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
기억의 문
작가 : 최윤정
작품등록일 : 2017.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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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멈춰버린 시계 - 2
작성일 : 17-06-24     조회 : 267     추천 : 0     분량 : 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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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희는 다시 그 지점에 이르렀다. 가슴이 꽉 막힌 듯 숨이 꽉 막히면서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이 스며드는 그 지점.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희미하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차랑 차랑, 격해지는 소리.

 

 “방울 소리가 나기 시작해요. 가슴이 콱 막혀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제 좀 편해져요.”

 

 수희는 그 때 쉬지 못한 숨을 지금에야 내쉬듯 길게 한숨을 쉬었다.

 

 “방울 소리라.... 그 방울 소리는 누가 내는 거야? 자, 숨을 길게 쉬고, 편안하게, 좀 더 깊게 그날의 기억에 들어가 보자.”

 

 재형 선배가 좀 더 깊은 최면을 유도했다. 수희는 선배의 유도에 따라 방울 소리에 집중하며 기억의 더듬었다.

 

 “손.... 손이 보여요. 나무줄기처럼 힘줄들이 툭툭 불거진 주름 투성이 손이 방울을 쥐고 흔들고 있어요. 그 왜 작은 방울들이 달린.... 무당들이 쓰는 거, 왜 무령인가 하는 거.”

 

 “자, 숨을 내쉬고 편안하게 숨 후우 내쉬고.... 주위를 둘러 봐. 누가 무령을 쥐고 있고, 일곱 살의 너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수희는 흰 저고리를 자락을 펄럭이며 무령을 흔들고 있는 손의 얼굴을 찾아 시선을 위로 옮겼다. 하지만 핏빛 붉은 색으로 빛나는 햇살이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어두워서.... 읔”

 

 갑자기 어깨에 강렬한 통증이 일었다. 왼쪽 어깨가 칼에 찔린 듯 욱신거린 기억이 생생한 통증과 함께 되살아났다.

 

 “한 수희, 한 부원장, 숨 길게 쉬고, 긴장 풀고.”

 

 재형 선배의 목소리가 수희를 진료실로 데려왔다. 하지만 어깨에 느껴지는 통증은 기억에서나 현실에서나 아프기만 했다. 수희는 최면에서 나오고 싶은 마음을 이를 악물며 누르고 다시 집중했다.

 

 “왼쪽 어깨가 타는 것처럼 아파요. 그리고, 목소리.... 뭐라고 주문을 외는 것 같은.....”

 

 “자 숨을 내쉬고 긴장 풀고 후우~ 뭐라고 하는지 들어봐.”

 

 수희의 머리 속에 웅얼거리는 노파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리기 시작했다. 훔치 훔치 태을천상원군....

 

 “훔치 훔치.... 태을천상원군 훔리치야.... 허억. 그만...”

 

 수희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쇠꼬챙이가 어깨를 헤집는 것 같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음, 더 이상은 무리다. 자 숨을 길게 쉬면서, 정신을 차려 보자. 천천히 눈을 뜨고.”

 

 수희는 최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눕혀 있던 등받이가 제 자리로 돌아오면서 무릎 위에 놓인 손이 보였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불거진 채였다.

 

 “여기서 막히는구나.”

 

 실망한 목소리로 재형 선배가 혀를 찼다.

 

 “그래도........ 방울 소리와 주문을 들었으니....... 한 단계는 나갔다 봐야죠.”

 

 아직도 얼얼한 통증이 가시지 않는 어깨를 수희는 주무르며 재형 선배의 얼굴을 살폈다.

 

 “잘 한다, 명색이 정신과 의사가 그게 할 소리냐?”

 

 재형 선배의 이죽거림에 수희는 발끈했다.

 

 “명색이 정신과 의사면서 도박 중독인 사람이 할 이야기는 아닌 거 같은데?”

 

 “아니 언제적 이야기를 하십니까? 나 단도 3년째요, 3년째. 죽어야 끊을 수 있다는 단도박을 3년이나 한 사람이라고. 인간승리의 표본인 이 선배에게 응, 매년 라일락 꽃이 필 때마다 땀을 한 바가지나 쏟을 정도로 악몽을 꾸면서도 끝내 문도 못 여는 사람이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수희는 피식 웃었다. 그래, 하긴 선배가 도박을 이기기 위해서 기울인 노력이 얼마나 눈물겨운지 잘 안다. 도박 충동이 일 때마다 포르쉐를 몰고 쭉 뻗은 중앙고속도로를 시속 200 킬로도 넘게 질주한다는 걸.

 도박하다 패가망신하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그 길을 붕붕 날 듯이 달릴 때 선배는 어떤 기분일까.

 

 “인정. 존경합니다, 원장님!”

 

 “금수저 물고 태어나 머리마저 좋아 의대도 턱 붙은 나같은 인재에게 삶이란 자고로 무료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 그래서 젊어 한 때 바카라에 손을 대었기로, 새카만 후배가 말이야, 나한테 월급 받는 주제에 퍽 하면 그 이야기를 그렇게 울궈먹어요. 너 아주 불량해, 불량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선배가 재킷을 짚어들었다.

 

 “가자, 가서 밥이나 먹자. 배고프다.”

 

 수희는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그 때였다, 수희의 왼손이 슬금슬금 움직인 것은.

 

 수희는 선배가 볼 새라 서둘러 오른손으로 왼손을 꽉 잡아 허벅지에 대고 강하게 눌렀다. 안 된다, 지금은. 아무리 친한 선배라도 이런 후배를 봉직의로 두지는 않을 것이다.

 

 “뭐해? 빨리 가자, 등가죽이 뱃가죽에 붙었다, 야.”

 

 재형 선배가 문을 열려다 굳어진 채 서 있는 수희를 불렀다.

 

 “아, 먼저 나가요, 선배. 나 오늘 최면 세션 정리 좀 하고. 15분 뒤에 대기실서 봐요.”

 

 “으이구, 백날 정리해봐야 문도 못 여는 주제에.”

 

 선배가 문을 열고 나갔다. 수희는 안도의 숨을 쉬며 왼손을 보았다. 왼손이 움찔거리며 무언가를 또 그리고 있었다.

 

 수희는 무엇인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뭔가 거대한, 뭔가 삶을 뒤흔들.

 

 그것은 지금까지처럼 희미한 기억일까, 아니면 오늘 어깨를 쑤셔대던 강렬한 고통일까.

 

 그 어느 것이든 좋았다.

 

 밤마다 괴물의 아가리같은 검은 지하실의 계단을 내려가 끝내 열지 못하는 문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다 깨어나는 것보다는 무엇이든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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