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속에서라도, 그대의 뒷모습만이라도 보고 싶습니다.'
"아가씨, 인기 많아지셨네요."
셀리, 그거 놀리는 거지? 하얀색 히아신스는 분명 아름다웠다. 그게 그녀의 기분까지 영향을 미치진 못한 모양이었다. 돌링 경기 이후로, 그녀에게 구애하는 편지가 많이 오기 시작했다. 비싼 선물도 가끔 오는데, 부담스러움이 날로 더해갔다. 선물 대부분은 돌려보내거나 그도 모르면 현금으로 바꾸어 자선 사업에 기부했다. 현금으로도 쳐주지 않는 꽃선물은 별로였지만, 꽃이 무슨 잘못이랴. 히아신스는 그녀가 좋아하는 꽃이기도 했다.
"아가씨, 장식해둘까요?"
"그래주겠니? 히아신스는 좋아하니까. 게다가 이 편지, 몇 번째 오는 거라 기특하기도 하고."
"그런가요? 저는 그게 그거 같아요."
보라색 리본에 히아신스 향이 배어 있었다. 소박하고 단순한 소재라 마음에 들었다. 헤일린이 수많은 선물 중에 이 리본을 기억하고 있는 건 그런 이유였다. 셀리가 급히 장식하는 동안, 헤일린은 갈색 코트를 걸쳤다. 짧게 잘려진 히아신스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헤일린은 머플러 대신 꽃을 주워들었다.
"아가씨?"
"제국이 생각나는구나, 셀리. 히아신스는 제국의 제2의 국화이기도 하지."
"그렇습니까? 아가씨께 잘 어울려요."
헤일린은 작게 웃으며 히아신스를 부토니에르처럼 장식했다. 남성도 아닌 여성이 이리 장식하니 꽤 우스웠다. 셀리는 특이한 걸 좋아하는 헤일린을 보며 여전하다 싶은 표정이었다.
"이 정도면 보낸 이도 좋아하지 않을까?"
"네네, 마음대로 하세요. 아가씨의 아이디어는 언제나 예상 밖이라니까요."
헤일린은 그런 셀리의 말에도 꿋꿋히 모자까지 썼다. 살짝 보이는 미소는 장난꾸러기 같아서, 셀리도 따라 웃었다. 아가씨가 좋다면, 저도 좋아요. 셀리는 그녀의 가방을 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9. Wine day
플렌도트 사거리, 우체국에 도착한 헤일린은 작은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아무래도 보안이 더 철저하다보니, 찾는 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공공기관치고 고급스런 차도 나왔다. 셀리가 좋아하는 쿠키가 나오자, 헤일린은 셀리에게 쿠키를 양보했다.
"특별 수송에 한해 서비스가 좋은 모양이네요, 아가씨."
"천천히 먹으렴. 체할라."
"다 제 거니까 손대지 마셔요!"
"알았다, 알았어."
헤일린은 은화 6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직원은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라이다'라는 분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아는 분 맞으십니까?"
"라이다가요?"
"네. 모르는 분이시라면 당장 경비원을 불러 단속하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들여보내주세요."
응접실의 문이 열리자, 남자가 들어섰다. 구불거리는 회남색 머리칼을 가진 청년이었다. 직원은 공손하게 상자를 놓아두고 차를 더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손님의 일행인 것을 알자 급격하게 공손해졌다. 남자는 직원을 째려보다가 헤일린을 바라보았다.
"선배, 오랜만입니다."
"라이다!"
헤일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라이다는 그녀의 후배로, 베니슬린 교수를 같이 도왔던 이였다. 차가운 분위기를 가졌지만, 실상 사람을 사귐에 있어 미숙할 뿐이었다. 헤일린은 그의 성실함을 매우 좋아했다.
"머리카락 색, 역시 선배에게 잘 어울립니다."
"네 덕분에 베니 교수님한테서 얻을 수 있었어. 오늘 너도 올 줄 알았다면 선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아닙니다. 오늘은 교수님께서 잠시 가보라하셔서 온 겁니다."
"베니 교수님이?"
라이다는 상자를 뜯어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그 뒤로 셀리가 보이자, 헤일린에게 물었다.
"저 여자는 믿을만한 사람입니까?"
"응. 셀리는 믿어도 괜찮은 사람이야."
"그럼 상관없습니다. 셀리 씨, 이 선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라이다는 셀리에게 존대했다. 하지만 귀족은 타고난 지배자였다. 셀리는 그가 귀족임을 알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뒤를 돌아 귀를 막았다. 라이다는 조금 편해진 표정으로 그녀의 소매를 걷어내었다. 작은 캡슐 같은 것을 꺼낸 그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로제 페르나'
알약에 작게 적혀진 글씨를 읽었다. 로제 페르나라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검술 수업을 우연치 않게 견학하게 되었는데, 그 때 검술천재라는 로제 페르나를 처음 보았었다. 검술에 한해서만 통용되는 이가 아니었다. 체술과 사격에도 재능이 있어 교수들은 침이 마르도록 그녀를 칭찬했다. '그 사고'만 아니었더라면, 제국의 인재가 되어 지금쯤 벌써 군부에 있었을지도 몰랐다. 꽃 피우지 못한 영혼이 편히 잠들기나 했을까. 14살의 헤일린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아, 찾았다. 조금 아플 겁니다, 선배."
그가 매우 작은 총을 들고 왔다. 캡슐을 넣고 그녀의 팔에 쏘자, 캡슐이 그녀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아팠다! 진짜 아팠다! 라이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 연고를 발라주었다.
"로제 페르나. 그렇게 대답하시면 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누군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라이다가 가르쳐준대로 '로제 페르나'라고 대답하자, 곧 승인되었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라이다는 그녀의 팔에 손을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팔이 빠른 속도로 낫기 시작했다.
"네 치유마법, 언제봐도 대단해."
"특화되어있어도 불편하다고요, 선배. 다른 마법은 잘 못 쓰니까요."
"그러려나. 그 캡슐은 뭐였어?"
"아, 이 총도 같이 받으십시오."
설명하기 전에, 라이다는 먼저 총을 주었다. 호신용 공기총과 흡사했는데, 가스가 농축되어 있는 통도 동봉되어 있지 않았다. 탄이 들어가는 구조도 아니어서, 헤일린은 이게 무엇인가 살펴보았다.
"교수님은 늘 선배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결혼도 안 한 주제에 이미 딸바보라니까요. 그 총과 캡슐의 사용법은 위급할 때 알 수 있을 겁니다. 일단 그 캡슐이 '최신 경비 시스템'이라고만 알아두세요."
"응, 알겠어. 라이다, 와줘서 고마워. 네게 인사도 못 하고 떠나서 마음에 걸렸어."
"제게 굳이 인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배. 아, 선배는 '로제 페르나'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르시죠?"
"뭐 그렇지."
"그 캡슐의 이름이 '로제 페르나'이니 알아두면 좋을 겁니다, 선배. 전 비행선을 미리 예약해놔서 가봐야합니다. 제국에 오실 때 미리 이야기해주시면 마중나올게요."
"그래, 조심히 가렴."
라이다는 베니슬린 교수의 조수였다. 헤일린이 직접 가르쳤기 때문에, 그에게 애정이 많았다. 라이다야 원래 공부나 일에 충실한 편이라, 헤일린은 그를 매정하다 욕하지 않았다. 라이다는 헤일린의 마중을 받고 비행장으로 향했다. 셀리는 받은 것이 무엇이냐 물었지만, 뚜렷하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경비 시스템이라네. 지금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걱정되신 거겠지."
"좋은 분이시네요. 어, 저기 아가씨께서 아는 분 맞으시죠?"
셀리가 대답하다말고 손가락으로 건너편을 가르켰다. 과연, 리첸이 부하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리첸은 지척에 있는 마차로 들어가더니 잠시동안 나오지 않았다. 헤일린은 그에게 인사를 해야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도로에서 쓰러지는 아이를 보았다. 말이 놀라 앞으로 가면서 몸을 살짝 들었다. 마차가 움직이는 바람에 리첸도 급히 나왔다. 아이는 말굽에 몸을 부딪힐 뻔했으나, 다행히 어른이 나서서 아이를 구해냈다.
"괜찮으냐! 정신차려라!"
리첸의 부하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기사들이 검을 들고 에워싸자 아이가 두려움에 떨었다. 헤일린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기사들이 검을 드니 다른 마차들도 옆길로 갔다. 사람들은 슬슬 시선을 피하며 제 갈길을 갔다. 허름한 옷차림의 사내는 아이를 안고 기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왔는데 마굿간이 전부 불타있었답니다."
"넌 뭐야!"
기사 중 한 명이 그녀에게 소리쳤지만, 그녀는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리첸은 흑안을 보고 헤일린이 맞음을 알자, 안색이 창백해졌다.
"마굿간지기는 번명할 틈도 없이 두려움에 떨었지요. 그런데 주인은 그를 보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끼어들지말고 꺼져! 어딜 감히 나서는 건가!"
"자네나 조용히 해."
마차 안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사는 주인의 명을 받들었다. 리첸은 생각치 못한 반응에 흥미로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헤일린은 유려한 미소를 지으며 남성에게 말했다.
"사람은 다쳤느냐?"
"!"
아니, 남성에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쓰러진 아이가 다칠 뻔했는데도 검을 들이댄 기사들에게 말한 것이었다. 간접적인 지적에 기사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헤일린은 기사 한 명을 살짝 밀고 아이와 사내 앞에 섰다. 셀리도 재빨리 따라와 아이를 살폈다.
"아가씨, 아이의 팔이 부러진 것 같습니다. 멍도 심하게 들었어요."
"그는 극적인 이상주의자였고,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보기 어려웠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제자를 배출해내었죠. 그는 영웅은 아니었지만 존경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 일부에 불과합니다."
"'논어'로군. 여성이 논어를 알다니 희귀한 일이다."
그의 대답이 두번이나 들려오자, 기사들은 예를 갖추어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헤일린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리첸은 그녀에게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네 이름은 뭐지?"
초면에 반말인데도, 그녀는 그걸 따져묻지 않았다. 마차의 주인에겐 그게 당연하다는 식이었다. 왕실의 분인걸까? 헤일린은 긴장한 마음을 풀지 않았다.
"헤일린 페리헬이라고 합니다. 이 무례를 용서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좋다. 마하드리첸, 난 이만 가보겠다."
"살펴가십시오."
마차는 그들을 지나갔다. 그제야 긴장을 푼 헤일린이 리첸에게 인사했다.
"경께도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너 말이야, 너무 딱딱한 거 알아? 그렇게 미안하면 소원 한 개라도 들어주든지."
"네? 들어줄 수 있는 범위라면야."
리첸은 짖궂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친근하게 대하는 리첸 때문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아까는 그렇게 기사답더니, 지금은 그냥 장난꾸러기였다. 사실 리첸은 안심하고 있었다. 이 순간의 무지는 죄가 아니었다. 리첸이 예를 갖추는 이가 친제국파의 대표 인물 중 하나라는 걸 헤일린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