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
기억의 문
작가 : 최윤정
작품등록일 : 2017.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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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드러난 후 당신들은
작성일 : 17-07-04     조회 : 268     추천 : 0     분량 : 4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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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이 후딱 흘렀다. 수희는 정 재형 원장의 방송 출연 후 부쩍 많아진 환자를 보느라 화장실에 가서 느긋하게 앉아 볼 일 볼 시간도 가지지 못했다. 덕분에 치질이 심해져 아침마다 쪼그리고 앉아 좌약을 밀어 넣으며, 아오 월급 받아먹기 힘들다 오만상을 찌푸려야 했다.

 

 그날도 그러했다. 주말 동안 쉬고 출근하면서부터 절대 약을 끊으면 안 된다고 신신 당부한 것을 어겨 환청 증상이 재발해 다시 내원한 조현증 환자를 시작으로, 세 번째 연애를 막 실패하고 도대체 이 미모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은 거지같은 새끼들만 만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는 자기애성 망상 환자. 심한 알콜 의존증으로 구설수에 오른 50 배우. 성적 압박에 손목을 커터 칼로 그었다가 엄마에게 목덜미 잡혀 끌려온 10대 남학생 등을 상담하고 약을 처방하였다.

 

 정 원장은 잘 해내고 있었다. 병원에 출근해서 성실하게 환자를 보고, 시시껄렁한 연애인들 심리 상담하는 프로그램에 두 개나 출연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일반인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팟캐스트까지 개설했다.

 

 오늘만 있는 사람처럼 미친 듯이 자신을 혹사했다. 그게 도박 충동을 줄이고자 일부러 벌이는 일들이라 믿었고, 그래서 수희는 선배를 응원하기까지 했다.

 

 나중에, 나중에 얼마나 가슴을 쳐야 했던가..... 부질없이 통곡해야 했던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그건 아직 먼 훗날의 일이었다.

 

 점심 시간 후 잡혀 있는 오후 첫 상담 세션이 환자의 급한 사정으로 취소되었다고 방 실장이 문에 빠금 얼굴만 디밀고 통보했다. 짐짓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간만에 시간을 가지게 되어 수희는 기분이 느긋하게 말랑거리는 느낌이었다.

 

 벼르던 트리안 가지치기를 했다. 올 들어 한 번도 가지치기를 안 한 트리안은 정글처럼 빽빽하게 자라서 보기에도 답답했다. 오래된 가지들을 가위로 조심스럽게 잘라 책상 한 켠에 잘 모았다. 나중에 물에 꽂아두면 뿌리를 내리겠지.

 

 길이 잘 든 가위로 진딧물이 세 마리 정도 붙어 있는 가지를 잘라냈을 때였다.

 

 왼손이 부르르 떨었다.

 

 수희는 서둘러 가위를 내려놓았다. 다음 순간 왼손이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발작적으로 움직일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자마자 왼손은 검은 색연필로 빈 진료 챠트 위에 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검은 나무, 고목.......

 

 제길, 제발!

 

 수희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왼손이 다음에 무엇을 그릴 것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희는 오른손으로 서랍에서 리도카인 병을 꺼내 주사기로 약물을 채웠다. 그리고 척골 신경이 있는 팔꿈치에 주사액을 찔러 넣었다.

 

 마취 기운에 서서히 힘을 잃어가면서도 왼손은 끝끝내 끝까지 그리고야 말았다.

 

 검은 나무 가지에 시커먼 무언가가 뒤룽거리며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수희는 이를 악문 채 주저앉았다. 그리고 끝내 부르지 말아야 할 이름을 부르고야 말았다.

 

 “강혁 오빠. 강혁 오빠. 나를 찾아줘. 나를 불러줘. 나를....... 이 지옥에서....... 꺼내줘.”

 

 약 기운에 축 늘어졌던 왼손이 서서히 꿈틀거리며 깨어나 수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너의 부름을 들었다는 듯, 그러니 너의 강혁을 데려오겠다는 듯.

 왼손은 천천히,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손길처럼 부드럽게 수희의 뺨을 쓸어주었다.

 

 어디선가 쟁그랑거리는 무령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듯했다.

 

 +++++

 

 바쁘게 환자를 보며 오후의 해프닝을 지워낸 수희가 챠팅을 마무리하고 퇴근하려는 참이었다. 진료실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신 주경 씨였다. 신 주경 씨가 손에 반 깁스를 한 채 문에 서 수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눈이 다시 보이는 거죠?”

 

 주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녀가신 날 자고 났더니 시력이 차츰 돌아왔어요.”

 

 “들어와요, 들어와 앉아요.”

 

 “배 고프실 것 같아서 샌드위치랑 마키아또 달달하게 타왔어요. 당 떨어지셨을까봐.”

 

 주경이 수희의 책상 위에 샌드위치와 커피를 올려 놓았다. 수희는 의자를 책상 앞에 당겨 놓아 주경이 마주 앉게 하였다. 그리고 샌드위치를 꺼내 크게 한 입 물었다.

 

 “진짜 배고팠거든요. 주경씨도 한 쪽 드세요.”

 

 “배 안 고파요. 어제 퇴원해서 집에서 왔어요.”

 

 “운전하고?”

 

 “아뇨. 또 눈이 말썽일까봐. 택시 타고.”

 

 “기분은 좀 어때요? 약은 계속 먹고 있는 거죠? 우울증은 재발 주기가 있으니까 3개월 정도는 꾸준히 먹으면서 경과 봐야 해요. 나아졌다고 마음대로 끊고 하면 안 되는 거 알죠?”

 

 주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계속 먹고 있어요. 그래도........ 좀 달라요, 전과는. 물에 빠지는 꿈도 안 꾸고, 불안하게 짓누르던 느낌이 없어졌어요. 혜인 언니한테는 미안하지만.”

 

 수희는 마끼아또를 한 모금 삼켰다.

 

 “불행한 사고였어요. 일어나지 않았으면 정말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일어나버린. 언니를 밀었다는 죄책감은 지울 수 없고 지워서도 안 되지만 언니의 죽음이 다 주경씨 책임이란 생각은 버려야 해요. 상투적인 이야기이지만 언니 몫까지 열심히 사는 걸로 갚으면서 살아가는 거죠.”

 

 주경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 목소리, 제가 내던 혜인 언니 목소리 말이에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여러 이론에 따라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는데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주경씨가 혜인 언니 손을 물 속에서 놓칠 때의 감정이 기억에 단단히 각인이 되었겠지요. 그 공포와 안타까움이. 그게 너무 압도적이어서 죄책감과 더불어 주경씨는 그 기억을 묻어버렸고, 그 묻어버린 기억은 다른 인격처럼 주경씨의 무의식에서 자라났을 거에요. 우리가 외면한 기억은 결국 그렇게 돌아오죠, 언젠가는. 다른 인격으로, 다른 외부 존재인 것처럼.”

 

 우리가 무의식에 묻어버린 기억들은 결국 운명처럼 외부에서 다가온다고 일찍이 융이 말했던가?

 

 그러면 내가 한사코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는 나의 기억은 나중에 어떤 운명으로 다가올 것인가?

 

 수희는 습관처럼 왼손을 꽉 잡으며 피어나는 상념을 단단히 가뒀다.

 

 “한사코 보지 않으려 하던 기억은 되살아났어요. 이제 그 기억이 가져온 파장을 수습하고, 한 걸음 더 나가야지요. 그게 주경씨가 하셔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혜인이 언니 몫을 하기 위해 오늘 왔어요. 새엄마가 정신병동에 입원하셨어요.”

 

 수희가 놀라서 베어 물은 샌드위치 덩이를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켰다. 커다란 덩어리가 넘어가며 식도가 타는 듯이 아팠다.

 

 “어떻게? 그날 일 때문에요?”

 

 급성 우울증에 자해 위험이 높다고 병원에서 입원을 권했어요. 그 날 이후 엄마가 말씀을 안 하고 식사도 거부하세요. 계속 식사 거부하시면 호스로 강제 급식을 해야 한다고 해요. 엄마 좀 도와주세요. 그 날 보셨잖아요. 엄마가 어떠실지.”

 

 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 만도 하죠. 주경씨가 언니를 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두려워 눈이 일시적으로 안 보인 것처럼, 아니 그것보다 더 어머님은 그 날 기억이 힘드실테니까.”

 

 “자라면서 새엄마가 혜인 언니 대신 날 살렸다는 부채 의식이 너무 커서 엄마가 하라는 대로만 하고 살았어요. 그게 억울하기도 했지만, 울 엄마였어도 그 상황에서는 친딸을 살리고 싶었을 거에요. 그게 본능이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엄마를 돕고 싶어요. 그래야 나도 홀가분하게 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누구 딸, 누구 여친 이런 거 다 떠나서 내 삶, 신 주경의 삶을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주경이 간절한 눈으로 수희를 보았다. 늘 주눅 들어 있던 눈빛이 단단해져 있었다.

 

 “어머님은 지금 생의 최대 위기를 겪고 계실 거에요. 따님이 죽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겠지만 그래도 주경씨와 아버님이 계셨으니까, 그리고 의붓딸을 살렸다는 주변의 칭찬도 있었을 거고. 하지만 그 모든 게 허상이었음이 밝혀진 지금, 혼자라는 절망감에 빠져 계실 거에요. 이럴 때 주경씨가 손을 내밀어 주셔야 합니다. 엄마의 자리를 확인하게 해 드리세요. 이제까지 살아온 삶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드리세요. 물론 앞으로도 거쳐야 할 심적 괴로움은 크시겠지만, 인생은 누구나 다 각자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거니까.”

 

 주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면 아빠와 내가 엄마를 버리지 않는다, 나는 엄마 딸이다라는 걸 확인하게 해드릴 수 있죠?”

 

 수희는 곰곰이 그 날 주경의 입원실에서 있었던 대화를 복기했다. 주경이 했던 말, 어머님이 했던 말씀.

 

 “자장가, 무슨 자장가를 언니한테만 불러줬다고 하셨죠?”

 

 주경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웡이 자랑! 그거 엄마가 저한테는 한 번도 불러주지 않은 건데, 왜요?”

 

 “그거 가사 다 알아요? 부를 수 있어요?”

 

 “부를 수 있죠. 엄마가 나한테는 한 번도 안 불러주는 게 서운해서 혼자서 불렀었거든요.”

 

 “그래요. 이제 주경씨가 어머니한테 불러드려야겠네.”

 

 잠시 의아한 눈으로 수희를 보던 주경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을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면회가 8시까지에요. 저 표현 잘 못하는 거 아시죠? 배워본 적 없어서. 염치 없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함께 가 주세요. 응?”

 

 주경씨는 변했다. 늘 상대의 요구에 맞추기만 하던 사람이 이제 당당하게 요구하는 수준으로 변모했다. 자신의 과오를 똑바로 보게 되면서 존재를 압박하던 거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 어디까지 자신의 책임이고 어디까지는 불가항력이었는지를 구분하게 된 것이다.

 

 수희는 입을 비죽거리며 투덜거렸다.

 

 “당당해진 건 참 좋은데....... 내가 참 좋은 의사인 것도 알겠는데....... 아아, 거 참 이렇게까지 요구하는 환자는 곤란한테.......”

 

 말과 달리 수희의 왼손은 벌써 재킷과 가방을 집어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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