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 역시 마법공학의 시초!”
“이것은! 과연 이런 식으로 하면 더 완벽하군.”
“빨리 챙기시오”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마법공학물품에 감탄을 감추지 못하는 마법사들을 보며 기사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노스가드후작이 반역을 중비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북의 수호자인 노스가드가문에 대한 공격행위, 그것도 정정당당한 대결도 아니고 빈집털이식으로 공격한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지식을 갈구하는 마법사들은 희희낙락했다.
‘그렇다고 해도 대단하긴 하군.’
마법에 문외한 그가 보더라도 마야의 연구실은 대단했다. 사방에 잡동사니처럼 흩어져있는 물건 하나하나가 아티펙트였으며 방 한구석에는 마나코어가 장착된 갑옷과 검은 그에게도 제법 매력적이었다.
‘하나쯤 챙겨볼까?’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마야의 작품인 만큼 한두 개 쯤 챙겨볼만 하리라 그렇게 생각한 기사들의 일부가 갑옷들이 진열된 장소로 몸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라? 이거 작동중인 것 같은데?”
“그러네. 마나가 활성화되고 있잖아?”
갑옷의 투구부분에서 붉은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부 기사들은 깜짝 놀라며 뒤로 피했고 일부는 호기심을 가지고 갑옷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조금 후에는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마스터 키 연동완료, 보안시스템 작동을 계시합니다. 침입자 색적......색적완료. 일치하는 마나파장 없음......허가되지 않는 기록 열람 감지! 보안모드 S21작동을 계시합니다.-
우우우웅
“멍청한 놈들 뭘 건들인 거야!”
“우, 우리는 아무것도 안 만졌다고!”
그들이 당황하는 사이 서재의 연구기록이 하나하나 허공으로 모습을 감췄다. 마법사들이 손에 들고 있던 책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록운송 완료 침입자를 제거합니다. 아이언나이트M4부터 아이언 나이트M12까지 기동 시작-
“채, 책들이 사라졌어!”
“가, 갑옷들이 움직인다!”
벽 쪽에 장식되어 있던 것은 평범한 갑옷이 아니라 아이언나이트의 미니어처였다. 나리아가 들고 있던 오브와도 연동되어있던 그것들은 마나코어에 저장된 마나를 이용해서 침입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형이라 몸이 굼뜬 아이언나이트와 달리 미니어처는 제법 기사흉내를 내며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수가 별로 많지 않고 진짜 인간에 비해서는 동작이 뻣뻣했기에 금세 제압되었다.
“엄청나군. 성 밖에 있던 거인도 이것처럼 움직이는 건가?”
“재수 없는 고철들 같으니라고!”
한 기사가 쓰러진 아이언나이트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멀리 날아간 머리통에서는 아직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전 아이언나이트의 정지를 확인 보안 시스템 S22작동-
“아, 아직 작동한다.”
“그 갑옷이 아니야!”
책장의 뒤편, 창틀, 천장, 바닥에서 작은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연구실 내부를 향해 갖가지 마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수십의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다양한 마법이었지만 속성은 화염계열도 통일되어 있었다. 연구실 내부를 거대한 화덕으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강렬한 화염!
“프레임 베일”
“파이어 실드”
마법사들은 재빨리 화염을 방어하는 마법을 사용했지만 마법사들과 멀리 떨어져 있던 일부 기사들과 마법시전이 늦었던 일부 마법사들은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
“제길”
“이래선 남는 게 없잖아......”
마법진이 빛을 잃고 사라지자 살아남은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제자리에 털썩 주저 않았다. 갑작스러운 기습과 함정 때문에 기사 중 일부가 크게 다치고 마법사들이 죽었다. 모두 한곳에 소속된 사람들이 아니라 마법공학의 연구물을 ‘균등’하게 배분받기 위해 서로 다른 영지에서 왔기에 협동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엉망진창이 된 연구실에서 마법사들은 죽은 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검게 그을린 공학물품들을 챙겼다. 비록 연구기록은 없지만 마법공학물품을 챙기면 어느 정도 성과를 챙길 수 있으리라 하지만......검게 그을린 아이언나이트의 머리에서 다시금 불이 들어왔다.
-자폭 준비완료 모든 기록을 소거합니다.-
콰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마야의 연구실이 불길에 휩싸였다. 이 모든 일이 나리아가 오브에 마나를 불어넣고 5분도 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연구실이 파괴되자 침입자들은 그곳을 향해 더 몰려들었다. 그 사이 이리스와 일행들은 대강간의 화로 뒤에 있는 비밀통로를 열고 지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연구실이 근처에 있어서 그런지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진동이 비밀통로위로 그대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성을 벗어나면 호크아이가문으로 이동하지요. 같은 3가문이니 저희를 외면하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대장간이 그녀의 연구실에 너무 가까이 있었다. 마나의 유동을 느낄 마법사들은 다 죽었을 테지만 이 비밀통로에 대해 금방 알아차릴 수도 있다. 그전에 성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야 할 것이다.
비밀통로의 출구는 성 동쪽의 동굴로 이어져 있었다. 성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니 이제 완전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망연자실하게 성을 바라보는 나리아와 달리 이리스는 금빛의 눈에 뜨거운 감정을 담아서 성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가자”
여기서 망설이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설원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날이 밝고 난 후에도 렉스와 벤자민은 각자 이리스와 나리아를 업은 상태로 이동을 계속했다. 중간까지 버티던 이리스도 체력이 부족했기에 지금은 잠들어있었다.
“언제까지 움직일 거야? 너랑 나도 슬슬 휴식이 필요해”
“아직 멀리 가지 못했어. 조금 더 가야.....”
“슬슬 마물의 영역이라고 우리들의 상태도 생각해야해”
“그것도 그렇군. 미안하다. 반나절정도 쉬었다 가지”
두 아가씨 때문에 담담한척했지만 렉스와 벤자민도 슬슬 피곤했다. 두 사람은 아공간 주머니로부터 야영 장비를 꺼내 설치하고 이리스와 나리아를 눕힌 다음 불을 피웠다. 마야가 준비해놓은 아공간 주머니에는 야영장비나 식량뿐만 아니라 보석과 금화도 가득 들어있었다. 직접 새어보지는 않았지만 마법공학이 이윤이 거의 안 남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의 거금이었다.
“너 먼저 쉬어라 내가 너보단 쌩쌩하니까”
“고맙다 벤자민”
야영장비에는 주위에 마물이 오면 울리는 경보장치도 포함되어 있지만 불침번을 두지 않기엔 이곳이 너무 험했다.
다행이 두 사람 모두 휴식을 마치고 이리스와 나리아가 일어날 때까지 적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일주일간 이리스와 일행들은 ‘끝의 산맥’의 경계를 따라 남하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식량이 부족한 터라 식료품을 보충하기 위해 작은 도시로 내려갔다. 아직 북부를 벗어나지 못한 지라 작은 성이라도 성벽이 튼튼하고 경비를 서는 병사들은 군기가 바짝 잡혀있었다.
“아벤자작이 다스리는 성입니다. 노스가드의 가신 가문이지만...... 일단은 성 내로 들어가면 아가씨들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게 주의하십시오.”
“알겠어.”
지금은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다행이도 설원의 추위 때문에 두껍게 껴입는 것이 그다지 수상한 게 아니기에 쉽사리 정체가 들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경비를 서던 기사는 그들을 보고는 두어 번 손을 흔들어주고 성문을 바로 열어주었다.
렉스는 이리스와 나리아를 데리고 식료품점을 찾았다.
“이런 날씨에 손님이라니 어디서 오셨습니까?”
“보존성 좋은 식량을 사고 싶은데”
렉스는 어중간한 대답을 하는 대신 필요로 하는 식료를 구했다. 식료품점 주인도 그냥 호기심에 물어본 것이기에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식료품점을 찾으면서 잠시 돌아다녀 본 결과 이곳에는 아직 노스가드성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정보를 얻으려면 더 큰 성으로 가야겠지만 데리고 있는 두 소녀를 생각하면 바로 호크아이의 성으로 가야한다.
“이곳은 안전한 것 같습니다. 일단 여관을 구하지요”
“으응......”
“이번에는 푹 쉬는 거야?”
“안심하고 푹 쉬길 그동안 저랑 벤자민이 정보를 구해보겠습니다.”
이리스와 나리아는 많이 피곤해 보였다. 몸을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나리아는 설원을 해매는 것조차 고역이었고 일주일동안 혼자만 쉴 수 없다며 불침번을 서기 시작한 이리스도 아직 불침번이라는 일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푹 쉬어도 된다는 렉스의 말에 안도한 기색을 보이며 여관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럼 가볼까?”
“......너는 여기 남아 벤자민”
“응?”
“쉬라는 건 아니야 혹시 모르니까 여길 지키라는 거지”
“그러면 내가 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이리스님과 달리 나리아님은 연약하니까 네가 남아줘야지”
“그건 그렇지 그래 네가 가라”
고집을 부리면서 강한 척하는 게 딱 느껴지는 이리스와 달리 나리아는 심하게 위축되어 있었고 그런 그녀의 호위로서 결국 벤자민은 렉스의 말대로 여관에 남았다.
마탑도 없고 용병길드도 없는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어디로 가서 정보를 모으는 게 좋을까? 주점? 이런 작은 시골주점에서 나누는 이야기라고는 기껏해야 내가 사슴을 잡았다든가 오우거만한 곰을 봤다는 둥 자신의 경험담밖에 없다. 결국 제대로 된 정보를 구하려면 영주의 관으로 가야 한다.
아직 자신들을 찾는 추적자가 없는 걸 보면 이런 변방 영지는 안전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렉스는 이리스에 대한 이야기는 이곳의 영주에게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일이지?”
내성으로 접근하자 문을 지키는 전사가 말을 걸어왔다. 렉스는 검을 뽑아서 노스가드의 정예를 뜻하는 ‘서리늑대’의 문양을 보여주었다.
“노스가드의 전사 렉스라고 합니다. 아벤 자작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하늘빛 털을 가진 늑대의 문양을 유심히 살펴본 사내는 흔쾌히 허락했다. 동부 원정이 있을 때나 가끔씩 들리는 노스가드후작이 전령을 보내는 건 의외지만 그에게 별다른 의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후작님께서 연락을 해오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자작님도 좋아하실 걸세 잠시만 기다리게”
전령을 보낸 것이라고 착각하는 걸 보면 정말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한 것 같지만 렉스는 일단 아벤자작을 만나기로 했다.
“아벤자작님을 뵙습니다. 저는 노스가드의 서리늑대 렉스라고 합니다.”
“반갑네! 그래 후작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임무를 내리시려는 건가? 아니 아니지 내가 너무 성급해군! 날씨도 추웠을 텐데 술이나 한잔 받게!”
아벤자작은 호탕하게 말했다. 노스가드성의 일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후작님의 명령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일인가? 설마 후작부인께서 날 찾았을 리는 없을 테고”
“...지금 노스가드 성에 어떤 일이 있는지 전혀 모르시는 겁니까?”
아벤자작의 안색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북부 원정 시기일 텐데 성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겐가?”
“각지의 영주들이 담합해서 노스가드성을 공격했습니다. 저는 그 와중에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렉스는 이리스와 나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 모든 사실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말이 끝날 때까지 잠잠히 들어주고 있던 아벤자작은 렉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각지의 귀족들이 노스가드성을 노렸다니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들!”
“진정하십시오. 아직 정황을 완전히 파악한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왕실과 3가문을 갈라놓으려는 어떤 비밀조직의 수작일지도 모르지요.”
“그래 그것도 그렇군. 설마 왕실에서 노스가드를 배신할리 없지 하지만 상황이 너무 교묘하군. 하필이면 후작님이 북부원정을 가는 지금에”
신빙성이 아예 없는 가설은 아니지만 그랬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바램이었다.
똑 똑
“자작님 왕실에서 보낸 사자가 왔습니다.”
“왕실에서? 일단 모셔오게”
방금 렉스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라 찝찝하기 그지없지만 그럴수록 더 진실을 확인해야 한다.
“제가 여기 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어차피 이런 변방이 전사들은 누가 누구인지 왕실의 사람이 알리도 없다. 왕실에서 온 사자는 렉스를 흘끗 보고는 아벤자작을 향해 말했다.
“아벤자작은 명을 받들라”
칙령을 전하는 왕실의 사자는 왕과 동급, 아벤자작은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얼마 전 왕실은 노스가드후작가문이 반역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귀족들을 동원해서 노스가드를 조사하게 시켰다.”
무릎을 꿇고 있는 아벤자작의 얼굴을 크게 일그러졌다. 평소 이런 변방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왕실의 사자가 와서 떠들어대는 소리와 수백 년에 걸쳐 충성을 맹세한 노스가드 가문의 이야기, 어느 것이 옭은 지는 고민할 필요는 없다.
“간악하게도 노스가드후작은 전사들을 크게 늘리고 마법공학으로 만들어낸 병기로 왕성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리 알아차리고 막을 수 있었지만 후작의 두 딸인 이리스 노스가드와 나리아 노스가드가 도망쳤다. 지금 당장 병력을 차출해서 이 간악한 반역자의 자식들을 추적하라”
“신 오베른 아벤 명을 받들겠습니다.”
왕실의 사자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사족을 달았다.
“크흠 하나 추가로 말해두자면 자네를 포함한 북부 영주들에게는 반역에 가담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혐의가 있네. 그 점 명심해두도록”
“헌데......노스가드 후작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반역자 크로드 노스가드는 북쪽으로 도망쳤지만 왕실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지 처형되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난 다른 영지도 가야해서 이만 가보도록하지 아! 관할 마을과 성에 이 수배서를 붙여 두도록 하게”
사자가 건넨 수배서에는 이리스와 나리아의 얼굴과 각각 3만 골드의 현상금이 붙어있었다. 그래도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저만한 거금을 붙였다는 것은 노스가드라는 이름을 이 땅에서 지우겠다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아벤자작은 사자가 나가자 마자 수배서를 북북 찢어버렸다.
“......이것들 전부 불태워 버리게”
“하지만 자작님 그랬다간...”
“하! 곰이 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있네! 노스가드가문이 이 땅을 지켜온 시간이 얼마인데 저런 헛소리를 듣고 있느니 차라리 얼른 죽어서 후작님 곁으로 가겠네. 자네는......여길 벗어나는 게 좋겠군. 내 생각에는 바다 건너 서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게야”
“명심하겠습니다.”
렉스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노스가드가 반역이라니! 이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저 말대로라면 호크아이 가문으로 가더라도 도움을 받기는 힘들 것이다. 거기다가 노스가드 후작이 죽었다는 이야기만큼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크로드 본인도 이미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고 당장 아내인 마야를 포함해서 서리늑대라고 하면 북부에서도 알아주는 강자다.
“진실은 밝혀지게 되어있지 난 노스가드의 가신으로서 절대 이 사태를 좌시하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렉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관으로 돌아갔다. 밖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아니 밖의 소식을 들었기에 그의 마음은 한 층 더 무거워졌다. 한겨울이라 그런지 여관에는 벤자민을 제외한 손님은 없었고 여관주인도 다른 볼일이 있는지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이리스님과 나리아님은?”
“아직 자는 중이야”
렉스는 벤자민에게 왕실의 사자가 한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래서 지금 아가씨들을 찾는 것 같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반역이라고 누명을 뒤집어 쓴 이상. 아벤자작이 말한 대로 바다를 건너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셀도란왕국까지만 가도 확실히 안전할 테니까 하지만 그건 아가씨들이 동의할 것 같지는 않고......”
말을 받는 벤자민의 얼굴도 절망적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마 자신도 그런 얼굴이겠지 하지만 이윽고 벤자민은 하지만 잠깐 고심하던 그는 무언가 깨달을 것처럼 작게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여관 주인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지금 여기에 엔코니상단이 와 있다는 모양이야 상단에 끼어들면 남쪽까지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엔코니상단이라......”
엔코니상단은 노스가드와 제법 연이 깊은 상단이다. 마수가죽과 식량을 다루기도 하고 마야의 마법공학 물품을 수도에 가장 먼저 선보인 상단이기도 하다. 다른 상단 보다야 충분히 믿을 만한 곳이다. 거기다 이런 상황에도 여기에 있는 걸 보면 아직 노스가드의 일에 대한건 잘 모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공간 주머니에 염색약도 있었지”
마치 마야가 이런 일을 예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많은 물건이 아공간에 저장되어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이틀 후에 내려간다니까 내일 가서 말을 걸어보자고”
“그게 좋겠군. 그런데......아가씨께 후작님의 소식을 전해드려야 할지 모르겠어......”
지금 당장은 거기까지 생각이 안가는 모양이지만 후작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 이리스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도 언젠간 이 이야기를 듣게 될 테고 바다를 건널 때쯤이 된다면 숨길 수는 없을 리라
벤자민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금 억지스러운 느낌이 있었지만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렉스는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말할 필요 없어. 지금도 힘들어하는 게 보이는데 더 이상 나쁜 소식을 들었다간 못 견딜 거야”
“하지만 상인들과 동행하다보면 속일 수 없을 거야”
“마님께서 후작님과 빠져나왔고 도는 소문은 그걸 숨기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얼버무리면 될 거야 어차피 처형했다는 것도 그 왕실의 사자가 떠들어댄 이야기뿐이고 실제로 후작님이 돌아가셨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잖아? 노스가드의 가신가문을 흔들려는 수작일수도 있다고”
“아......”
“그렇지? 좀 차분하게 생각해보라고 렉스”
벤자민의 말대로다. 자신이 알고 있는 후작과 후작부인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성이 공격받은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이런 변방까지 이야기가 돈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 후작을 잡지 못했다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하지만 후작님이 살아있다고 해도 어디에 계신지 모르면 우리가 합류할 방법이 없으니까 역시 사건이 해결될 동안은 호크아이가문으로 가서 몸을 의탁하는 게 낮겠지 셀도란 까지 가는 건 아닌 것 같아”
만약 왕실에서 노스가드에 반역죄를 뒤집어씌우고 몰살하려고 했다면 당연히 항구 쪽의 경비도 허술하지는 않을 것이다. 벤자민과 대화를 마친 렉스는 셀도란으로 가는 걸 포기하고 호크아이 가문으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어. 고맙다.”
“뭘 이정도 가지고 먼저 올라가 보라고 난 이거 다 마시고 올라갈 테니까”
벤자민은 테이블에 놓인 술병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그럼 먼저 올라가서 쉴게”
렉스가 올라가자 미소를 띠고 있던 벤자민은 얼굴을 굳혔다. 저 순진한 친구에게는 말해주지 않은 사실이 있다. 노스가드성이 습격을 받은 건 북부원정 5일후 만약 성의 습격과 동시에 북부원정대에 대한 공격이 벌어졌다면 시간은 충분했다. 그리고 사자의 방문도 마찬가지다. 북부에서 남부로 한 번에 쑥 이동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리스와 나리아를 잡으려면 북부부터 사자를 보내지 않겠는가?
오히려 사자가 지금 이 순간에 방문했다는 사실은 이 사건이 주변영지들이 꾸민 일방적인 암계가 아니라 왕실도 사건에 관여하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렉스는 그런 부분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괜히 말해줘서 분위기를 망칠 필요는 없겠지
“믿을 건 호크아이가문밖에 없군.”
왕실이나 다른 귀족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로드러너가문에서 북쪽으로 영역을 개척하는 중이지만 노스가드 성과는 거리가 멀고 가신가문을 제외하면 도망칠 곳은 처음부터 호크아이후작가 뿐이다.
“뭐 정 안되면 산맥이라도 넘지”
후작부인도 ‘끝의 산맥’ 너머에 있는 아케니아라는 나라에서 산맥을 넘어 메이트라왕국으로 왔다는 데 자신도 못할 것은 없지 않은가? 오히려 다른 이들이 예측하지 못할 해결책으로는 제격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