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아오자 니케와 렉스는 성을 벗어났다. 목표는 로드러너가문 태생이 탐험가인 그들은 항상 많은 용병들을 필요로 하기에 정체를 감추기 제격일 것이다.
“이젠 어떻게 할 셈이지? 설마 평생 용병을 한다는 말은 안 할 테고”
“분명 가문의 일은 이렇게 끝나지 않을 겁니다. 가신가문들도 이 사건에 관여할 테고 큰 싸움이 일어나겠지요. 저는 살아남은 전사들을 흡수해서 용병대를 만들겠습니다.”
그녀가 나름 미래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자 렉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둘은 그렇게 동쪽을 향했다.
“얼마 전까지는 여기 있었던 것 같군.”
한 사내가 모닥불의 잔재를 손으로 만지며 말했다. 손에 검댕이가 묻어나왔지만 모닥불은 완전히 식어있었다. 못해도 1시간 전에는 여기를 떠났으리라
“지금 우리가 쫒고 있는 흔적이 확실한 건가? 나중에 다른 사람이 나오면 곤란해”
“확실해 이 시기가 마물이 적긴 하지만 너무 추워서 여행자가 많지는 않다고 그리고 용병 길드장도 말했잖아? 렉스와 니케가 동쪽을 향해 떠났다고 말이야”
“그래......”
“아무것도 모르면 잠자코 따라오라고 빈털터리 상인양반”
“크윽”
추적자들은 엔코니상단의 멜빈과 그의 마차를 호위하던 용병들이었다.
절벽 아래로 추락한 두 사람의 시체라도 건져보려 했지만 절벽아래는 급류가 흐르는 계곡이 있어서 옷 쪼가리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 그들을 추적할 때 버려둔 마차는 도적 때라도 만났는지 텅 비어있었고 이대로 돌아가면 지점장은커녕 현재 위치도 유지하지 못할 상황이라 추가로 5천골드를 약속하고 추적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제길 그년 혼자면 적자로군.’
추적할 당시 용병대장이 쓰게 한 계약서에는 착수금과 별개로 현상금의 일부를 나누는 대신 마차의 짐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죽고 나서 한 사람만 남았다는 이야기를 전하면 지점장 자리는 어떻게는 될지도 모르지만 이번 상행은 적자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아마 이 길로 이동했다면 네스트로 향하고 있겠군.”
네스트는 로드러너의 개척영지중 하나로 용병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들이 거기까지 간다면 앞으로 추적하기 제법 힘들어질 것이다.
멜빈은 초조하다는 듯이 용병대장에게 말을 걸었다.
“더 빨리 갈수는 없나?”
“지금도 충분히 빨라 애초에 그놈들은 우리가 쫒아오는지도 모르고 있을 테니까”
용병들은 모닥불이 있던 자리에 다시 불을 피우고 저녁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친 용병들은 천막으로 들어갔고 일부만 남아 불침번을 섰다. 달이 세 개나 뜬 밝은 밤이기에 불침번을 서는 용병의 수는 많지 않았다.
그들의 야영지로 불청객이 찾아왔다.
“저들은 너의 정체를 알고 있지 모두 죽여야 한다.”
“알겠습니다.”
불청객의 정체는 당연히 니케와 렉스였다. 두 사람이 용병등록을 마치자마자 도시를 떠난 것도 길드장에게 행선지를 알려둔 것도 모두 저들을 유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저들이라면 분명 자신을 쫒아 오리라고 예상했지만 무리의 수가 그대로인 것을 보면 다른 이에게는 알리지 않은 것 같다. 하긴 상금을 나누기 아까웠겠지
“저들의 수는 대략 오십 명 상단의 잡역부가 스물 정도고 나머지는 용병들이지 널 지킬 필요가 없다면 나 혼자서도 처리 가능한 병력이다. 물론 너 혼자서도 할 수 있겠지”
오러를 다루는 기사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아직 살인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라면 망설일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망설일 정도면 복수는 포기해야 하리라
렉스가 그녀를 떠밀기 전에 니케가 먼저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벌써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없어질 리는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복수할 의무가 있다. 절벽 아래로 떨어져죽은 나리아와 벤자민에 대한 복수!
“야 심심한데 카드게임이나 하자”
“경계는 어쩌고?”
“불을 피워놨는데 들짐승이 오겠어?”
그들은 희희낙락하며 카드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야 그건 그렇고 그 멜빈이라는 돼지 참 멍청하지 않냐? 마차에 있던 물건을 빼돌린 줄도 모르고 징징거리는 꼴이란”
“야! 우리 물주님께 무슨 막말을 적어도 지금은 동업자 아냐?”
“동업자는 무슨...그 빌어먹을 년도 잡고 빨리 동굴에 숨겨놓은 물건도 회수해야하는데......”
말하는 꼴을 보니 마차에 있던 짐들은 용병이 빼돌린 것 같았다.
니케는 카드게임에서 돈을 잃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사내의 뒤를 밟았다.
“제길 거기서 한 번만 참았으면...커헉”
밤에 녹아들 것 같은 검은 오러가 사내의 등을 꿰뚫었다. 그의 단말마를 들은 용병들은 카드를 내던지고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아까 바크가 간 방향 쪽이야”
“제길 이번 판은 다 이긴 건데”
니케는 가볍게 혀를 찼다. 깔끔하게 처리하려면 목을 쳤어야했다. 그녀는 암습을 포기하고 정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냐!”
그들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니케를 단번에 알아보지는 못했다. 그녀는 그들이 무어라 더 중얼거리기 전에 검을 휘둘렀다.
“적이다 일어나!”
그래도 나름 오랫동안 용병생활을 해온 덕인지 니케가 다섯 명 째 용병을 쓰러뜨릴 때쯤에는 자고 있던 용병들이 전부 일어나서 그녀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도망친 년이 제 발로 돌아왔군. 둘러싸”
하지만 니케를 막아서는 이들 모두 그녀의 일격을 버티지 못했다. 질척질척한 빨강이 그녀를 물들인다. 복수란 이런 것이라고 더 많은 이들에게 이 감정을 토해내라고 칙칙하고 불쾌한 감정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녀의 난폭한 기세에 용병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저, 저년 오러를 쓰잖아! 거리를 벌려!”
뒤편에 있던 용병들이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수십 발의 화살이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몇 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사되거나 같은 편을 맞췄다. 니케는 서리갑옷을 둘러서 화살을 막아냈다.
“화, 화살이 통하지 않아!”
경악하는 용병들의 생각과 달리 니케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냉기의 오러를 제대로 써보는 게 처음이다 보니 힘 조절이 서툴렀고 아직 서리늑대의 검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기에 화살촉의 일부분이 얼음갑옷과 가죽옷을 뚫고 그녀의 살결을 파고들었다.
“으아아악”
니케는 손을 휘저어서 몸에 박힌 화살을 치워버렸다. 화살이 빠진 자리에서 피가 새어나오자 용병들은 자신의 생각처럼 그녀가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니케의 기세가 한 풀 꺾이자 용병들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접근해왔다.
“쫄지마! 저 놈도 사람이야 오러를 써도 칼은 박혀!”
“자, 잠깐 멈춰! 저년이 후작의 딸이라고!”
“알고있어!”
서걱
갑자기 끼어든 멜빈 때문에 용병이 당황하는 사이 니케는 검을 휘두르며 용병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씨발 그냥 죽여!”
“멍청한 놈들 어딜 쏘는 거야”
니케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자 활을 들고 있던 이들은 그녀를 조준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하지만 난전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그녀의 몸에는 상처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주, 죽이면 안 돼! 저년 죽으면 현상금을 1만 골드 밖에 못 챙긴다고!”
“병신이 지금 동료가 몇 명이나 죽었는데 현상금타령이야”
적당히 죽었으면 돈을 배분할 사람이 줄어드니까 좋았지만 니케가 죽인 인원이 너무 많아서 다음에 의뢰를 받을 때 지장이 생길 정도였다.
“으으......”
의식이 몽롱해진다. 그녀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찢어진 옷 틈으로 흘러들어오는 냉기가 혈관에 스며들어 자신을 점점 죽여 가는 것 같았다.
이대로 여기서 끝?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문과, 부모와 동생도 잃어버리고 여기서 끝? 이렇게......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진득한 살기가 물씬 뿜어져 나왔다. 용핵이 격렬한 감정에 맞춰서 박동하는 게 느껴졌다. 묵직한 기운이 주변을 장악하자 용병들은 자신도 모르게 겁먹은 것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크악”
고통스러운 함성을 지르며 니케는 검을 휘둘렀다. 용병들은 용케도 검의 사거리에서 벗어나는가 싶었지만 그녀의 장검에는 검신보다 길게 솟아난 오러가 기어코 용병들의 몸통을 두 동강냈다,
“그냥 쏴버려!”
용병대장이 이를 악물고 지시하자 허둥지둥 거리던 용병들이 그녀를 향해 일제히 화살을 당겼다.
“회귀의 검-역행-”
검에 마나를 담아 화살을 후려칠 때마다 화살은 부러지지도 않고 기이하게 틀어지며 다시금 쏘아진 것처럼 튕겨져 나갔다.
실전에서는 처음 써보는 기술인데도 그녀가 튕겨낸 화살은 전부 화살을 쏜 용병들에게 되돌아갔다.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맺혀있었지만 용케도 도망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괴, 괴물 같으니라고 동료의 복수다.”
복수라......누가 누구에게 해야 하는 걸까? 아니 복수란 게 저런 감정이겠지 옳고 그름은 뒤로 치워두고 감정에 몸을 내맡기는 것 그녀도 자신이 해야 할 복수가 있지 않은가?
“전부 죽어버려!”
그녀는 다시 용병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금 복수밖에 남지 않았다. 악귀처럼 날뛰는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용병대장도 죽은 지 오래였고 살아남은 용병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쳤다.
“으으......”
“동생의 복수를 하러 왔어”
모락모락 따뜻한 김이 나던 시체들도 노스가드의 추위아래 금세 식어버렸고 그녀의 몸에 달라붙은 핏물과 살점조각도 손으로 털어내자 부슬부슬 바닥을 떨어졌다. 그녀는 도망치는 용병들을 쫒아가지 않고 멜빈을 붙잡았다.
“엔코니상단은 왜 노스가드를 배신했지?”
“그, 그건......”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까 알아두어야 했다.
“그, 그건 나도 잘 몰라 나, 나는 그저 너희들을 잡으면 포상을 받는다고 해서......”
“말해”
“그, 그러니까 나는...”
“말하라고”
니케는 멜빈을 짓밟기 시작했다.
“말해! 말해! 말하라고!”
불같이 화를 내던 니케는 갑자기 멜빈 위로 쓰러졌다. 겁에 질린 체 그녀의 발길질을 견뎌내던 멜빈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니케는 일어서지 않았다. 그녀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주, 죽었나?"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도망치거나 죽었다. 이곳에 남은 건 자신뿐 그는 누워있는 니케를 발로 툭 건드려 보았다. 그녀는 마치 시체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휴 살았다.”
몫을 나눌 용병들이 없다면 적자는 겨우 면할 것 같았다. 그는 니케의 얼굴을 덮고 있던 천을 벗겨냈다. 흉측한 화상자국이 보이자 멜빈은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제길 정체를 감추려고 별짓을 다했군.”
이 상태라면 그녀가 이리스 노스가드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힘들 것 같지만 염색약을 벗겨내고 마탑에서 만드는 화상치료제를 사용하거나 신전에서 치료하면 이정도 흉터쯤 얼마든지 지워버릴 수 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우선 그녀를 챙겨서 마을로 돌아가려는 찰나 그의 뒤쪽에서 싸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직 무리였나?”
“히익!”
“용케도 살아있었군 멜빈”
“다, 다가오지마 다가오면 이년의 목숨은......”
“죽었다면 별 수 없지”
“아, 아직은 살아있어! 아직은 말이야 바로 치료한다면 살아날 수 있지”
미약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보였다. 멜빈의 말대로 치료만 잘 한다면 다시 살아날 것이다.
“지금 도시로 돌아가다 보면 늦을 거다! 하지만 내 아공간 주머니에 포션이 있지 날 살려주면 포션을 넘겨주겠다. 날 죽일 생각은 하지마라! 이건 주인이 아니면 열리지 않으니까”
“흠......”
렉스는 고심하는 척 하다가 순간적으로 검을 집어던졌다. 빛살처럼 뻗어나간 검은 멜빈의 복부를 관통했다.
“어, 어째서...”
“포션이라면 나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아는 널 살려둘 수는 없지”
그는 지금 야영지를 벗어나는 용병들과 상단의 짐꾼들을 처리하고 오는 길이다. 이자만 죽는다면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릴 사람은 없으리라
렉스는 검을 회수한 후에 니케를 치료했다. 아공간에 들어있던 포션을 전부 사용하고 나서야 그녀의 전신에 난 상처를 매울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가씨는 지금보다 더 강해지셔야 합니다. 후작님보다도 더”
수배서를 봤기에 렉스는 저들이 그녀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조금 만 더 늦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지......
그녀의 재능은 충분하다. 그녀에게 필요한건 오직 시간뿐
렉스는 그녀를 업고 다시 그 도시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