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
기억의 문
작가 : 최윤정
작품등록일 : 2017.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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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봄날, 바닷가 -1
작성일 : 17-06-24     조회 : 295     추천 : 0     분량 : 4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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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신경증적 증상은 우리가 회피하는 진짜 고통을 합법적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하다 – C.G. Jung

 

 “선생님, 저 선생님?”

 

 수희는 자신을 부르는 신 주경 환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신 주경 환자가 의아한 듯 상담의자에 앉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또..... 또.....

 

 수희는 속으로 제기랄 욕을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책상 밑 보조 책상 위에 왼손이 막 그린 그림이 놓여 있었다.

 

 빨간 원피스 위에 초록 코트를 앙증맞게 입은 꼬마가 초록 원피스 위에 빨간 코트를 입은 꼬마의 손을 뿌리치는 순간을 그린 그림. 둘은 곧 균형을 잃고 바위 아래, 푸르게 넘실거리는 바다로 빠지고야 말 것을 생생하게 포착해 낸 그림.

 

 날로 정교해지는 그림. 나 모르게 왼손이 그리는 그림. 그림을 그릴 때 멍해지는 이 빌어먹을 해리 증상. 일곱 살 때 잃어버린 자아의 한 조각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이 기막힌 방식.

 

 “아, 주경씨가 반복해서 꾼다는 꿈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는 왼손이 그린 그림에서 눈을 떼며 어설프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I’m all ears! 온 몸이 귀라도 된 양 집중해서 들어도 모자랄 상담 세션 중에 딴 생각에 빠진 것이 분명한 불량한 의사를 두고도, 그러나 신 주경 환자는 화를 내는 대신 오히려 나를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듯 살풋 우는 듯이 찡그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착한 딸로, 일 잘하는 직원으로, 홀시어머니까지 기꺼이 모시고 살겠다는 여자 친구로, 남에게만 맞추며 자기 주장을 내세워 본 적이 없는 환자. 그렇게 남의 욕구에만 충실하다가 정작 자신의 내면은 탈진에 이를 정도로 지치고 지쳐버린 중증 우울 환자.

 

 “약 먹은 후 아무 것도 하기 싫고 밥도 먹기 싫을 정도의 무력감은 나아지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항우울제가 본격적인 약효를 발휘하려면 2~3주 걸리니까, 다음 주부터는 한결 몸이 가벼워지고 의욕도 나실 거에요. 그런데 부쩍 물에 빠지는 꿈을 더 자주 꾸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보통 물에 빠지는 꿈은 심리적인 교착상태를 의미하거든요. 어릴 적에 물에 빠진 적이 있으십니까?”

 

 신 주경 환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요?”

 

 꺼내기 쉽지 않은 이야기인 듯 신 주경 환자는 쉽게 입을 못 떼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일곱 살 때인가 제주의 한 바닷가에서 물에 빠진 적이 있어요. 그 때......”

 

 신 주경 환자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언니가 저를 밀었는데, 제가 바위에서 미끄러지면서 언니를 잡았대요. 그래서 둘이 빠졌는데......”

 

 신 주경 환자가 덜덜 떨리는 두 손을 꽉 마주잡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피가 통하지 않는 손끝이 벌겋게 변했다.

 

 “주경씨. 숨을 길게 내쉬세요. 후우우, 길게 내쉬세요. 그리고 다시 길게 들이마시고, 잠시 쉬었다가 후우 다시 길게 내쉬고......”

 

 호흡은 의식과 자율 신경계 모두를 조절할 수 있는 탁월한 수단이다. 깊게 내쉬는 호흡은 부교감 신경계를 활성화시켜 근육을 이완시키고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물론 빠르게 들이쉬는 호흡은 교감 신경계를 활성화시켜 전투 자세를 갖추게 한다. 운동 선수들이 경기를 앞두고 빠르게 숨을 들이쉬는 건 다 근거가 있는 것이다.

 

 길게 숨을 내쉬며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주경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언니랑 저랑 빠졌는데 저만 살아났대요. 언니는...... 구하지 못했대요.”

 

 수희는 왼손이 그린 그림을 힐끗 보았다.

 

 “누가 주경씨를 구했나요?”

 

 주경이 갑자기 수희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위대한 진실을 밝히듯 한 음절씩 천천히 선언했다.

 

 “새. 엄. 마. 가. 요.”

 

 수희도 주경의 얼굴을 엄숙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새엄마가 주경씨를 구하셨다면, 돌아가신 언니는 그분의 딸인가요?”

 

 “네. 죽은 언니는 새엄마의 친딸! 이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미안했겠냐고, 새엄마를 마주할 때마다 숨 쉬는 것조차 미안하지 않았겠냐고 어느 새 눈물에 젖은 주경씨의 까만 눈동자가 열심히 웅변하고 있었다.

 

 눈동자에 비친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죄책감에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수희는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하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주경씨, 살아남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어머님이 슬퍼하시는 모습을 보며 당연히 괴로웠을 거에요.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망극한 슬픔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주경씨 잘못이 아닙니다.”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저는.... 아니 애초에 민 것이 언니니까. 언니가 밀었으니까.......”

 

 하지만 말과 달리 주경씨의 온 몸은 살아남은 이의 죄책감으로 칙칙하게 물들어 있었다. 밤마다 꾸는 악몽 속에서도.

 

 “꿈 속에서 물에 빠지는 장면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건, 주경씨의 무의식이 뭔가 그 사고에 대해서 전할 메시지가 있다는 거에요. 주경씨의 끝 없은 우울감, 자책감에 대해. 꿈 속으로 들어가 그 메시지를 받아볼까요?”

 

 주경씨의 몸이 움찔, 거부감을 나타냈다.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당신의 잠재의식은 매일 밤 꿈 속에서 무엇을 복기하고 있는가?

 

 “어떻게.... 꿈에 들어간다는 거죠?”

 

 “가볍게 최면을 유도할 거에요. 자,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세요. 의자가 좀 뒤로 젖혀질 텐데, 긴장을 풀고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숨을 천천히 길게 들이쉬고 또 천천히 내쉬고......”

 

 내키지는 않은 듯했지만 평생 남의 말에 거역을 해본 적이 없는 습성이 주경씨를 의자에 기대 눈을 감게 했다. 수희는 부르투스 스피커를 켜고 mp3 플레이어로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명상 음악을 틀었다.

 

 숲 속을 흐르는 계곡 물 소리, 작은 새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고요한 연주 음악이 수희의 진료실을 채웠다. 수희는 최면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자 숨을 길게 내쉴 때마다 주경씨의 몸에서 긴장이 사라집니다. 새로 돋아난 연두빛 나뭇잎들을 물들이는 밝은 햇살이 주경씨의 머리를 채웁니다. 머리와 목이 밝은 빛으로 물들며 편안해집니다. 빛은 양 팔을 타고 내려가 손끝에까지 이릅니다. 양 팔부터 손끝까지 밝은 에너지로 가득합니다. 햇살의 빛은 목과 가슴, 그리고 배까지 채워집니다. 숨을 길게 내쉴 때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빠져나가고, 부정적인 에너지들이 빠져나가고 밝은 연두빛과 햇살이 주경씨의 몸을 채웁니다. 그 빛이 배를 지나 다리에, 그리고 다리 끝까지 천천히 채워갑니다. 몸은 점점 더 편안해지고, 숨은 더 깊어지고 느려지고, 무거워집니다. 아주 편안합니다. 앞으로 주경씨는 누워서 편안하다 편안하다 편안하다 말하며 숨을 길게 내쉬면 지금처럼 평온한 상태가 되게 됩니다.”

 

 미세하게 찡그리고 있던 주경의 얼굴 주름이 펴지고, 몸 전체가 편안하게 의자에 기대게 되었다.

 

 “자 온 몸에 밝은 빛을 채웠습니다. 이제 주경씨의 꿈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주경씨는 지금 매일 밤 꾸는 꿈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불안해지면 언제든 현실로 나올 수 있습니다. 편안하게 숨을 내쉬고, 주위를 둘러봅니다. 무엇이 보입니까?”

 

 “바다.... 바닷가에 제가 서 있어요....... 온통 캄캄해요.......”

 

 주경의 몸이 긴장했다.

 

 “꿈 속을 밝혀볼까요? 캄캄한 바다 위에 둥근 달이 떠오르는 걸 상상하세요. 보름달이 환하게 주위를 밝힙니다. 밝은 달빛이 꿈 속 세상을 가득 채웁니다.”

 

 꼭 감은 눈꺼풀 아래로 불안하게 움직이던 주경의 안구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지금 꿈 속 세상은 은은한 달빛이 가득합니다. 이제 환해진 꿈 속을 둘러보세요. 숨을 길게 내쉬고, 편안하게 둘러봅니다. 무엇이 보이나요? 그냥 마음 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아 이런 것이 보이겠구나 떠오르는 거 아무 거나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편안하게......”

 

 “손이.... 손이 보여요. 바다에서 손이 나와서..... 저의 다리를 붙들려고 해요.”

 

 “지금 우린 꿈 속을 보고 있습니다. 불편하거나 두려우면 언제든 현실로 돌아오면 됩니다. 자 편안하게 숨을 길게 후우 내쉬고, 손을 봅니다. 그 손은 누구의 손일까요?”

 

 길게 숨을 내쉬는 주경은 바닷물을 살피듯 한참을 침묵했다.

 

 “혜인이.... 혜인이 언니 손이에요.”

 

 주경씨의 눈가로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르 흘렀다.

 

 “혜인이 언니는 누구지요?”

 

 “혜인이 언니는..... 물에 빠져 죽은 언니에요.... 새엄마 딸...... 언니가....... 언니가 왜 내 꿈 속에......”

 

 “자, 숨을 길게 내쉽니다. 몸의 긴장이 풀립니다. 편안하게...... 혜인이 언니에게 물어보세요. 왜 주경씨의 꿈 속에 나타나는지.”

 

 그 순간 신 주경 환자의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변했다. 풀 죽은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신 주경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외로워요...... 여긴 너무 춥고..... 외롭고, 심심해.”

 

 수희는 오른손으로 만년필을 들어 진료 챠트에 dissociative disorder 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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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 dissociative disorder: 해리성 정체성 장애 – 한 사람 안에 둘 이상의 각기 다른 정체감을 지닌 인격이 존재하며, 행동을 지배하는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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