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고 자고 일어나니 대충 로그인 가능 시간까지 열 시간 정도 남았다. 나는 미리 패치 전에 어떤 것을 패치 했는지 미리 알려주는 핵사 공식 사이트에 들어가 패치 내역을 살펴보았다. 패치 내용은 주로 중앙 대륙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데, 핵사 내 세계지도를 중심으로 제일 서쪽에 시작의 섬, 그리고 시작의 섬에서 배를 타면 나오는 세 왕국, 미크론 왕국, 스콜 왕국, 놉 왕국. 이 세 왕국의 영토는 가장 북쪽이 놉 왕국, 가운데가 스콜 왕국, 그리고 남쪽이 미크론 왕국이었다. 세 왕국 아무데서나 서쪽으로 쭉 가면 세 나라의 국경지대가 나온다. 일종의 공동경비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을 지나면 투명한 막이 쳐지며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메시지가 뜨는데, 이 벽을 해제하고 중앙 대륙의 던전을 더 오픈하는 것이 이번 패치의 목적이었다. 또한 이번 패치내역에는 중앙지역 개방과 더불어 커뮤니티 사이트를 달아오르게 하는 내역이 있었다. 바로 ‘시작의 섬 투기장’이었다. 시작의 섬 투기장은 시작의 섬 졸업 레벨이라고 할 수 있는 45~50의 유저들을 위한 이벤트로, 누구나 참가할 수 있고, 예선을 거쳐 32강에 진입하게 되면 배팅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우승자에게는 엄청난 상금과 경품을 준다는 말도 덧붙어서 써져 있었다. 핵사 커뮤니티 사이트는 이 패치내역으로 그야말로 엄청난 접속 수를 자랑했다.
- 중앙대륙 오픈하면 고레벨 던전 더 많이 생기는 건가?
- 그렇겠지. 지금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모르지만 랭커들은 던전이 없어서 맨날 같은 던전만 돈다는데, 이 기회로 랭커들 다 빠져나가면 전체적으로 사냥하기 편해질 듯.
- 맞아 지금 솔직히 대륙으로 넘어오면 사냥터 싸움 박 터짐. 어제도 사냥터 자리 문제 때문에 싸우는 것만 한 5번은 본 거 같음.
- 미크론 왕국이라 그러지 않냐. 놉 왕국은 그래도 할 만하던데, 살기 좋은 놉 왕국으로 오세요. 여러분!
- 미쳤냐. 놉 왕국 오지게 춥고 지형도 험한데다가 몬스터 레벨도 다 높아서 갓 넘어온 애들 거기가면 게임 접음. 사냥터 싸움 박 터져도 미크론이 낫지
- 근데 저 시작의 섬 투기장도 재밌을 거 같지 않냐? 솔직히 45~50 올리기가 제일 고비인데 투기장 들어가면 할 만할 듯.
- 우승 상품 뭘까?
- 엄청나다고 하는 거 보니까 전설 급이나 유일 급 아이템 하나 줄 듯.
- 하긴 처음이니까 그 정도는 써야 사람들이 몰리지 않을까?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도 뭔가 쓸 까하다가 그냥 다시 침대에 누웠다. ‘시작의 섬 투기장’은 확실히 가볼만 한 것 같다. 일단 피지컬이 되니까, 우승 정도는 할 자신이 있었다. 다시 잠깐 눈을 붙인 나는 밥을 배불리 먹고 화장실도 미리 다녀왔다. 게임 하기 전 게임을 로그아웃 할 수밖에 없는 공복과 변의, 졸음 등을 이겨내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아직 1시간이나 남아서, 커뮤니티에 ‘레드 서클’을 검색했다. 그러자 게시물이 주르륵 나왔고, 나는 그 중 추천수가 제일 많은 글을 클릭했다. 제목이 ‘레드 서클 사건 정리’였다.
-레드 서클 길마 두 명 인건 알지? 블랙선하고 민리. 그중에 민리가 길드 원들하고 던전 돌면 다들 자기 장비보다 좋은 거 뜨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던전 다 돌고나면 아이템 처분을 한다나봐. 다른 사람들은 어차피 골드화 하기 귀찮은데 민리가 해준다니까 좋다고 한 거고 워낙 일처리를 깨끗하게 하고 가격도 잘 받아와서 사람들이 별 말 안했나봄. 근데 이틀 전에 ‘깊고 어두운 동굴’ 줄여서 그냥 동굴이라고 부르는 미크론 내 최고 던전에서 길드 간부급들 여섯 명이 보스를 잡았는데 전설 급 아이템 하나 떴다고 함. 이거를 민리가 자기가 또 판매해서 나눠주겠다. 한 거지. 왜냐면 그게 공교롭게도 검인데 검 쓰는 사람은 민리랑 블랙선 밖에 없는데 둘 다 전설급 검 끼고 있고 사람들은 여태껏 잘 했으니까 뭐 의심도 안하고. 근데 그날부터 민리가 연락도 안 되고 그냥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길드도 탈퇴하고 잠수 탔다고 함. 전설 급 아이템은 거의 현찰로 한 2억?3억? 성능 따라서 5억까지도 간다는데 이정도면 역대급 먹튀 아니냐?
나는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저기서 아이템을 처분하던 건 내가 아니라 이균 형이었고 연락도 안 되고 길드도 탈퇴한 이유는 당연히 캐릭터를 삭제하고 다시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균 형은 나를 모함해서 길드원이 다섯 명이 된 명분을 만들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이균 형이라면 나랑 같이 핵사를 제일 오래한 사람이니 어쩌면 내가 탈퇴하고 다시 아이디를 만들 것을 알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그들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이제 중앙 대륙이 열린 이상. 형과 나는 부딪힐 수밖에 없는 입장이고, 나는 이번 기회에 레드 서클을 부숴버릴 것이다. 글을 보고 열이 뻗힌 나는 시간이 됐음을 깨닫고 재빨리 캡슐에 들어가서 로그인을 시작했다.
[플레이어 : Round2 로그인 되었습니다.]
눈부신 빛과 함께 내가 깨어난 곳은 마을의 서쪽 문 이었다. 안전을 위해서 마을 안쪽으로 옮겨준 모양이었다. 다시 문을 나가 고블린 부락으로 이동했다. 업데이트 하자마자 바로 들어온 사람들은 별로 없는지 아까보다도 사람이 덜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아마 사람이 아예 없는 곳이 나올 것이다. 사람이 없는 곳이 나오자 나는 가볍게 제자리에서 뛰며 몸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고블린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에엑!”
고블린들은 여전히 시끄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나에게 한명씩 달려왔지만 나는 돌진과 로킥, 주먹, 발차기 등을 이용하여 놈들을 제압했다. 커뮤니티의 글을 보고 열이 뻗쳐서 그런지 아까 고블린을 잡았을 때보다 더 과격하게 놈들을 제압했다.
[고블린을 처치했습니다. 17/100]
[레벨이 올랐습니다.]
고블린을 막 잡고 있는데 뭔가 더 이상 고블린이 안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안 오는 것이 아니라 내게 오는 고블린들이 중간에 새는 기분? 여태껏 이런 적은 없었는데 하면서 나는 원인을 찾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그러자 내 옆으로 한 30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고블린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고블린들은 무언가를 빙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건 세 명의 플레이어 들이었다. 샤먼 한 명, 기사 한 명, 광전사 한 명의 평범한 조합이었다. 그런데 광전사가 치명타를 맞은 모양인지 누워있었고 샤먼은 광전사를 치료하고 기사 한명이 막아서느라 급급한 모양이었다. 뭔가 곤란한 것 같기도 하고, 옛날 생각도 나서 나는 둘러싼 고블린들을 보며 외쳤다.
“돌진, 돌진, 돌진”
순식간에 가까워진 나를 고블린들은 반응할 수 없었고 그 실수는 머리의 호쾌한 발차기로 이어졌다.
퍼버버벅!
갑자기 머리를 얻어맞은 고블린은 곧바로 잿빛으로 변해갔고 얻어맞은 고블린 옆의 고블린들도 데미지를 입진 않았지만 같이 우당탕 넘어졌다. 마치 추돌사고와도 같은 광경에 세 플레이어들은 입을 쩍 벌리며 나를 보곤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좀 도와드릴까요?”
“감사합니다.”
짧게 인사한 기사는 방패로 고블린들을 밀어내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더 말할 시간이 없어서 몽둥이들을 피하며 고블린들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하지만 역시 고블린의 수가 너무 많았고 나는 내 뒤통수와 등짝에 고블린의 몽둥이를 허용하고 말았다.
[상태이상 : 기절에 걸립니다.]
순간적으로 기절에 걸려 얻어맞은 덕분에 체력이 한번에 30%나 닳았다. 그러자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유의 손길!, 마나의 축복!”
[치유의 손길을 받으셨습니다. 체력이 회복됩니다.]
[마나의 축복을 받으셨습니다. 마나 회복률이 증가합니다.]
치유의 손길과 마나의 축복은, 초보 샤먼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스킬이었다. 자금에 여유가 없는 샤먼은 치유 스킬이나 버프 스킬을 익혀야 1인분이 가능했기에 원하는 샤먼 기본 스킬 북을 하나 가질 수 있었다. 내가 무인이 되고 나서 글러브를 받은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샤먼은 돈이 있는지 스킬을 하나 더 익힌 모양이었다. 어쨌든 마나 회복률도 증가했기에 나는 좀 더 과감하게 손발에 ‘기’를 싣기로 했다. 조금 집중을 하자 내 양 팔은 팔꿈치부터 손끝까지, 양 발은 무릎부터 발끝까지 푸른빛을 뿜어냈다. 원래 이 정도 레벨의 보통 무인은 최대로 기를 운용해야 양 주먹을 푸르게 물들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건 마나 운용을 못하는 말 그대로 ‘보통’ 무인일 뿐이다. 랭커였던 나에게 마나 손실을 최소로 하면서 마나를 무기에 싣는 것은 그야말로 일상이었고 그 결과가 지금 내 손 발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약자를 물어뜯으려 달려온 고블린들에게는 적신호나 다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