까? 내 나이가 몇인데... 면접 시작하니까 얼른 끄세요. 아이고~ 정말~"

 

 대학원장의 타박에 마지못해 유 교수는 재떨이에 담배 대가리를 비벼댄다.

 그 때 대학원장실에 노크 소리가 들린다.

 철학과 조교가 고개를 살짝 내민다.

 살짝 열린 문으로 밀려드는 담배 냄새에 가벼운 기침 한 번하고 얼른 본론부터 털어놓는다.

 

 "대학원장님 면접자들 준비되었는데 면접 시작할까요?"

 

 조교의 기침 소리에 민망한 대학원장이 태연한 척 서둘러서 대답한다.

 "네 그렇게 하죠. 한 분씩 차례로 들여보내세요."

 

 면접 대기자들이 모여있는 4017호 강의실에서 남녀가 뒤섞인 수다스러운 목소리들이 새어나온다.

 11월 초의 조금은 쌀쌀한 날씨지만 강의실 문을 닫아놓아서 실내 공기가 기침이 나올 정도로 탁하다.

 열 명 정도의 지원자들이 면접을 기다리고 있다.

 대부분 충북대학교 본교 같은 학과 지원자들이라서 거의 동문회 수준으로 잡담을 하고 있다.

 그 와중에 어떤 여자 지원자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화장을 고치고 있으며, 어떤 남자는 넋이 나간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한편 전공 특성상 40대 중반 정도로 가늠되는 스님이 염주를 돌리면서 불경을 외우고 있다.

 재인은 긴장했는지 타는 입술에 침을 발라가면서 볼펜을 돌리고 있다.

 재인의 면접 번호는 8번.

 

 "지금부터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면접은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수험 번호 순서대로 하겠습니다. 중간에 잠깐 자리를 비우실 분은 저에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수험번호 20110301 신승민씨 저를 따라오세요."

 

 철학과 김 조교의 짧은 오리엔테이션과 함께 면접이 시작되었다.

 면접 시작 시각은 오전 10시.

 재인이 버릇처럼 한 사람, 한 사람 면접 시간을 체크하면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면접 시작 전에 화장을 고치던 여자 면접자는 연신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표정을 확인하고 있다.

 천장만 바라보던 남자 면접자는 거울 보는 여자를 스치듯 한심한 눈길을 보내더니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버린다.

 스님께서는 중간에 화장실을 다녀오셨는데 승복 앞 부분에 물이 튀겨서 민망하게 번져있다.

 스님은 아무렇지도 않는 듯 점잖게 앉아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염불을 외우고 계신다.

 스님도 긴장하신듯하다.

 재인은 턱을 괴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더니 이내 눈을 감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어느덧 6번까지 면접이 끝났다.

 면접 순번이 7번이었던 스님께서 조교의 부름으로 면접실을 향해 점잖은 걸음을 옮긴다.

 바로 다음 면접인 재인이 크게 한 숨을 쉬고 버릇처럼 손목 시계의 시간을 체크한다.

 20분 쯤 지나고 대기실 문이 열린다.

 

 "김재인씨 면접입니다."

 

 "네"

 

 화들짝 놀란 재인이 손을 들고 자신의 위치를 조교에게 확인시킨다.

 김 조교와 재인이 대학원장실 앞에 멈추고 김 조교가 노크를 한다.

 

 "네 들어오세요."

 

 재인이 남자 면접자 임을 확인한 유 교수가 미소 띤 얼굴로 담배갑에 손을 올리자 대학원장이 유 교수의 손을 친다.

 6명의 교수들에 둘러쌓여 긴장한듯이 재인이 입술을 깨물고 오른쪽 엄지 손가락으로 왼손 합혈곡을 문지른다.

 재인의 입학원서와 이력서를 살펴보던 대학원장이 먼저 질문한다.

 

 "지원서를 보니까 직장 생활도 했는데 잘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학부는 정치학이네요? 김재인 씨은 전공도 다른 동양 철학을 하는 이유가 뭔가요?

 

 예상치 못했던 대학원장의 질문에 깊고 짧은 한숨을 내쉰다.

 

 "학부 4학년 때 유가 사상에 대한 수업을 한 과목 들었는데 그때 정말 흥미롭게 들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손이 동양 철학 서적에 많이 가고 이렇게 회사 생활만 하기에는 미련이 많이 남을 것 같아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준비했다는 듯이 똑부러지게 대답한 재인은 자신이 먼저 놀란다.

 재인의 그럴싸한 대답에 젊은 면접관 교수 3명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뭔가 면접 용지에 끄적인다.

 흐뭇한 표정으로 유 교수가 한마디 던진다.

 

 "굶어죽어도 배짱 하나는 있구만. 철학할 기질은 있어!"

 

 유 교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학원장 오른쪽에 앉은 정세찬 교수가 퉁명스러우면서 급한 목소리로 질문을 한다.

 

 "흥미로 지원을 하셨다... 동양철학을 만만히 봐서는 안됩니다. 학부와 전공도 다르고 동양 철학을 하기 위해서 고대 문헌들도 봐야하고 중국어는 물론이고, 영어, 일본어 등 배워야하는 언어도 많은데 저희 학교가 김재인씨를 뽑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또 한번, 갑작스런 질문에 적지않게 당황한 듯하지만 곧바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합한다.

 

 "사실 저도 제가 잘한 일인지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구요. 하지만 이미 결심을 했기 때문에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을 생각입니다. 나중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후회하기 보다 지금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

 

 <다시, 2013년, 5월 초>

 

 법성 스님은 식사 후, 오후 수업을 위해 급히 자리를 떴다.

 정 교수는 커피를 한 모금하고 생각에 잠긴 김재인은 물 컵을 돌리고 있다.

 마지못해 결정을 내린 재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럼 어디로..."

 

 정교수가 가방에서 부스럭거리면서 서류 뭉치를 꺼낸 뒤 재인 앞에 슬쩍 던지듯이 내려놓는다.

 

 "단순히 생각하자면 중국보다는 대만이 낫지. 고서들이 번체로 기록되었으니까.

 

 "교수님 이건 입학원서 아닌가요? 어... 중산대학?"

 

 "가오슝에 있는 중산대학이네. 대만 남쪽에 있는 항구 도시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 쯤? 음식 걱정은 안해도 될 걸세 바다 근처라서 바닷가 출신이 자네 입 맛에도 맞을 걸세"

 

 정 교수가 장난기 가득한 묘한 미소로 재인의 반응을 읽고 있다.

 

 

 정 교수님의 저 음흉한 미소로 운명을 흔든 나의 어학연수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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