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
기억의 문
작가 : 최윤정
작품등록일 : 2017.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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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은 채 남겨진 말들
작성일 : 17-07-05     조회 : 278     추천 : 0     분량 : 4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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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인 병실의 다른 침대는 비어 있었다. 주경의 새어머니는 링거 줄을 주렁주렁 단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주경이 ‘엄마’하고 불러도 쳐다보지 않았다.

 주경 아버지는 걱정스럽게 아내를 바라보다 수희를 보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수희는 주경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경은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리고 과거의 회한에 빠져 있는 새엄마의 손을 잡았다.

 

 긴장한 듯 침만 삼키던 주경이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어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웡이자랑 웡이자랑

 우리 아기 재와줍서

 ᄃᆞᆫ밥 멕영  재와줍서

 

 텅 비었던 어머니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노래를 부르는 주경을 바라보았다.

 

 주경은 어머니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할마님의 공든 ᄌᆞ순

 ᄎᆞᆷ웨 크듯 키와줍서

 

 어머님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주경이 손을 뻗어 어머님의 눈가를 닦았다.

 

 넙ᄂᆞ물 크듯 키와줍서

 

 입술만 달싹거리던 어머님의 입에서도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웡이자랑 웡이자랑

 우리 애기 잘도 잔다

 

 웡이자랑 웡이자랑

 우리 아기 재와줍서

 

 노래는 이어지지 못했다. 어머니가 어깨를 들썩이며 주경의 품에 쓰러져 통곡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주경은 어머님의 어깨를 감쌌다.

 

 “엄마, 엄마,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언니 잃고도 나 버리지 않고 이만큼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엄마는........ 내 엄마였어요. 그러니까 혜인 언니 만날 때까지 잘 살아요, 우리. 그래야 하늘에서 혜인 언니도 좋아할 거야. 그래야 혜인 언니도 마음 편하게 엄마 기다릴 거야.”

 

 “미안하다....... 미안하다.......”

 

 새엄마는 그 날 구하지 못한 혜인에게, 그리고 그 딸 노릇을 해온 주경에게 하염없이 미안해했다. 주경은 새엄마의 어깨를 안았다.

 서로 부등켜 앉고 우는 두 사람을 주경의 아버지가 함께 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수희는 이제야 진정한 가족이 된 사람들을 보았다. 때로 미워하고 때로 원망하겠지만 함께 지낸 세월의 힘으로, 더 나은 가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혜인, 주경에 깃들었던 혜인의 인격도 성공적으로 주경의 인격에 통합이 되겠지.

 

 이만하면 된 거라고, 이만하면 잘 했다고, 주경의 왼손이 기특하다는 듯 주경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주경은 살며시 병원을 나왔다.

 

 라일락 향이 어느 때보다 짙은 5월의 봄 밤이었다.

 

 지하철 역으로 향하며 수희는 오늘 밤, 다시 지하실의 문 앞에 서게 될 것을 예감했다. 등줄기가 벌써부터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수희는 긴 호흡을 뱉어냈다. 조금은 더 들어갈 수 있으리라. 조금은 덜 두려워할 수 있으리라.

 

 

 2. 말하지 않은 채 남겨진 일

 

 - 많은 불행은, 난처한 일과 말하지 않은 채로 남겨진 일 때문에 생긴다. (도스토예프스키)

 

 수희에게 4월은 언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며, 악몽을 피워내는 달이기도 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꿈, 그리고 점점 더 생생해지는 꿈.

 

 꿈은 늘 어릴 적 살았던 관서동 달동네 집 마당에서 시작한다. 일곱 살 어린 수희가 붉게 물들어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라일락 꽃나무가 서 있는 마당. 짙은 꽃향기에 속이 토할 것처럼 울렁거린다. 수희는 어서 깨어나 이 질실할 것 같은 냄새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중얼거린다. 하지만 질긴 꿈은 수희의 바람을 저버리고 스탑 버튼이 고장난 영화의 장면처럼 계속 이어진다.

 

 두려운 일이 벌어지고야 말 것 같은 불안감에 수희는 대문을 나서고 싶다. 하지만 타는 노을 속의 무언가가, 라일락 꽃나무 가지에 달린 무언가가, 그리고 마당 한 구석에 지어진 연탄 창고가 수희를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다.

 

 시멘트로 된 사각의 연탄 창고 바닥에는 지하로 향하는 좁고 가파른 계단이 있다. 김장 김치며 고구마 등을 보관하던, 늘 쾨쾨한 냄새가 나는 서늘한 그 곳.

 

 주문에 걸린 듯 수희의 발이 천천히 창고를 향한다.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이 보이기 시작한다. 머리 속에서 깨질 듯한 고함이 울린다.

 

 “들어가지 마, 아가, 거긴 들어가지 마.”

 

 심장 박동이 너무 빨라져 수희는 숨을 헐떡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수희의 발은 머리와 심장의 경고에 아랑곳없이 지하실 계단을 내려간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천천히 골라 딛으며. 돈벌레와 노래기가 후다닥, 사람의 발길에 밟혀 죽지 않으려 도망치는 걸 곁눈질하며.

 

 저승에 끌려가는 망령들처럼.

 

 계단 끝에 서서히 드러나는, 지옥의 입구처럼 시커먼 문.

 

 머리 속에선 도망치라는 외침이 터질 듯하고 삐이 불길한 이명이 귀 속을 가득 채운다.

 

 그래도 도망칠 수 없다. 문을 열어야 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

 

 수희는 와들거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돌린다. 무시무시한 비밀을 간직한 문을.......

 

 “수희야, 수희야아~”

 

 이번 꿈은 운이 좋았다.

 

 대개의 꿈은 아무리 애를 써도 돌아가지 않는 문고리를 돌리려 애쓰다 끝이 난다. 열기 위해 온 힘을 쓰는 육체와 절대로 열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의 극단적인 갈등에서 탈진한 채, 왼손은 기이하게 공중에 뻗힌 채.

 

 그렇게 깨어나면 온 몸과 요까지 젖을 정도로 땀이 흥건했고, 다시 잠을 자기 어려웠다.

 

 하지만 드물게, 운이 좋을 때가 있다. 이날처럼.

 

 문고리에 손을 댄 순간 수희를 부르는 소리가 있다.

 

 “수희야, 수희야. 어디야? 너 또 지하실이야?”

 

 강혁, 강혁 오빠다. 열 살의 강혁이 지하실 입구에 버티고 서서 수희를 부른다.

 

 “얼른 올라와. 엄마가 감자전 해주셨어. 빨리 먹자.”

 

 수희의 발은 비로소 주문에서 풀려난다. 수희는 석양을 등지고 구원의 사자처럼 환하게 빛나는 강혁을 향해 질주한다.

 

 “오빠, 오빠. 강혁 오빠!”

 

 왜 이제 왔냐고, 왜 이제 깨우냐고 책망하듯, 그리고 이제라도 깨워줘서 감사하듯. 수희의 발이 두려움을 걷어내며 지상으로 향한다.

 

 강혁 오빠가 꿈에 나온 날은 아침까지 푹 잘 수 있었다. 개운한 정신으로 깨어나면, 강혁 오빠가 그만큼 더 그리웠다.

 

 그래서 더 찾을 수가 없었다. 관서동 재개발 지구를 다 태우고, 이웃마저 산산조각이 난 대 화재의 그 날처럼 또 강혁을 잃을까봐.

 

 아니 강혁을 찾고 나면 더 이상 꿈 속 악몽에서 구해줄 사람이 없을까봐.

 

 동네 사람들의 보상비를 다 가로채 날라버린 강혁 아버지처럼, 강혁도 형편없이 성장했을까 두려워 수희는 감히 찾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

 

 할머니가 얼갈이 배추로 된장국을 끓이셨다. 슴슴하게 간이 된 국을 한 수저 뜨며 수희는 부쩍 허리가 굽은 할머니 얼굴을 살폈다.

 

 “할머니, 강혁 오빠네 아줌마 말이야.......”

 

 탁.

 

 아빠가 소리가 나도록 수저를 내려놓았다. 왜 아침부터 그 집 이야기를 꺼내냐는 듯, 그렇지 않아도 날씨가 더워지면서 화상 상처가 덧나기 시작하는데 왜 마음의 상처까지 들쑤시냐는 듯.

 

 하지만 아빠는 언제나 그렇듯 수희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하는 채소 노점 가판대를 돕는 시늉만 하면서 살아온 세월. 벌어들이는 푼돈보다 피부 이식 재수술로 훨씬 더 많은 돈을 써야 하는 처지 때문에 아빠는 언젠가부터 수희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잘 커줘서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그런 아빠가 유일하게 화를 내는 때가 바로 강혁 오빠네 이야기 나올 때였다. 아빠가 화상 상처를 입게 되던 날, 관서동 동네가 뿔뿔이 보상금도 못 받은 채 흩어지던 날, 짓무른 살갗보다 무너진 신뢰가 더 아프다며 차라리 죽고 싶다고 울던 그 날 이후.

 

 아빠가 지팡이를 집고 일어섰다.

 

 “밥 다 먹고 가거라. 종일 힘들텐데.”

 

 안방으로 들어가 누워버리는 아들을 바라보던 할머니가 수희를 책망했다.

 

 “아침부터 왜 그 집 야그를 꺼내 그랴? 늬 아버지 맴 상처가 너덜너덜한 거 몰러?”

 

 수희는 목소리를 낮췄다.

 

 “할머니, 아줌마 어떻게 사신다고 혹시 소식 들었어? 어째 요새 꿈에.......”

 

 “늬 꿈에 뭐시 보여? 무슨 숭한 꿈이여?”

 

 할머니의 주름이 더 깊게 패였다. 고랑고랑 근심이 들어찼다.

 

 “아니, 숭한 꿈이 아니고요. 그냥....... 요새 자꾸 예전 살던 관서동이 보여서.......”

 

 할머니가 숟가락을 상에 팽개치고 갑자기 수희의 왼팔을 움켜 잡았다.

 

 할머니는 수희의 벙벙한 옷소매를 걷어올리고 어깨를 살폈다. 주름 속에 묻힌 할머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흐려지진 안했넌디....... 색깔은 쌩쌩한디.......”

 

 할머니는 안도한 듯 고개를 긴 숨을 내쉬셨다.

 

 수희의 어깨에는 동그란 원 속에 봉신(封神)이란 한자가 삐뚤빼뚤 빨갛게 새겨져 있었다. 수희가 이게 무슨 문신이냐고 물었을 때 할머니는 엄숙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그건 늬 생명줄이여. 즐대 없애려고 하믄 안 되는 거여.”

 

 어깨가 불타듯 아팠던 통증이 이 문신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수희는 오래 전에 짐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관서동 그 집과, 그 지하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하지만 두려웠다. 그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할 시커먼 어둠이.

 

 아직은....... 아직은.......

 

 수희는 강혁 오빠네 소식을 묻는 건 미뤄두고 주름진 할머니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할머니. 인제 일 그만 하세요. 아빠 덥지 않게 집에서 봐 주시고.”

 

 “꼼지락 거려야 죽지 않는다. 내 죽으믄 불쌍한 늬 아버지는.......”

 

 할머닌 손을 홰홰 저으며 수희에게 어여 밥이나 마저 먹고 출근하라고 채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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