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은 없다.
01.
***
김 소원.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평범하게 살았고 평범하게 지내며 글이나 깨작거리며 쓰던 평범한 24살 숙녀였다.
항상 평범하게 살던 삶이 지겨워지긴 했으나 소설 같은 박진감넘치는 삶을 바라지는 않았었다.
방금전만하더라도 방에서 BL 소설책인 [옴므마탈, 모두를 사로잡다]를 읽으며 책 속에 차원이동하게 된다면 재미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잠시나마 했었다. 그런데 그 잠시동안 한 생각으로 이상한 곳으로 오게 된건 정말 말도 안되는 거 아닌가. 그녀는 황당함에 울고 싶은 마음을 참아냈다.
신비한 빛 아래서 어두커니 서 있는 소원은 발걸음 소리에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삐까뻔쩍한 갑옷을 입고 있는 남성 두명이 그녀에게로 걸어오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크윽, 뭐 저런 게 다 있어?]
[신탁대로면 여기가 맞는데.]
[저렇게 생긴게 구원자라고? 말도 안돼]
사람이 앞에 있는데도 험담을 하던 두 기사는 보기도 싫다는듯이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저 끔찍한 얼굴 좀 가리자.]
[그래! 좋은생각이야.]
소원에게서 양해를 구하려고 하는 행동도 없이 끔찍한 그녀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가지고 있던 천으로 흉한 얼굴을 둘둘 감았다.
[이러니까 신비로워 보이는데.]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어도 구원자이긴 한가보군.]
[그럼, 데리고 가자.]
[그래]
소원은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하고 거친 손길에 끌렸다. 신발도 없어 상처투성이가 되가는 소원의 발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거침없이 어디로 향해 그녀를 끌고 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녀를 끌고 간 곳은 밖에 서 있는 마차였다. 소원은 시야가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는 풍경에도 머리속으로 자연스레 연상되는 느낌에 신기해졌다. 그리고 흉하다고 말했던 얼굴을 매만졌다. 나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짜꼬짜 끌고 온 남성들은 내 모습이 무척이나 징그럽다는듯이 고개를 돌렸었다. 내가 신께서 지정한 구원자라 했으면 그에 마땅하게 대우해줘야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흉한 얼굴 만으로 그들은 나를 무척이나 싫어하게 되었다. 어디든지 외모지상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어휴, 예쁜 여성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넌 꿈만 컸어, 그런데 아무리 제국의 구원자라고 하더라도 저렇게 흉하고 추악한 얼굴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데... ]
그들은 소원이 있음에도 소원의 외양에 대해 열심히 까내려갔다. 소원은 익숙한 냉대에 주먹을 쥐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차올랐다. 소원은 두눈을 감으며 덜컹거리는 마차에 몸을 맡겼다. 정신적으로 피곤해진 소원은 덜컹거리는 마차안에서 정신을 잃는 것처럼 잠이 들었다.
[이봐, 일어나. 일어나라고!]
소원이 다시 정신차린것은 거친 손이 그녀를 흔들어 깨워서였다. 소원은 거친 손길에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역시나 거칠고 손속없는 손길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쳐서 쓰라린 발보다 마음이 더 아파왔다.
[폐하를 보기전에 그 거지같은 옷을 어떻게 좀 해야지.]
[어이, 거기 구원자좀 데려가서 옷좀 입혀.]
[그리고 절대로 끔찍한 얼굴 보려고 하지말고.]
가시같은 말을 내뱉는 낯선사람들. 소원은 가슴을 쥐어잡으며 인내했다. 낯선 곳에서 더더욱 밉보이면 힘든건 그녀 자신이었기에 일단 상황을 알아야 했다.
[얼굴이 어떻길래 그러지?]
[그러게.]
[괜히 보려고 하지말고 옷이나 입히자.]
두 눈은 가려져 있어도 깜깜하지 않은 세상을 내다보는 그녀는 이것이 그녀의 능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세계에 차원이동하게 된 대가로 준 능력인것일까. 소원은 방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옷을 벗기는 시녀들의 손길을 받았다.
[어머, 몸매가 좋으신데.]
[아스텔님, 조금만 배에 힘줘보세요.]
하얗고 뽀얀 살결에 시녀들은 감탄하며 코르셋을 들고와 소원의 허리를 쪼였다. 조금이라도 날씬하게 보이기 위해서 코르셋을 조이는 시녀의 매정한 손길이 눈물 나게 서러웠다. 숨이 턱,하고 막히는 느낌이 어마어마하게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으윽..!"
결국 그녀는 가슴과 허리를 조이는 엄청난 압박감에 소원은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코르셋에 익숙하지않은 몸을 억지로 코르셋에 맞추려고 하는 시녀들의 매정한 손길은 자비가 없었다. 신께서 나를 괴롭게 하시려고 이곳으로 보낸 것일까. 한숨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얼른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도는데 시녀가 힘껏 코르셋을 쪼이며 끙끙거리다가 한숨을 푹, 하고 내쉬는 행동에 화들짝하고 놀라버렸다.
잠깐사이에 풀린 천에 가려진 얼굴이 살짝 드러나 소원의 흉측한 얼굴을 보게 된 시녀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혐오감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어머나! 이런 분이 아스텔님이시라니]
[조금더 조심하지 그랬어. ]
[으윽, 속이 안좋아.]
소원은 흉한 얼굴을 얼른 가리려 손을 들었다. 시녀가 시종을 들며 투덜거리는 말은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소원은 끔찍한 이 세상에서 얼른 나가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대 놓고 중얼거리는 시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강철가슴이 상처 입을 만큼 크디컸다.
그렇지만 그녀의 심통한 말투도 이해간다. 쇠퇴하고만 있던 제국을 다시 재건해줄 여성의 겉모습에 실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제국을 다시 일으킬 별이 기대하던 미녀가 아니라 추한 여성이었으니까. 이왕이면 예쁜 사람이 좋다는 말이 해당 되지 않는 세계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
보통 다른 소설에는 다른 세계로 오게되는 차원이동자들이 잘 적응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녀의 직감에 이
세계에서 왠지 잘 적응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소원의 마음 한 구석에는 살아남아서 빨리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뿐이여서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래 살아남아야지. 살아남아서 집으로 가야지.
[아스텔님, 곧 황제폐하를 뵙게 될 겁니다]
이때까지 한 독설은 거짓말이라는 듯이 치장이 끝나자 새침하게 말하는 시녀들이 가식적이었다. 그렇지만 인간적인 마음은 아직 있었는지 소원에게 한가지 충고를 해주었다.
[마음 단단히 하시고,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셔요.]
[고맙습니다.]
차분한 얼굴로 대답하는 내 모습이 의외였는지 사슴같이 예쁜 두눈을 깜빡이던 시녀는 말 편하게 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가려진 얼굴에 미소를 지어봤자 달라질게 없겠지만 시녀들의 눈빛이 내 말 한마디에 달라졌다. 그래, 나는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밉보이지 않아야 했다.
[...그럼, 폐하께 가시죠.]
그녀는 시녀의 안내를 따라 쫄래 쫄래 그 뒤를 걸어 갔다. 만나게 될 황제는 과연 나를 보고 어떻게 행동할까. 문득,소원은 궁금해졌다. 과연 세상을 감싸줄 성군일까. 아니면 세상을 망하게 할 폭군일까. 소원은 차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피어오르는 성스러움을 소원은 모른채 차분하게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