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존재끼리는 서로의 파장을 느낄 수 있다.》
"영아."
겨울이 영하를 영이라 부를 때면,
"왜, 동아."
영하는 겨울을 동이라 부르곤 했다.
겨울과 영하. 꽤 어울리는 한 쌍의 이름이었다. '영하의 겨울', 문법적으로도 들어맞는 말인 동시에 그것은 곧 그들의 관계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영하의 겨울이었고, 영하는 영혼의 동반자를 넘어선 겨울의 전부였다.
왜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비록 매번 손목에 스프레이를 뿌려 숫자를 가리는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했기는 하지만, 말레타인 겨울이 교묘하게 정부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평범한 노만처럼 그들의 구역에서 학교에 다니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 고등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영하를 만나 3년을 붙어 다니다가, 대학 등록금을 모두 지원해주겠다던 영하의 조건 없는 도움을 거절하고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게…. 별다른 제재 없이 말레타치고는 호화로운 인생을 누려왔다는 것을 왜 이제야 깨달았던 걸까.
이 남자의 말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거짓말이 아닌 이유를 찾는 게 더 힘들었다. 영하에게서 느껴지던 왠지 모를 위화감의 이유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모든 답은 한 곳으로 귀결되었다. 부정하려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너무나 뚜렷하게 눈에 들어차는 진실.
왜 그렇게 한결같은 모습이냐고 놀려댔던 외모도, 겨울이 고등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 무상으로 교육과 생활할 거주지를 지원해주던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도, 이따금 사람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물건들을 아무렇지 않게 들던 모습도, 그리고 오래 전 차가운 실험실에서 날 꺼내준 그 사람까지도. 이 모든 것이 다 영하가 에이블이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둔해도 너무 둔하잖아."
"…아."
"이렇게나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가시 돋친 말투와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목소리가 연이어 머릿속을 휘저어 놓는다.
"거짓말."
"꽤 오래 붙어 있었나 봐. 하마터면 네가 에이블인 줄로 착각할 뻔했어."
"개소리 마. 에이블이면 손바닥 문양이랑 손ㅁ,"
"너도 가리고 다닌 거 아니었어?"
"……."
"거 봐. 요즘 같은 세상에 문양 안 보이게 하는 것쯤이야 별거 아니라니까."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멍하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빙빙 돌아가던 톱니바퀴가 멈추어버린 거로도 모자라 와장창 무너져 내린 기분이었다. 빠져버린 나사 몇 개를 주워 다시 제자리에 끼워 넣는다고 해도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영하는 왜 내게 거짓말을 한 거지? 도대체 왜? 이것도 실험의 일부인가? 나를 두고 벌인 거대한 쇼, 그런 건가? 에이블이 파장이 맞지 않는 말레타와 있어서 얻는 게 뭐지? 뭐가 이렇게 엿 같고 그래, 영하야. 겨울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그 이름을 머릿속으로 수십 번 되뇌며 외쳐댔다. 겨울은 영하의 대답이 간절했다.
"자, 이제 다시 얘기해 봐."
"……."
"지금 그 상태로도 살고 싶다고 말할 수 있나?"
"……."
"실낱같은 희망이라 믿었던 누군가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한 삶이라도."
"……."
"버림받은 삶이라도."
"……."
"그래도 살고 싶어?"
그러게.
***
겨울은 생각하길, 제 삶은 비록 보잘것 없었지만 말레타로서는 절대 누릴 수 없는 행복의 선상에 있었다. 국가정보국이 운영하는 말레타 수색대에도 잡혀본 적이 없었고, 허구한 날이면 파다하게 죽어 나가는 실험실의 생쥐 꼴이 된 적도 없다. 그래. 따지고 보면, 그렇게 보잘것없는 삶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겨울이 가지 않게 힘써주는 영하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벌써 녹아 사라져버렸을 계절이었다. 오로지 제힘 하나만으로 열심히 지켜왔을 단 한 명의 노력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이제 그만 좀 울어라, 한겨울."
영하 오면 안 된단 말이야. 제발 좀 멈춰달라고. 부탁이니까, 제발!
베개 위로 있는 힘껏 고개를 처박고서 고함을 질렀다. 처절한 절규가 제법 맛있었나 보다. 솜 사이로 잘도 내 소리를 먹어대는 베개 위로 쉴 새 없이 숨을 토해냈다. 울음이 곧 잦아들었다. 간헐적으로 내뱉던 숨소리도 함께 멎어 들었으면 싶었다.
영하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을 힘이 없다. 용기가 없다. 마음 같아선 영하가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가버린 채 이야기하고 싶다. 소리치고 싶다. 자신이 에이블한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알면서 어떻게 제게 그럴 수 있냐고. 어떻게 장장 10년이란 시간을, 아니, 어쩌면 훨씬 더 전일지도 모를 그때부터 자길 속여올 수 있었느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영하만의 단정한 옷자락을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리고 그가 제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싶었다.
타이밍도 죽여주지. 나침반의 절반이 모조리 어둠에 먹혔다. 숫자가 13을 막 지났다.
"아…인생 참, 개 같다."
미칠 것 같다. 다 무너뜨리고 싶다. 부숴버리고 싶다. 더럽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의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다 못해 흘러 넘쳤다. 내가 아무리 나쁜 마음을 자주 먹고, 꼬인 심성이라 학교에서 문제도 몇 번 일으켰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좀 너무하지 않나? 그러고보니 문득 떠오른 어느 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설마….
「난 이렇게나 초조한데, 넌 왜 그렇게 냉정할 정도로 차분해? 내가 도와준다고 해도 아무것도 못 하게 해, 날 어디 나가지도 못하게 해놓고 넌 도대체 천하 태평하게 뭘 하고 있는 건데? 말이라도 해주면 안 돼? 사람 불안하게 왜 그러는데. 왜 혼자 여유롭게 구는 건데!!」
내가 죽기만을 기다린 건가?
그러다가도 겨울은 지금 이런 상상을 하는 제 자신이 치가 떨릴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영하를,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자 숨통이었던 사람을, 단지 에이블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너뜨리고 왜곡하는 것이 정당한 처사인가 싶었다. 내가 뭐라고. 고작 말레타 따위가 되어서는 감히 에이블에게 날을 세우고 달려들려 하느냐고. 애초에 저주스러운 암 덩어리로 태어나 행복을 바랐던 것 자체가 잘못된 마음이었다. 생각해보면 영하의 모든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말레타 인체실험을 위한 연극이었다 하더라도 감사히 받아들여야 했다.
감사히?
정작 억울한 건 난데….
"아아악!!!"
무슨 정신으로 완성했는지 모를 체스판을 뒤엎으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바닥에 떨어진 체스 말들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곳곳에 나뒹군다. 두려움에 휩싸일 때마다 영하가 제게 가르쳐주던 방법이 이제 더는 아무런 소용 없다. 안정을 되찾고자 손을 눈 내리는 한겨울에 장갑을 끼지 않아 시뻘게진 아이의 것처럼 벌벌 떨어대며 체스 말들을 자리에 놓았는데도 불안이 해소되기는커녕 더 어지러이 뒤엉켜 든다. 순간 말 머리 모양의 나이트와 눈이 마주치자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다른 말들마저 자신을 공격하는 무기처럼 느껴진다. 발 딛고 선 이 세상에서 겨울은 폰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졸개보다도 못한, 아예 판 위로 발을 올릴 수조차 없는.
왜. 도대체 왜 나한테 그런 거야? 영하야, 답 좀 해줘.
언뜻 보면 이중 자아를 가진 자의 원맨쇼인 듯했다. 처절한 절망의 끝에서 제정신을 잡으려 아등바등 눈물겨운 사투를 벌이는 말레타의 발악이 좀처럼 끝을 보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고작 말레타가….
아니, 왜 내가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 거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어느새 살고자 하는 본능이 말레타라는 위치를 자각하게 해주는 이성과 비등해졌다.
이성이 아주 근소한 차이로 우위를 차지했을 때 눈물이 멎어 들었다. 머리가 새하얘진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 그래. 막말로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꼴이 우습게 짝이 없지. 죽는 그 순간 치졸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영하 앞에서는 그런 마지막 모습을 남겨주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삐리릭-
"겨울아, 일어나. 지금 같이 가야 할 ㄷ…."
연극의 막을 무사히 내릴 수 있도록 사라져 줘야지.
***
어느새 아침이다. 겨울은 해가 뜰 때까지 멈추지 않고 걸었다. 나침반이 얼만큼 어둠에 잡아 먹혔는지도 보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이렇게 살아서 걷고있는 걸 보면, 클로징 데이트에 완전히 다다르지는 않았나 보다.
「손 똑바로 올려 봐.」
「나한테 화내지 마. 나 잘못한 거 없어.」
「누가 뭐래? 손목 굽히지 말고 펴. 스프레이 뭉치잖아. 그리고 나침반 가려. 감출 수 있으면서 왜 드러내는 건데, 그건.」
「그냥. 얘는 내 마음대로 가려지는데, 왜 이깟 숫자는 안 가려지나 싶어서.」
「얼른 가리고 손목 제대로 펴.」
「학생회장 힘이 확실히 세긴 센가 봐. 껌딱지 한 시간 떼는 거로 마무리될 만큼 별거 아닌 싸움은 아니었는데. 그치, 영아?」
「자랑이다.」
「학생이랑 싸운 것도 아니고. 상대가 무려 자존심 없으면 시체라는 역사 선생이었는데.」
「이 정도에 그친 걸 다행으로 알아.」
「더 나갔다고 해도 상관없어. 나라의 교육자가 되가지고 말이야. 말레타는 멸종하길 잘했다느니 폐기처리 해야 한다느니. 아주 에이블 찬양론을 펼쳐대는데, 그 꼬락서니를 더 두고 보기가 힘들더라. 쓰레기 새끼.」
「쓰읍. 말 예쁘게 안 하지.」
「아, 미안. 씨-발새끼지.」
「겨울아."」
생각을 곱씹을수록 더한 짜증이 밀려온다. 시간이 갈수록 영하와의 추억이 모조리 추악함으로 점철되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의 아래에는 빌어먹을 '에이블'이라는 까닭이 존재했다. 다 자기가 에이블이어서 그랬던 거야? 그래서 내 편 안 들어줬던 건가? 겨울은 피처럼 검붉은 카펫이 깔린 바닥에 눈을 고정한 채 그저 걸었다. 기나긴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잡다한 생각이 끊임없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평소에는 기억하려 노력해도 떠오르지 않던 학창시절 일화가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제 마음을 약 올리기라도 하려는 듯 열심히, 그리고 바삐 재생된다.
「*DNIPM은 뭐 하는 곳이길래 공고가 뜰 때마다 저 난리래? 에이블이고 노만이고 할 것 없이 아주 미쳐서 달려드네.」
*DNIPM(Office of the 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 Peace Makers;국가정보국 피스메이커즈)
「그냥 나랏일 하는 놈들이지, 뭐.」
「아, 다들 말레타 하나 없애는 일에 저렇게 열심이었던 거구나.」
「…….」
「너는, 영아? 네가 일하는 곳도 그래? 막 보자마자 바로 죽여야 한다느니,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야 한다느니, 그런 소리 하는 새끼들이 있는 곳이야?」
「걱정하지 마. 네가 위험해질 일 없어.」
겨울이 좋아하는 반찬들을 그녀의 밥그릇 쪽으로 옮겨놓던 영하는 그렇게 말했었다. 한창 말레타 색출작업에 한창이라 한동안 집 밖에 나가지 못했던 때에 나눈 대화였다. 집 안에 있으면서도 불안함에 몇 번이고 서랍의 스프레이를 꺼내어 손목에 덧칠하던 제 모습도 기억하고, 불안해하던 자신을 달래는 수완으로 처음 가르쳐주었던 체스 게임도, 순간마다 지었던 영하의 표정도, 자기를 지키겠다 신신당부하던 말투도, 하물며 그날 날씨까지도 똑똑히 기억하는데….
"에이블…영하가, 하."
"영하? 그 영하?"
"……?"
"뭐야. 그놈 파장이었어?"
"……."
"어쩐지. 말레타가 이렇게 홀로 버텼을 리가 없지."
"…아…."
눈칫밥을 오래 먹고 살아와 두뇌 회전이 꽤 빨랐던 겨울이 유일하게 둔했던 영역이 이름하여 '영하구역'이었다. 미묘하게 어긋나있던 수십, 수천 장의 퍼즐 조각들이 천천히도 아니고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제자리를 찾는데, 그게 어찌나 소름 돋던지, 눈앞이 아찔해졌다. 완성된 그림을 차마 뜬눈으로 바라볼 수 없을 것 같아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 대신 들리는 것으로 새로운 영하가 겨울의 안에 재정립되어가고 있었다.
"걔도 참 웃겨. DNIPM 놈이 말레타를 숨겨?"
나른하고 느릿느릿한, 피아노의 왼편 어딘가에 있는 건반을 하나 누르면 그것과 엇비슷할법한 남자의 목소리가 조곤조곤한 말투로 청천벽력같은 말을 내뱉는다.
"색출작업을 이끌었던 놈이."
소름 끼쳐.
종일 영하의 흔적이 묻어난 호텔을 떠나 이곳저곳 방황했으나 14를 얼마 남기지 않은 순간 겨울이 당도한 끝은 또다시 이 호텔이었다. 어중간한 위치에서 걸음을 멈추자 손바닥 위 나침반이 정확히 방문 앞을 가리킨다. 사실상 이미 검은 시간에 거의 잡아먹혀 움직이지도 않는 나침반이었으나, 겨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왔다 갔다 움직이는 바늘이나 매일 바뀌어대는 숫자라면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지긋지긋했는데, 다행이라 해야 할 지 이젠 아무런 감흥조차 없다.
문 열려있어. 문고리에 손을 얹기도 전에 남자 특유의 맥 풀린 목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부드럽게 밀리는 문을 열고서 들어간 그곳엔 안락의자에 몸을 삐딱하게 뉘곤 들어 올린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길이라도 잃어버렸나 했어."
쳐다보지도 않고서 피곤하다는 듯 눈가를 비비던 그는 오늘도 역시나 나른함의 중심에 있었다. 어쩌면 에이블로서는 느껴보지 못했을 피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목소리만은 변함없이 다정하다. 살짝 가라앉았으나 부드러웠다. 내뱉는 단어마다 물기가 어려있는 듯했다. 그러고보니 가려진 손 틈 새로 언뜻 보이는 눈가가 촉촉하다. 기어이 저를 찾아온 삶의 끝자락이 애달파 울었는지도 모른다.
"아홉 시 반이야. 원래 이 시간엔 다들 깨어있지 않나?"
"……."
"얼마만에 느껴보는 피곤인지 모르겠어."
"……."
"한 시간 뒤엔 안녕이겠네."
천천히 움직이는 남자의 손목에 새겨진 '1'이 꽤 묘했다. 다 죽어가는 힘없는 에이블이라 말레타와 다름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왠지 모를 위압감은 여전히 그와 함께했다. 그러나 그것이 겨울의 삶을 끝맺게 할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지고 찾아오라고 그랬지."
「네가 살아야 할 적절한 이유를 찾는다면, 그땐 날 찾아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는 너도 잘 알 테지.」
참 이상하지.
"찾아온 거야? 이유?"
"그쪽은 삶에 미련 없다고 그랬잖아. 내 덕분에 죽을 수 있어서 오히려 고맙다고."
「난 이제 미련 없어. 원망은 있어도. 오히려 이제야 죽을 수 있게 되어 고마울 뿐이야.」
인간이라는 게 참 간사하고 약아 빠진 것 같다.
무대의 피날레를 위해 모든 걸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는데,
"갈 때 가더라도."
겨울은 자꾸만,
"복수는 하고 가야지."
2막으로 넘어가고픈 욕심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