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의 관계가 형성된 후, 손목의 움직이는 숫자를 붙잡을 수 있는 자를 펜들럼이라 한다.》
살고 싶다. 한순간도 이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겨울은 10일이라는 지옥 같은 시간 내내 그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래도 집이라고 아늑하다고 생각했던 곳에서마저 도망치는 심정이 이리도 처절할 줄은 몰랐다. 영하마저 자신을 버리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에 매일 밤 화장실에서 몰래 울음을 토해내야 했다. 그것도 매번 새롭고 낯선 화장실이었다.
영하가 제일 고생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극심해져 가는 불안은 강박을 낳았고, 그것은 겨울을 잠시라도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게 했다. 둘은 때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닐 곳을 찾아야만 했다. 그들이 발 딛고 서 있는 곳은 날마다 달라졌으나 시설 좋은 호텔인 것만은 변함없었다. 고집을 가장한 영하의 배려였다. 말레타가 그럴만한 재력이 있을 리는 없었으니, 전전긍긍하며 호텔을 바꾸는 것도, 그 비용을 치르는 것도 자연스레 모조리 영하의 몫이 되었다.
"ㅅ,싫어!!"
"겨울아…!"
"아…."
"쉬, 괜찮아."
"미안. 나 괜찮아. 미안해…영아."
뿐만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틈만 나면 자신을 찾아와 괴롭혀대는 악몽에 겨울은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일을 마치고 이제 막 집으로 들어온 영하가 다급히 그녀를 달래주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릴 정도였다. 더해지는 불안과 영하에 대한 미안함은 날이 갈수록 제 몸집을 불려 나가 겨울을 억눌러왔다. 손목에 새겨진 두 자리 숫자를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기 시작하던 즈음엔, 이제는 자신이 이런 식으로라도 살아가야 하는 게 맞는 건가 싶은 의구심까지 들었다.
가장 최악인 것은,
"나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그냥 지ㄱ,"
"그런 말 쉽게 내뱉지 말라고 그랬어."
"무슨 말도 내 마음대로 못 해?!!"
엿 같은 성격이 더는 구제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난 이렇게나 초조한데, 넌 왜 그렇게 냉정할 정도로 차분해? 내가 도와준다고 해도 아무것도 못 하게 해, 날 어디 나가지도 못하게 해놓고 넌 도대체 천하 태평하게 뭘 하고 있는 건데? 말이라도 해주면 안 돼? 사람 불안하게 왜 그러는데. 왜 혼자 여유롭게 구는 건데!!"
신경질 부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 시원히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는 영하가 답답했다. 겨울은 이번에도 역시나 축 처진 눈썹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영하의 이유 모를 행동에 속이 울컥했다. 그러기를 잠깐, 맥없이 처지는 고개를 숙여 영하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대면, 또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끌어안는다. 품 안은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따뜻하기만 하다. 절로 아픔을 토해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 말레타인 거 잊지 말란 말이야."
겨울은 제 존재가 너무나도 비참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원죄가 된다는 것이, 목을 죄어오는 숫자, 고작 숫자 따위에 하루하루를, 아니, 일평생을 지옥 같은 현실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이 서럽고 억울해 툭하면 눈물을 흘려댔다. 그러나 자신을 탓할 수는 없었다. 날이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정신머리를 붙잡고 한다는 생각이 '다 네 잘못이지. 그러게 왜 말레타로 태어나서…. 쯧쯧.'과 같은 거라면, 그 끝은 안 봐도 훤했다.
그래서 그 모든 설움과 원망의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에이블이 싫어."
과연 에이블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미치도록 증오스러워.”
“…….”
"너무 증오스러워 죽겠어, 영아."
언제나 부드러운 말로 나를 달래던 영하는 그날따라 유독 말이 없었다.
***
그날은 겨울이 제법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 때였다. 고작 2주밖에 안 되는 시간이 짧은 것 같으면서도 왜 이리 길게만 느껴지는지 싶다. 손바닥 위 모든 나침반 바늘의 반쪽이 검게 변했다. 멈출 줄 알았는데 그것은 오히려 유유자적하게 좌우로 흔들거린다. 문득 손목에 새겨진 숫자‘12' 위로, 길게 그어진 희미한 상처에 눈이 갔다. 요즘 들어 멍하니 그것을 보는 시간이 늘어갔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걸 재차 확인하고 싶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손목으로 가는 빌어먹을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그냥 그어버릴까? 더 세게 그으면 이번엔 성공하지 않을까? 어차피 이틀밖에 남지 않은 거, 굳이 꾸역꾸역 점수를 채워나갈 필요가 있을까?
"아으…."
작고 얇기만 한 과도 하나를 손목 위에 두고서 끅끅대는 제 인생이 너무 불쌍해 겨울은 한참을 울었다. 흉터를 남긴 상처 위에 다시 각 맞추어 올려놓은 칼끝이 유독 시리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린다.
힘없이 떨어뜨린 과도가 아무런 역할도 해내지 못해 심술이 났는지 기어코 발등을 조금 그어놓고야 말았다. 금세 붉은 선을 그리며 몽글몽글 차오르는 핏방울을 보다 발등을 슬며시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또 그렇게 얼마간을 엉엉 댔다.
나는 왜 말레타로 태어나야만 했는가. 도대체 세상에 살아 움직이는 질병을 퍼뜨린 자는 누구인가. 내 부모는 내가 에이블도 펜들럼도 아닌 빌어먹을 말레타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고 돌아가셨을까?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알았다면 진작에 내 가늘어빠진 목숨 줄을 끊고도 남았겠지. 겨울은 그렇게 원망할 이를 찾지 못해 제 존재를 부정하다 지쳐 눈을 감았다. 쉽사리 잠이 들지도 못했다. 눈을 떠 바라보는 나침반도 이미 충분히 어두운데, 눈을 감아 보게 되는 어둠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
눈을 뜨니 침대 위에서 바스락거릴 정도로 잘 마른 흰 이불을 덮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켜진 스탠드 불빛을 석양이라 착각할 만큼 꽤 깊이 잠들었었다. 고요함이 스며든 방 안으로 선선한 밤바람이 가세해 나른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책장 넘기는 소리까지 완벽했다.
"영하야."
볼품없는 목소리로 정적을 깼다. 잠길 대로 잠겨버려 이름 하나 부르는 데에도 사포 긁는 듯한 잡음이 대단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멎었고, 곧 영하가 답했다.
"더 자."
밤인 건 확실했지만 몇 시인지는 몰랐다. 얼마간 잠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아직 하루가 지나지는 않았다. 손목에 비치는 붉은 숫자가 오늘따라 유독 피처럼 진하고 검붉어 보였다. 늘어나지 않은 숫자에 조금쯤은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면, 그건 정녕 미친 생각일까? 달라진 것은 없었는데도 새삼 주어진 시간이 아까워 겨울은 누운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 아래편에 있는 큰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책을 읽던 영하가 검지로 아랫입술을 가볍게 쓸다가 책장을 넘겼다. 일어난 겨울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오로지 자그마한 종이 책에 두 눈을 고정한다. 뭔가 이상하다. 영하가 겨울을 보지 않는다. 왜지? 뚫어지라 쳐다보니 영하는 대답 대신 미간 사이를 살짝 찡그렸다. 넘기려던 책장 위에 손을 그대로 얹은 영하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다음부턴 그러지 마."
아, 이제야 좀 알겠다. 이불 끝을 조금 들추어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발등에 깔끔하게 붙은 네모반듯한 밴드를 본 뒤에야 겨울은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바닥에 떨어뜨린 과도도 이미 사라진 뒤였다. 괜스레 이제 와 후회가 물밀 듯 밀려온다. 물길이 못내 뒤 삼킨 제 미련함 위로 커다란 파도를 보냈다. 어지럽던 속이 몰아치는 파도에 휩쓸려 모조리 떠내려가 버렸다. 후회와 미련만 고스란히 남긴 채.
아, 내가 영하에게 못 할 짓을 했구나. 겨울은 지난번 손목을 그었을 때 보았던 영하의 표정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영하의 말이 왜 그리도 가슴에 사무치게 아려왔는지 모르겠다. 기분이 고저를 바쁘게 그려대다가 감성적인 상태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던 차에 영하가 치고 들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잡아먹을 듯 위아래로 꿀렁이던 감정의 파도가 급작스럽게 고요함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나 단순한 존재였을 줄이야. 그것도 아니라면 나를 삼켜가는 불안에 적응하기라도 한 걸까? 갈팡질팡 불안에 휩싸이던 마음이 너무나도 손쉽게 안정을 되찾아 가는 듯했다.
몸을 덮은 이불을 걷어내고 발등을 감싼 밴드를 손끝으로 살며시 매만졌다.
살아가고자 하는 이유를 만졌다.
"뭐가 필요한데. 그냥 누워있어. 가져다줄 테니까."
퉁명스러움이 가득 묻어난 말투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겨울을 말려가며 자신이 대신 허드렛일을 자처하겠다는 의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웃었다.
"뭘 잘했다고 웃어, 웃기는."
말을 꺼내면서도 자연스레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는 영하를 보며 겨울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속이 뻥 뚫리는 상쾌하도고 묘한 기분이 겨울의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인가.
더는 울지 않을 것이다. 죽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겨울의 '다음'을 당연하다는 듯 기약하는 영하를 위해서라도, 또 남은 날을 소중히 채워나갈 자신을 위해서. 정부 측에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살기 위해 열심히 발악하다가, 그러다가 떠날 것이다. 그때가 온다면, 평생에 없을 '14'를 손목에 새긴 채, 그것을 멋진 피날레 삼아 미련 없이 떠날 것이다.
"영아."
"…왜."
"우리 나가자."
잡히든 말든 지금을 즐길 것이다.
두려움에 벌벌 떠는 건 이제 이걸로 됐어.
***
밤공기는 묘하다. 사람을 들뜨게 하고, 마치 다른 세상에 겨울 자신과 영하만 뚝 떼어놓은 것 같은 기분을 준다. 그 날은 유독 사람이 더 없었다. 주말이라 영하가 출근하지 않아 조금 더 먼 곳에 있는 호텔로 올 수 있었다. 바로 앞에 바다가 있어 더욱 환상적이었다. 그래서 더 묘한 건가. 신기하게도 바닷바람이 전혀 비리지 않다. 조금씩 다가오는 여름 기운도 아직까진 밤을 장악하지 못했다.
살결에 스며들 듯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기분이 좋아져 살짝 눈을 감았다. 신고 있던 신발까지 벗어가며 발바닥에 닿는 까슬까슬한 모래를 그대로 느꼈다. 상처에 닿는다며 걱정스레 다가오는 영하에게 괜찮다고 이르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작게 웃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도 여유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근간에 보지 못했던 영하의 편안한 모습에 잠시나마 겨울은 제 시간도 멈춘 것 같다고 느꼈다. 손목의 숫자도 밤이라 잘 보이지 않아 금상첨화였다. 야광마냥 눈치 없이 빛을 내뿜기라도 했다면, 아마도 그 자리에서 제 손목 위로 모래집을 지어버릴지도 몰랐다.
"좋다, 영아."
"그러게."
잔잔하게 치는 파도를 코앞에 두고 모랫바닥에 영하와 나란히 앉았다. 겨울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추위에 약한 그녀가 불어오는 바람에 때 이른 추위를 느껴 몸을 살짝 움츠렸더니 영하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어깨 위로 가디건 하나를 걸쳐주었다. 어디서 챙겨왔나 싶어 고개를 살짝 돌렸더니 어느새 캐쥬얼한 반팔 차림으로 바뀐 영하가 그 답이었다. 부러 그 배려를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주지 않았더라면 빼앗기라도 할 생각이었으니까. 굽힌 무릎을 팔로 감싸 안자 완벽히 보호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 지금이라면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
"뭘?"
"악몽. 무슨 내용인지."
"…안 해도 괜찮아."
"아니. 영이 너한텐 할래."
언제나 똑같은 악몽. 눈을 감아도 떠도 똑같기만 한 어둠이 지나면, 그곳엔 얼굴도 모르는 여자가 서 있다. 흐릿한 잔상으로 만들어진 형상을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파 눈을 잠시 감았다 뜨면, 여자는 제게서 조금 더 멀어져 있다. 겨울은 그녀를 제 엄마라 짐짓 예상했다. 여자는 언제나 제게 뭐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들리진 않는다. 꿈이 늘 그랬다. 말을 하는 건 맞는지, 들리는 말이 정말 상대방 입에서 나오는 게 맞기는 한 건지. 슬픈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커다란 시계가 엄마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왜, 그 작품 있잖아. 시계가 축 늘어져서 나무 위에도 있고 테이블 위에도 있고 하는 그림. 겨울은 생각이 날듯 안 날듯한 표정으로 미간 사이를 약하게 찌푸리며 머리를 굴렸다. 영하는 골똘히 생각하는 겨울을 지긋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달리."
"응?"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이라는 작품이야."
"기억의…지속."
"그래서 무서웠어? 시계가 엄마 위로 녹아내려서?"
어. 막아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어. 몸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워서 앞으로 나아가기가 너무 힘든 거야. 그래서 그냥 지켜봐야만 했어. 근데 그 시계가 점점 내 쪽으로 흘러와. 뒷걸음질 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오히려 더 가까워져. 그리고 어느 순간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게 이미 내 발목의 절반을 집어삼키고 있는 거야.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쳐도 아무 소용이 없어. 그냥 답답하기만 해.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도 않아서 더 막막하고 무서운데, 그래도 끝까지 용을 쓴다? 그러면 항상 마지막에,
"누가 내 손을 잡아."
"손을?"
"어. 근데 웃긴 게 내가 먼저 뻗어놓고 내가 뿌리쳐."
"누군지는 모르고?"
"너겠지. 아니, 네가 확실해. 눈 뜨면 항상 네가 나 달래고 있잖아."
"꿈에서도 내가 너 지키네. 네가 무서워할 거 하나도 없네."
"맞아, 없어. 이젠 안 무서워."
"장하다, 우리 동이."
그 말을 끝으로 겨울은 머리를 살짝 옆으로 꺾어 영하의 어깨에 기댔다.
"영아."
"응."
"어땠을까? 우리 엄마."
영하는 대답이 없었다.
"날 가졌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그런 말 하지 마."
"아빠랑 평생 행복했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엄마의 시간을 모조리 빼앗아버렸잖아."
사실이었다. 펜들럼이면 몰라도 말레타가 임신을 하게 된 이상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야 했다. 임신 하나로 안정을 유지했던 파장은 불안정의 기로에 서게 된다. 말이 불안정이지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배웠다. 어차피 요즘 같은 세상엔 말레타든 펜들럼이든, 그들을 보는 것 자체가 죽기보다 더 어려웠지만. 어찌 되었든 안정적으로 고정된 숫자 '1'에 움직일 여지가 생긴 이상 끝은 불 보듯 뻔했다. 결국, 임신은 죽음이라는 얘기지, 뭐. 아이에게 제 생명을 건넨 말레타는 죽는다고 그랬다. M이 없으니 곧 그 파트너의 숫자도 움직이겠지.
나는 내 부모의 끝을 만들어낸 자. 겨울은 은연중에 제 어미를 말레타라 정의하고 그녀의 죽음을 제 탓으로 확정 지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말레타인지 펜들럼인지 모를 엄마의 몸 안에서 그녀의 생명을 조금씩 갉아먹으며 자라난 살인자를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어떻게 보면 노만이 가장 위대한 존재였다. 평범하게, 아무런 얽매임 없이, 그저 제 인생 하나만 살아가면 되는 거니까.
"…행복했을 거야."
긴 침묵 끝에 영하가 답한다.
"세상 누구보다도 소중한 너와 함께였잖아."
바라보지 않았음에도 영하의 목소리가 눈앞에 보이는 깊은 바다만큼 푹 잠겨있음을 가늠할 수 있었다. 영하는 유독 겨울의 출생에 관한 대화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 말 한마디가 조심스러웠고, 주저함이 가득했다.
"그런 축복 속에 태어난 게 너야."
"……."
"그러니까…네가 그 삶을 누릴 수 있게, 내가 꼭 살릴 거야, 너."
"……."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강한 다짐의 근원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영하가 겨울 자신을 제 목숨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고, 앞으로도 그 사실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래 왔고, 지금도, 그리고 다가올 나중도 그래야만, 그게 그녀가 아는 영하였으니까.
그리고 14를 목전에 둔 지금의 겨울 앞에 나타난 한 남자가, 그녀의 M이 말한다.
"같이 붙어 다니는 놈이 에이블인지 노만인지도 구분 못 하는 너를, 내가 왜 살려야 하지?"
영하가 에이블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