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식이 끝나고 나서도 이리스와 크로드는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리스는 렉스를 데리고 나리아와 마야의 선물을 사고 수도를 구경하러 갔으며 크로드는 노스가드에 콕 박혀있는 마야를 대신해서 회중시계를 비롯한 마법공학 물품의 주문을 받았다.
크로드는 자신에게 온 편지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건 초대장......이것도 그렇고......이건 주문요청이군.”
크로드가 노스가드성을 벗어나는 일이 드물다보니 이런 식으로 수도를 방문했을 때는 제법 많은 초청장이 온다. 물론 내용을 살펴보면 초대장의 경우는 대부분 귀족가문에 속한 마법사가 보내온다.
마야가 수도로 나온 적이 한 번 밖에 없기에 꿩 대신 닭이라는 느낌으로 초대를 하는 것이랄까? 정작 크로드는 검술 외에는 잘 모르기에 시끄러운 마법사들의 초대장들은 항상 전부 거절해버린다.
크로드는 편지들의 정리를 대강 끝내고는 시종을 시켜 마차를 준비했다. 마야의 말대로 왕성에서 재무대신을 만나보고 왕실의 의중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칼리덴성 한 귀족의 저택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커튼으로 창을 가려 어두워진 방 일부러 낮에 촛불을 피우는, 퍽이나 고풍스러운 취향을 가진 귀족이 이 방의 주인인 듯싶다.
벽에 걸린 그림들은 촛불의 빛을 받아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고 하인들은 분위기에 맞춰 말 한 마디 없이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아니 마치 인형이라도 되는 양 꿈쩍도 없이 얌전히 있었다.
끼익
“오셨습니까?”
어둠에 녹아드는 것처럼 전신을 시커먼 색으로 도배한 사내는 막 방으로 들어선 자에게 말을 걸었다. 희미한 빛에 스며들듯이, 녹아내린 밀랍의 냄새가 느껴졌다.
“대낮부터 양초라니 고약한 취미로군.”
마법등 보다야 저렴하다지만 오직 분위기를 내기 위해 대낮부터 비싼 양초를 키는 행위는 사치스러운 행위다. 이런 문화는 몇 년 전부터 소수 신흥귀족들 사이에서 생겨난 취미로 토착귀족들은 이 행위를 보며 돈을 태운다고 욕했다.
“지금 저를 보러 오신게 제 취미를 따지기 위함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르킨경”
“자네가 말한 ‘현 상황’을 타계할 비책은 제발 제대로 된 이야기였으면 좋겠군.”
“지금의 메이트라는 포화상태입니다. 국왕파든 귀족파든 서로 부족한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격렬해지고 있지요.”
말 그대로 약200년 전부터 점점 강도가 올라가던 마물의 침공은 약60년 전 부터는 제법 완화되기 시작했고 지금에 와서는 변방을 지키는 사람들도 제법 여유가 생겼다.
마물이 침공해 올 때마다 죽어가던 귀족들이 이제는 자리를 지키며 버텨내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살아남은 이들은 자신의 조상들과 달리 자신이 행한 충성의 대가를 원하기 시작했지만 왕국 내에서 쓸 만한 땅덩이는 많지 않고 로드러너가의 동부확장도 바다에 막혀서 북상하기 시작했다.
작위와 포상을 받을 귀족들은 늘어 가는데 그들에게 내려줄 재화와 토지는 항상 부족했다.
“최근에 아르킨님께서 직접 주장하신 3대 가문 지원 축소와 토지가 없는 귀족들에게 매달 지급하는 품위유지비 축소, 토지를 가진 귀족에 대한 세금증가 마지막으로 화폐추가생산을 통한 통화가치 하락까지 이 모든 정책들이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것 아십니까?”
“그, 그건......”
아르킨은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주장한 정책들은 하나하나가 귀족들의 불만을 초래할만한 것이다. 부과되는 세금이 늘어나는 만큼 그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기 시작했고 그것은 곳 민심악화로 이어졌다. 최근 남부에서는 일부 백성들이 봉기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으니 슬슬 한계라고 봐도 무방했다.
“케이크를 늘릴 수 없다면 케이크를 먹을 사람을 줄이면 되겠지요. 3가문 중 하나만 없어지면 충분할 겁니다.”
“그, 그런 이야기를 국왕폐하께서 용납할 것 같은가! 3가문은 이 왕국이 시작되고부터...”
“그러니까 너무 오래되었단 말입니다. ‘끝의 산맥’이 잠잠해지면 왕실에 가장 위협이 되는 게 그 3가문이라는 것을 모르시는 겁니까?”
“......”
3가문의 영지는 사실상 메이트라에 붙어있는 별개의 국가로 취급되고 있다. 마법공학으로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기 시작한 노스가드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면세해택과 식량지원을 받고 있지만 호크아이와 로드러너도 지원금을 받아야 할 정도로 가난하진 않다. 그들에 대한 지원금이 전체 예산의 10%에 달하는 만큼 그것만 줄어든다면 지금보다는......
“지금 이야기를 폐하께 보고 드리기 전에 입조심 하는 게 좋을 것이오!”
3가문이 메이트라를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헌신에 왔는데 저런 망언을 담는단 말인가? 하지만 아르킨의 마음속은 폭풍우 치는 바다의 조각배처럼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다른 가문은 돈도 별로 안 나오지만 노스가드의 마법공학이 왕실의 것이 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노스가드, 그 휘하의 가신들이 줄어든다면 얼마나 많은 땅이 남겠습니까?”
마야가 시작한 마법공학은 북부가 원산지인 만큼 가장 많은 재료를 소모하고 가장 많은 물품이 생산된다. 이번에 노스가드후작이 들고 온 회중시계나 이리스 후작영애가 입고 있었다는 인스턴트아머 같은 정교한 물품은 아직까지는 북부에서 밖에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그’의 말대로 노스가드는 3가문 중 가장 많은 가신들과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그 토지의 대부분은 한해 중 절반이 얼어있는 동토라 농사도 제대로 짓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그 말은 매우 유혹적으로 들려왔다.
“딱 한 가문입니다. 3가문 중 한 가문만 희생하면 많은 귀족들이 갈등을 없애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자네의 뜻인가? 자네 ‘파벌’의 뜻인가?”
“글쎄요?”
아르킨은 눈앞의 ‘그'를 보며 침음을 삼켰다. 일개 귀족하나가 저런 큼직한 암계를 꾸밀 일은 없으니 사실한 전체 귀족중 절반의 뜻이라고 봐도 좋았다.
“나한테 이 이야기를 해주는 저의가 뭔가?”
“저흰 이미 준비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왕실하고는 척을 지고 싶지 않으니 미리 알려드린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말을 마친 사내는 어둠속에 덮여있던 몇 장의 서류를 아르킨에게 보여주었다. 노스가드의 병력현황, 진행 중인 마법공학 프로젝트를 비롯한 가신들의 동향이나 원정일정까지 외부로 공개될 리 없는 자료들까지 전부 모여 있었다.
“미, 미친놈들 진즉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르킨은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종이를 전부 찢어버렸다. ‘그’는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고민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르킨경께서는 그냥 뒤처리만 해주시면 됩니다. 만약 잘못되더라도 귀족들이 줄어들면 한동안은 잠잠해지겠지요.”
설명은 그럴싸했지만 그가 가르쳐준 계획에는 두 가지 큰 문제점이 있다. 하나는 노스가드가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을 때, 왕실과 3가문 간의 갈등은 피할 수 없고 두 번째로는 공격에 가담하지 않는 반대쪽 파벌의 귀족들은 이득을 거의 배분받지 못해 파벌의 균형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도 임시방편일 뿐이야 두 파벌간 갈등은 피할 수 없어! 전쟁이 일어날 것이야”
“그걸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서, 설마......”
“사계절의 반복처럼 귀족의 가문도 결국은 순환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메이트라처럼 전부 끌어안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귀족을 줄여야 한다는 건가. 그건 나도 동의하지만 어떻게 귀족들을 줄인단 말인가?”
“영지전! 오히려 노스가드보다 그게 주요목적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초기 메이트라 왕국이 설립되었을 당시에는 병사가 귀했기에 영지전을 금지했다. 모든 갈등은 왕실과 3대가문의 중재아래에 해결되었고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당사자 간의 결투로 막을 내렸기에 대가 끊어지는 일은 드물었다.
지금 영지전이 허가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왕실과 3가문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귀족들이 있으니까. 당장의 문제는 노스가드의 땅덩어리로 해결하고 이어지는 영지전 허가로 귀족들의 수가 줄어든다면 이 왕국의 수명을 더 늘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이걸 후작에게 말하면 어떻게 할 거지?”
국왕에게 말한다 해도 왕의 병력보다 귀족들의 사병이 훨씬 많은 지금은 어떤 조치를 취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공격대상인 그에게 직접 말한다면?
“뭐 그것도 나쁘진 않군요. 거기에 적혀있는 귀족들이 얌전히 죽어 줄지는 의문이지만 말입니다.”
“......”
싸움은 피할 수 없다. 아르킨은 더 이상 무어라 말하지 않고 ‘그’가 보여준 서류들을 챙겨서 저택을 벗어났다.
“재무대신은 있는가?
“모건백작님께서 후작님이 오시면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들어오시지요.”
재무부서를 지키던 하급관리는 크로드를 아르킨이 있는 장소로 데려갔다.
“이번 지원 축소와 세금 인상에 대해 말하러 왔다.”
“그렇습니까......”
“뭐 솔직히 지원이 줄었다는 사실은 크게 상관없으니 왜 줄었는지 그것만 마야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주면 되네.”
크로드의 어조에는 사실 지원 따위는 어찌되든 상관없지만 부인이 따지라고 해서 따지는 거니 설명이나 잘 해달라는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최근 메이트라의 경기가 좋지 못합니다. 가뭄이 들거나 한건 아니지만 흉작이 계속 되서 식량도 함부로 배급하기 힘들어졌고 각 영지에서 걷어 들이는 세금만으로는 왕실 예산이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어서......”
사실 왕실의 예산이 부족한 이유는 간단했다. 귀족들에게 영지를 내려주느라 왕실의 직할령이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고 그 적자를 매워보려고 마법공학에 많은 예산을 투자하고 적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현재 메이트라왕국에서 가장 가치 있는 두 사업이 마법공학과 무역인데 마법공학의 경우 마법공학을 연구할 마법사가 적어 투자한 예산에 비해 만족스러운 품질의 물건을 만들 수 없었고 무역의 경우 바다를 끼고 있는 남부 영지는 3대 가문만큼이나 오래된 토착귀족들이 항구를 꽉 잡고 있었기에 많은 세금을 물리지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비교적 여유가 있는 후작님께서 선처를 베풀어주셨으면 합니다.”
“뭐 대충 그런 이야기일 것 같았지.”
사실 더 좋은 방법도 있다. 사치품에 대한 세금을 더 부과해서 무역과 마법공학을 통해 벌어들이는 이익을 제분배하는 것이다. 아르킨이 이전부터 주장해오고 있던 것이지만 많은 귀족들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여기 관련 자료가 있습니다. 아마 이정도면 후작부인도 납득하겠지요.”
크로드는 대화가 끝나자마자 방을 벗어나려 했다.
지금 말해야 할까? 아니면......
“후작님 한 가지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지? 자네와 내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친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만약에 말입니다. 왕국에 위기가 닥쳤을 때 노스가드를 희생해서 막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흠......”
노스가드의 충성심에 대한 질문인가? 지금 자신과 왕실의 관계 같은 것들을 생각하더라도 크로드에게는 별 의미 없는 질문이다.
“조상들이 그러했듯이 이 땅을 위해 피를 바치겠지”
족히 천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노스가드의 이름이 탄생한 순간부터 메이트라를 수호하는 것이 노스가드의 이름을 받은 귀족의 의무였으니까
“그렇군요.”
아르킨은 방을 벗어나는 크로드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자신이 직접 하는 일도 아니었지만 묵직한 죄책감은 가슴에 남았다.
‘그럼 이 왕국을 위해 피를 흘려주십시오.’
바위가 모래폭풍에 깎여나가는 것처럼 메이트라 왕국에도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피냄새가 섞인 아주 강한 바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