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쩐지 어수선한 밤이다. 평소와는 다른 공기 다른 기분, 그리고 불길함......이리스는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뭐지?’
“왜 그래? 언니?”
이불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왔는지 나리아도 눈을 비비적거리면서 깨어났다.
“아니 그냥 목이 말라서 잠깐 물 좀 마시고 올게”
이리스는 불길함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물을 마시러 나가려 했지만 그 때 문 밖에서 쿵쿵 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발걸음 소리는 점점 그녀의 방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리스가 침대를 벗어나 어정쩡한 자세로 있는 사이 그녀의 방문이 열렸다.
덜컥!
“누, 누구야?”
어둠 속이라 아직 방문을 연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둠속에 비친 그림자가 커다란 것이 성인남성 같았다.
“찾았다. 여기에 둘 다 있었군.”
“누, 누구...”
이리스가 무어라 말하려는 사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는 그녀에게 한걸음씩 다가왔다. 사내가 방안으로 들어서 그의 오른손에 들린 장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아는 목소리는 아니야.’
이리스와 나리아가 조용히 있자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눈앞의 사내는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이리스는 그자를 자극하지 않으며 침착하게 무기가 될 말한 물건을 살피는 사이 잠에 취해있던 나리아가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제길”
사내는 두 사람 중 앞에 있는 이리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회귀의 검의 초식에 따라 몸을 움직이며 사내의 손을 피하고는 다리를 후려쳐서 사내를 넘어뜨렸다.
“큭”
이리스와 나리아가 어린 소녀라고 방심하고 있던 사내는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리스는 벽 쪽에 있던 촛대를 들어서 막 몸을 일으키고 있는 사내의 등에 내려찍었다.
“커헉”
“으아아아악”
사내가 큰 충격을 받고 쓰러지자 이리스는 사내의 검을 빼앗아서 마구잡이로 내려쳤다. 평소 몸에 익혀두고 있는 자세는 어디 갔는지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자세였지만 이미 빈사상태이던 사내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허억허억허억”
사내의 움직임이 멈추자 이리스는 검을 내팽겨 치고 피로 물든 양 손을 바라봤다. 붉고 진득진득하고 비린내 나는 피......
“우욱”
“괘, 괜찮아? 언니”
당장이라도 토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성에 침입자가 있고 나리아를 안심시켜야 한다. 그래 언니니까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해
“하아......으......나는 괜찮아 나리아도 괜찮지?”
“응”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이리스는 피로 흠뻑 젖어서 무겁고 축축해진 잠옷을 벗어던지고 인스턴트아머로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자 흥분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지만 아직도 검을 들었던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일단 전사들이 있는 장소로 갈까?”
이리스는 바닥에 내던졌던 검을 다시 들었다. 자신이 훈련용으로 쓰던 검보다 무겁지는 않았지만 피가 달라붙은 진검의 축축함과 불길함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나리아는 잠시 고민하는 가 싶더니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엄마 방으로 가야해 나쁜 사람들이 성에 들어왔을 때 엄마가 하라고 한 게 있는데......다리가 안 떨어져......”
이리스는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나리아를 보고는 검을 내려놓고는 그녀에게 자신의 외투를 걸쳐준 후에 안아 올렸다. 어차피 검을 든다고 해서 더 싸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저벅저벅
“언니 저쪽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을 벗어나자 밤하늘을 붉게 밝히는 불이 보였다. 거리를 가늠해보니 병기고나 훈련장 방향인 듯싶다.
“저쪽으로 가면 노스가드의 전사들이 몰려있을 거야 그냥 저기로 가자”
“너무 멀어 엄마 방으로 가야해”
“하지만 엄마 방에는...쉬잇”
저벅 저벅 저벅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오자 이리스는 나리아를 창문으로 넘겨주고 자신도 창문을 넘어서 정원으로 내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는 이리스의 방 앞으로 도착했다. 이리스는 창문에 매달려서 발소리의 주인을 살펴보았다. 자신의 방에 들어왔던 사내처럼 복면과 흑의로 몸을 감싼 사내, 손에 쥔 장검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곤란하군.”
복면인이 고개를 돌리려 하자 이리스는 재빨리 창문 아래로 몸을 숨겼다. 다행이 그는 아직 그녀를 눈치체지 못한 듯하다.
사내가 다른 곳으로 향하자 이리스는 나리아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기까진 무리일 것 같네. 엄마방으로 가자”
나리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리스아 나리아는 덤불 사이로 몸을 숨긴 체 천천히 이동했다. 마법공학으로 따뜻한 온도가 유지되는 정원에는 메이트라 남부에서 볼법한 과일나무나 덤불들이 우거졌기에 몸을 숨기기에 아주 적합했다.
외풍을 차단하는 마법까지 걸려있기에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복도 이곳저곳에서 울리고 있는 발소리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언뜻언뜻 창문사이도 수상한 그림자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저 사람들은 누굴까?”
“나도 모르겠어.”
그때 마야의 방 앞에 있는 입구에서 복면인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조용히 수신호를 나누더니 정원을 천천히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위험해 어떻게 하면......’
자신들은 마야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으니 이대로 가면 필연적으로 들키고 마리라 그렇다고 복도 쪽으로 다시 돌아가자니 복도에도 다른 복면인이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해볼게”
그때 나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작은 손을 이리저리 꼼지락거리며 수인을 맺더니 주문을 완성했다.
“키네시스”
툭 우수수
마야의 방 반대편 쪽에 있던 오렌지 나무에서 오렌지 하나가 떨어지더니 나뭇잎을 스치며 작은 소리를 울렸다. 복면인들은 오렌지 나무를 향해 모여들었다.
다행이 복면인중 누구도 마야의 방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체지 못했다.
끼익
마야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조용히 문을 닫았다. 아버지나 다른 전사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하면 이것저것 옮겨서 문을 막는 게 좋겠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 들킬 위험만 늘어날 것이다.
마야의 방은 침대가 있긴 하지만 침실이라기보다는 방치된 연구실과 같았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흩뿌려져 있었고 일부는 먼지가 쌓인 체 방치되어 있었다. 아마 마야가 나리아에게 지시한 게 뭔지는 모르지만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나리아는 방안에 장식된 장식물을 이리저리 뒤적거리고 있었고 마야는 벽에 걸린 장도를 집어서 검을 뽑아들었다. 한동안 관리하지 않았는지 칼날은 이가 다 빠져버렸고 중간부분은 부러져 있었다. 엄마가 옛날에 쓰던 무기 같은데 없는 것 보단 나을 것이다.
“이거랑 이건 아공간 주머니고...”
마침내 그녀가 잡동사니 사이에서 두 개의 작은 주머니와 피처럼 검붉은 빛을 띠는 오브를 꺼냈을 때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이리스는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할 세도 없이 낡은 장도를 쥐고 달려들었다.
“허억”
침입자는 화들짝 놀라며 검을 피했다. 한 사람이 검을 피하자 뒤에서 다른 사내가 뛰어들다가 이리스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검을 치웠다.
“이, 이리스 아가씨 접니다.”
“렉스?”
“휴우~나리아 아가씨도 같이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나리아를 찾는걸 보니 뒤에 있던 사람은 나리아의 호위기사인 벤자민인 듯싶다.
“여기 까진 어떻게 온 거야?”
“쉬잇! 아직 밖에 다른 침입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님께서 이럴 때를 대비한 매뉴얼을 미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지금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이리스와 나리아는 아직 방안에 들어온 침입자와 저 멀리 타오르던 불길밖에 보지 못했다. 하지만 두 전사의 갑옷에 남아있는 전투의 흔적을 보자니 결코 평범한 일을 아닌 듯싶다.
“......적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모릅니다만 외성의 건물에서 화재를 일으키고 내성에 잠입해온 후 병기고를 노렸습니다. 저희는 이상상황이 발생했을 때 아가씨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기에 이리로 왔지만......이곳까지 침입자가 있더군요.”
외성에 불을 지르고 기사들을 유인한 자들은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운 검사들이지만 내부로 진입한 적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많은 인원을 소모하는 북부원정으로 전사들이 출정나간 지금은 성을 지키는 전사들의 수가 너무 부족했다.
“엄마 연구실 쪽은?”
“네?”
“엄마가 자신의 기술을 노리는 사람들이 올지도 모른다고 했어. 전부 회수해야해”
마야의 연구실은 상당히 소란스럽기에 전사들의 숙소와는 반대편에 있다. 만약 병기고 쪽의 화제가 시선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면? 이 먹을거리도 없는 영지에 적이 공격할 최소한의 이유는 될 것이다.
“그렇군요. 하지만 방법은 있습니까?”
“이 오브를 쓰면 가능해 하지만......근처 까지는 직접 가야해”
마야가 비상용으로 만든 오브에는 연구실에 있는 실험기록을 아공간에 보관하는 기능을 가졌지만 그 사정거리에 제한이 있었다.
“위험하군요. 하지만 저희는 아가씨들의 안전이 먼저입니다. 다른 전사들은 외성에 묶여있고......”
두 전사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야의 연구실을 확인하긴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이리스와 나리아를 데려가거나 여기에 두고 가기엔 부담이 컸다.
“연구실로 가자”
“하지만 두 분을 모두 지키면서 연구실로 가기엔 아직 침입자가 많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감각은 너무 소름끼쳤다. 아직도 손이 떨렸다. 이 방에 손을 대지 않은 걸 보면 한동안은 안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이리스는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나도 싸울 수 있어.”
“훈련과 실전은 다릅니다. 저희가 아가씨를 지켜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성인 남성에게도 첫 살인은 많은 부담을 준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을 죽였다간 평생 마음의 상처로 남을 수 있다.
“괜찮아 이미 한번 했으니까”
“그렇군요. 방에 있던 시체를 보고 짐작은 했습니다만......괜찮습니까?”
“괜찮아”
마음속으로는 언젠간 해야 할 일이였다고 필사적으로 되새기는 그녀의 겉모습은 얼어붙은 것처럼 냉정했다. 렉스도 그녀의 결심을 보고는 품에서 단검을 한 자루 꺼내서 주었다.
“그 검으로는 조금 불안하군요. 예비용으로 쓰는 무기지만 필요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길이는 더 짧았지만 본 메탈로 가공된 칼날은 묵직하고 튼튼했다. 적어도 휘두르다가 부러질 일은 없을 것이다. 이리스는 장도를 등에 매고 렉스가 건네준 단검을 쥐었다.
“조심하십시오.”
이때는 아직, 그래... 이때는 나에게 저들이 누구인지, 진짜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병기고 밖으로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하는 그 불길의 의미에 대해서는 분명 알 수 있었다.
문을 벗어나자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불길이 보였다. 붉은 달 미타가 뜨는 밤도 아닌데 붉게 달아오른 하늘은 지상의 전경을 뚜렷하게 보이게 했다. 덕분에 시야가 어느 정도 확보되었지만 그건 침입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저기다!”
“쳇”
“두 사람 다 여기...컥”
이제는 은밀하게 처리할 생각도 없는지 이리스일행을 보자마자 소리치는 복면인을 향해 두 전사는 단검을 집어던져 발견자를 침묵시키고는 두 사람을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저쪽으로”
렉스는 대뜸 창문을 향해 달려가더니 눈과 얼음이 겹겹이 쌓인 지붕 위를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왔지만 서리늑대의 전사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두 소녀가 춥지 않도록 꼭 껴안으며 지붕 끝머리에서 뛰어내렸다.
때마침 겨울철이라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은 푹신한 눈이 두껍게 쌓여있어서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지붕을 탄 덕분에 마야의 연구실까지의 거리도 대폭 좁혀졌지만 보고 싶지 않던 것까지 보게 되었다.
철제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과 그들에게 호위를 받는 마법사들, 체온조절마법이 걸린 갑옷이라면 겨울철에 활동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노스가드의 전사들이 마수의 가죽을 이용한 갑옷을 두른다는 것들을 생각하면 저들은 다른 곳에서 온 게 분명하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기사의 갑옷에는 각양각생의, 귀족들의 문양이 남아있었다.
“저건......”
“정규군이군.”
도적이 습격해올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의 기사라니!
그들은 기사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싸울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이리스도 나리아와 같이 겁먹은 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저들이 향하는 방향을 보면 나리아아가씨의 말이 맞는 것 같군요. 조심히 따라가도록 하지요.”
마법공학의 시초인 그녀의 연구실, 원인이야 어쨌든지 저들이 노리는 것은 그것이다. 그렇다고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 성내를 돌아다니던 첩자들과는 질이 다르다. 저들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자신들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그들을 따라 조심스럽게 이동하자 예상대로 그들은 마야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이리스와 일행들은 연구실 옆 대장간으로 향했다. 이 대장간은 마야가 비밀통로를 만들어놓은 장소이기도 하다.
“여기면 충분해”
나리아의 말을 증명하듯이 오브가 푸른색으로 깜빡깜빡 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