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활발한 삼월의 홀과 달리 태양의 홀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대놓고 헐뜯거나 작당모의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메이트라왕국은 현재 두 파벌로 나뉘어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왕실파와 귀족파다.
먼 옛날부터 메이트라를 지켜온 토착귀족들과 로뎀제국 붕괴이후 유배자로서 메이트라로 건너온 신흥귀족들
토착귀족들은 오래 전부터 이 땅에서 마물들과 싸워오던 이들로 용인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고 고대에 이어져오던 주술과 마법은 한가하게 진리를 탐구할 이들이 적었기에 마법사보다 기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반면 신흥귀족들은 용인들이 세웠던 로뎀제국의 잔재를 물려받아 끝의 산맥을 건너온 자들이다. 처음 이들이 산맥을 넘어올 당시 무수히 많은 마물들과 싸우면서 소수의 인원만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들은 뛰어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고 용인과 켈라인, 에시디아의 대신관, 고위마법사같은 인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토착귀족들은 신흥귀족들이 가져다준 문명의 해택과 풍요를 누리면서도 그들을 운 좋은 죄인 취급했으며 신흥귀족들은 토착귀족들을 힘만 강한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지금에 와서 신흥귀족은 마법사, 토착귀족은 전사라는 고정관념 자체는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기본적으로 토착귀족들은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고 신흥귀족들은 충성심이라기보다는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관계로서 왕을 대했기에 20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두 파벌이 합쳐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과는 많이 다르군......’
그의 저번 방문(약 2년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칼라시 켄트백작을 중심으로 한 국왕파와 바레스 알베르트백작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파가 동과 서로 나뉘어서 테이블을 차지하고 어디에도 끼지 못한, 싸움을 싫어하는 중립파벌들은 자신이 있는 테이블로 몰려들었다.
3대가문은 이런 종류의 싸움에서 절대적인 방패다. 다른 가문은 절대 가질 수 없는 어느 종류의 ‘특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흠......”
“오랜만입니다. 노스가드후작님 이번 달 원정은 괜찮으셨습니까?”
“그럭저럭”
많은 관심을 받던 이리스와 달리 크로드에게 직접적인 관심을 가지는 귀족은 주로 마야가 길을 연 마법공학에 관심을 가지는 자들이다.
오직 이들만이 이 연회에서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며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또 후작부인께서 재미있는 물건을 만들었다는데......”
“뭐 마야는 하루만 지나도 이것저것 만드니까 팔만한 물건은 많이 안 나오지만”
크로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좌측의 중년인을 보았다. 아르킨 모건백작, 백작임에도 영지도 없어 나름 중립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 왕국의 재무를 담당하는 자다. 그도 크로드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담담하게 말했다.
“뭐 최근 만든 물건은 별로 비싼 게 없었으니까요. 왕실의 마법공학부에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너무 헐값이라 원자재 값도 안 나온다고 마야가 불평하더군.”
솔직히 자신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지만 마야가 당부했기에 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 왕국의 예산범위 내에서 합당한 가격을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 말고도 최근 노스가드에 대한 지원이 줄고 부과하는 세금이 많이 늘었던데 다른 3가문 말고 노스가드에게만 말이야”
이건 확실히 3가문에 대한, 정확히는 노스가드에 대한 견제다. 하지만 아르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른 가문과 달리 노스가드는 자립할만한 환경이 갖춰져 있기에 지원을 줄인 것입니다. 어차피 그 정도 차이는 마법공학으로 버는 돈으로 금세 메울 수 있지 않습니까? 재정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런 연회에서 말고 제대로 시간을 내서 왕성에 와주시기 바랍니다.”
크로드가 건넨 주제가 난감했는지 아르킨은 마시고 있던 와인도 내버려두고 자리를 벗어났다.
“이런 재무대신이라는 자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서 저런 말을 할 줄이야 너무하는 것 같군요.”
“...누구지”
“저는 리누스 발렌타인 자작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북부에서 작은 영지를 하사받았기에 북부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후작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렇군.”
크로드는 약간 놀란 눈으로 리누스를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은 제법 안정기라 공을 세우고 새 영지를 하사받는 것은 힘들다. 거기에다 세습작위인 자작을 받았다면 어떤 공인지는 몰라도 제법 큰 공을 세웠으리라
“지금 목에 걸고 계신 물건, 혹시 시계가 아닙니까? 마도공학으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만?”
“회중시계라는 거지 마야가 비싼 물건이라고 조심히 다루라고 하더군.”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크로드는 목에 걸고 있던 회중시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집중되는 모습은 마치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아보여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하긴 몇 년 만에 내놓는 쓸 만한 물건이긴 하지’
거창한 걸로 치면 최근에 만든 강철거인이 최고지만 그건 아직 쓸모가 없다.
“이 회중시계는 대단히 정교하군요. 역시 후작부인의 실력은...”
“이건 얼마에 구할 수 있습니까?”
“딱 봐도 대량생산하기 편한 물건은 아니군요.”
크로드는 이리스처럼 귀족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마야가 적당히 설명해주고 주문을 받으라고 했기에 그들의 대화를 잘 받아주었다.
“곧이어 모나트 왕자님이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채우고 있던 귀족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크로드에게는 상관없지만 유일한 왕위계승권자인 만큼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을 수가 없으리라
“하 마치 썩은 고기에 몰려드는 하이에나 같군요.”
유일하게 리누스만이 그와 같은 테이블에 남아있었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떠나가는 귀족들을 바라보다가 크로드를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최근 노스가드에 대한 지원이 많이 줄었다는데 왕실에선 왜 그렇게 노스가드를 푸대접 하는지 모르겠군요.”
동의를 구하는 리누스의 눈에 크로드는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크로드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래서 말인데......개인적으로 노스가드에 대한 지원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원? 일방적인 지원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거래겠지”
“하하 눈치가 빠르시군요. 그럼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노스가드에서 광석을 매입하고 싶습니다.”
“광석이라.....마수의 가죽이나 뼈면 모를까 광산은 없다.”
실로 아쉽게도 마물들과의 전투에서 최전방이면서도 노스가드에서는 광산이 없었다. 노스가드의 전사들이 마물의 뼈와 가죽을 이용한 장비를 많이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럴 리가요! 얼마 전에 서부로 원정을 가면서 흑철광산을 찾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끝의 산맥’ 한 가운데에 있는 광산을 말하는 건가? 그건 못 쓰는 광산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크로드는 의아함을 느꼈다. 분면 저번원정에서 원정군에 포함된 장인이 우연찮게 흑철광산을 찾긴 했다. 일반 철보다 무겁지만 단단한 흑철은 본 메탈을 가공할 때도 효율이 높은 상급광물이라 채굴해볼까 했지만 위치가 너무 나빠서 채광을 포기하고 자신도 기억에서 지워둔 장소다.
‘분명 원정대에 포함된 이들만 알고 있을 텐데 이자가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기대했던 대답이 나오지 않자 리누스는 다시 말했다.
“최근에는 마물이 많이 줄어서 여유가 있을 텐데요? 전초기지를 세우고 쓸데없는 평민을 좀 써서 채굴하면 되지 않습니까? 값은 넉넉하게 쳐드리겠습니다.”
‘신흥귀족답군.’
아마 마법사의 제자로 있다가 공적을 세워 작위를 받았으리라. 크로드의 대답은 북부의 방패라는 이름답게 완고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방금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지......백성은 보호의 대상이지 소모품이 아니다. 그리고 서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 북부와 동부의 마물이 다른 지역으로 내려올 것이다.”
눈앞의 사내에 대한 호감이 팍 줄어들었다. 토착귀족들이 신흥귀족들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는 이유 중 하나는 로뎀의 귀족이었던, 로뎀에서 살았던 이들과 메이트라에서 살았던 그들의 관점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마법사 한명, 전사 한명이 급한 메이트라는 절대 백성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사치와 향락에 찌들었던 신흥귀족들은 ‘끝의 산맥’을 넘으면서 엄청난 고난을 겪었을 텐데도 그들의 권위의식은 완전히 벗겨지지 않고 대를 이어 이어졌다.
리누스가 무어라 더 말하려 했지만 때마침 수많은 귀족들을 제치고 모나트 메이트라가 크로드에게 인사하러 왔다.
“왕자님이 오시는 군요.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음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말해주십시오.”
왕자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건지 리누스는 조용히 물러나 바레스백작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제 성인식에 와주실 줄이야......북부의 수호자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얼굴은 봐 두어야지”
저 초롱초롱한 눈을 보자니 리누스란 사내를 봐서 나빠졌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
“이곳에 오기 전에 삼월의 홀에 들렸는데 이리스양을 만나보...”
“그만! 거기까지”
기분이 나아졌다는 건 취소다. 모나트가 이리스를 언급하며 얼굴을 붉히자 크로드는 말을 잘라버렸다.
“네?”
“이리스는 노스가드의 후작이 될 거다. 사위는 무조건 데릴사위야”
“아...네......”
이리스의 신랑은 왕자라는 겉만 번지르르한 녀석보다는 마음씨 좋고 말 잘 듣는 남자가 좋다. 그리고 또......
‘아무렴 왕자는 안 되지’
모나트는 마음속으로 후작 앞에서 이리스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