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산맥, 눈보라 치는 설산의 하얀 눈밭을 가르는 검은 인영이 있었다.
사박사박
홀로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는 마야의 걸음걸이는 위태위태했다.
‘슬슬 식량이 떨어졌는데’
‘그날’ 이후 정처 없이 방황했다. 어디에도 ‘그녀’의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찾고 있는 추적자들도 지긋지긋하기 그지없었다.
어디로 가야 이 마음이 편해질까? 아니 이대로 이 눈밭에서 죽어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우르르르르르
아차! 하는 사이 발을 잘못 디뎌서 눈 더미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무릇 용인이라는 것이 며칠 굶는다고 죽지는 않지만 한겨울에 눈보라가 안겨주는 추위는 그녀에게 안식을 선사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킨 마야는 다시 눈으로 덮인 산을 올라간다. 이 산맥 너머에는 메이트라왕국이라는 그녀가 가보지 못한 새 나라가 있다.
그곳에 가면 무얼 하지? 용병, 아니면 점쟁이? 아 점술은 아직 안되지 그럼 오랜만에 예술쪽으로 가볼까?
인적이 드문 산골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아니 그림은 물감이 필요하니 조각으로 하자
쿠워어!
망상에 빠진 그녀의 부주의함을 경고하듯 한 마리의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3m도 넘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흰색의 곰
그녀는 곰의 포효가 들리자마자 검을 빼어들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위험해......’
며칠간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하고 한겨울의 설산을 헤맸더니 정신이 흐릿했다.
쿠어어
“회귀의 검......”
마야의 검에서 검은 오러가 피어올랐다.
한참의 혈투 끝에 마지막 까지 서 있는 건 곰이 아니라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도 멀쩡하진 못했다. 두르고 있던 방한용 망토는 걸레조각처럼 너덜너덜해지고 피가 흘러나왔다. 다행이도 그녀가 과다출혈로 쓰러지기 전에 차가운 냉기가 그녀의 상처를 얼려버렸다.
“허억허억”
힘겹게 곰을 쓰러뜨린 그녀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곰의 시체로 해체했다. 차갑게 굳어가는 손으로 힘들게 작업을 하지만 질긴 마수의 가죽은 쉽게 벗겨지질 않았다.
빨리 시체를 해체해서 가죽과 식량을 확보해야했다.
‘아......다 귀찮아......그냥 이대로 잠들면......’
어차피 더 살아도 그녀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젠 그녀를 기억해줄이도 사랑해줄 이도 없다.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그래도 마지막엔......
“아...따뜻한.....침대......에서......자고...시....ㅍ...다.”
마야는 잠이 드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사박사박
사박사박
눈밭을 해치고 푸른 머리의 사내가 걸어왔다. 몸에는 가죽갑옷에 두터운 털외투를 덮고 있었고 등에는 거대한 대검을 메고 있었다.
“사람인가? 흠...아직 살아있군.”
설산의 조난자가, 이 위험하기 그지없는 ‘끝의 산맥’을 한 겨울에 넘으려는 멍청이가 그렇게 흔하지는 않지만 아예 없지는 않았나보다.
푸른 머리의 사내는 마야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부상은 심각했지만 아직 숨은 붙어있었다.
“아름답군.”
인형처럼 잠든 여인은 평소 여성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그가 관심을 가질만한 미인이었다.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구리빛 피부, 짐승의 털처럼 억세고 성긴 머리카락이 아니라 흑단처럼 찰랑거리는 머리. 그리고 기사로서 제법 단련된 건강미 넘치는 육체까지...헤진 누더기에 감싸여있음에도 그의 이상형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그는 품에서 포션을 꺼내 마야의 입에 흘려 넣고 상처에 발랐다.
“음.....차갑군. 동상인가”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두터운 외투를 벗고 그녀를 어께에 들쳐 맨 다음에 다시 외투를 덮었다. 자세가 조금 어색했지만 외투의 품이 제법 넉넉했는지 움직일 때 불편하지는 않았다.
“아깝긴 하지만 저건 버려야겠군.”
딱 봐도 상급은 되어 보이는 곰의 사체는 그가 찾던 사냥감이었지만 마야를 데려가기로 한 이상 그것까지 신경 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피냄새를 맡고 마물들이 더 몰려오면 그도 감당하기 귀찮아진다.
사박사박
사박사박
붉은 피자국과 아직까지 온기가 남아있는 곰의 사체는 그녀가 이곳에 있었다는 흔적을 남겼다.
눈이 내리면 여름까지 남아있다는 ‘끝의 산맥’ 북동쪽, 차가운 설원 속에서 검은 용의 아이, 이리스 노스가드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