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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관계
작가 : 헤르쯔
작품등록일 : 2017.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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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증
작성일 : 17-07-12     조회 : 322     추천 : 0     분량 : 7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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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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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선배님! 마침 잘 오ㅅ…."

 

 현란한 손놀림으로 손안에 든 작은 기기를 조작하던 수형이 영하를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확히 말하자면 평소에는, 냉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선 누구 하나 잘못 걸렸다간 뼈도 못 추리게 할 것 같던 포스를 풀풀 풍기던 그였다. 지금은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선 그의 뒤꽁무니를 쫓는 게 영락없는 강아지 꼴이었다. 그랬던 그의 희소성 높은 환대가 영하 앞에서 무참히 가루가 되어버렸다.

 

 영하는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바삐 걸음을 옮겨 여러 대의 모니터들이 즐비하게 나열된 곳으로 향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어딜 그렇게 헤매다 왔는지 이곳을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단정했던 옷차림이 대판 싸움이라도 하고 온 사람의 것처럼 난리투성이였다. 넥타이는 어디로 사라지고 없었으며 목 끝까지 채웠던 단추는 두세 개가 날아가고 없는 상태였다.

 

 수형은 그런 영하가 낯설기만 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제 선배의 초조함에 저마저도 불안해졌다.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방울마저도 낯설었다. 에이블이 땀방울까지 흘릴 정도로 체력을 썼다는 것은 꽤 심각한 일에 말려들었음이 틀림없었다. 누구에게도 드러낸 적 없던 흐트러진 영하의 모습에 바라보는 수형의 심장박동이 급격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선배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18705…. 34."

 

 빠른 속도, 어쩌면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IT 실력을 보유한 수형보다도 더욱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좌표를 확인하던 영하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더 굳었다.

 

 "누구 찾으십니까? 컬프호텔이면…."

 "…젠장."

 "선배님 계셨던 곳 아닙니까? 어, 아까 제가 찾은 곳도…."

 

 영하의 얼굴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작게 읊조리던 그의 욕지거리에 당황한 수형이 몸을 움찔거리며 영하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사납게 그르렁대던 그가 금방이라도 수형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서였다.

 

 "트래킹 끝냈으면 좌표 재깍재깍 보내. 질질 끌지 말고. 내가 시간 많이 주지 않았나?"

 

 볼일이 끝났는지 영하가 숙였던 상체를 일으키고선 바로 뒤에 있던 수형 쪽으로 돌아보았다. 미약하게 남아있는 영하의 이성이 폭발하기 직전인 그의 화를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다. 삽시간에 수형을 둘러싼 두려움이 손에 쥔 기기 위로 여실히 드러났다. 수형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부여잡고선 애써 괜찮은 척 입꼬리에 힘을 주어 올렸다. 에이블의 기세를 쉽게 마주할 수 없는 노만의 최선이었다.

 

 "그렇지 않아도…방금 보내드렸습니다."

 

 영하는 대답조차 건네지 않은 채 수형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모습이 기둥 너머로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수형은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한껏 부풀러 올랐던 그의 가슴팍이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쑤욱 꺼졌다. 안정을 되찾은 후에도 수형은 한동안 그곳에서 발을 뗄 수 없었다.

 

 ***

 

 "복수는 하고 가야지."

 "…푸흐."

 

 겨울의 파격적인 제안에 돌아온 대답은 고작 실바람 같은 헛웃음이었다. 그러다 점차 그 소리가 볼륨 키우듯 커진다. 겨울이 말한 복수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기에 저렇게 소리 내 웃을까. 비웃음에 가까운 그의 반응에 기분이 팍 상한다. 남자와 그리 많은 말을 섞어본 것도 아니었지만, 그간의 대화를 통해 도출해낸 제 나름의 분석이 담긴 제안이 고작 웃음 하나로 귀결될 만큼 하찮은 취급을 당했다는 게 심히 언짢았다.

 

 염세와 비관을 넘어선 허망함 가득한 남자의 말투에서 분명 그 역시 배신당한 경험이 있다는 것을 추측해낼 수 있었다. 못 알아차리면 그게 둔해 빠진 멍청이지 싶을 정도로 자조적인 태도였으니까.

 

 혹시나 했던 예상이 들어맞았다. 한동안 허탈한 웃음을 곧잘 내뱉던 남자가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그를 자극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남자의 침묵엔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향한 가시 돋친 분노. 향하기만 했지 정작 도달하진 못했을 그것의 대상이 떠오르자마자 더는 웃을 수가 없었겠지. 쏟아내지 못해 속에서 오래 묵혀있던 증오가 남자의 생명을 갉아먹어 오다가 이제는 그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들고 있었다. 별다른 반항 없이 목숨을 내어주려던 남자가 생애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 같은 옛 추억에 사로잡혀 아쉬움을 토로하겠지.

 

 '정말이네. 이대로 죽긴 아깝네. 기왕 죽을 거, 화는 풀고 죽어야 속이 편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급격히 싸해지는 분위기에 힘입은 그의 한쪽 입꼬리가 씁쓸한 미소를 자아냈다. 한 손으로 다시금 제 이마를 짚어 얼굴이 반쯤 가려진 게 다행이었지 만일 그 얼굴을 한 채로 빤히 겨울을 쳐다보았더라면, 겨울은 아직 남아있는 제 금쪽같은 20분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숨이 멎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

 "넌 누구한테 복수하려고. 영하?"

 "아니."

 

 겨울은 따지자면 착하고 마음 넓은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살아서 이득을 본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말레타 낙인이 찍힌 자가 그런 성향에 속한다는 것은 인생에 자살골을 넣는 것과 별다를 바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억울해 빠진 인생에 굳이 멍청함과 미련함까지 덧댈 필요는 없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다. 약자의 위치라면 자연스레 느끼게 되는 생존본능이었다.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굳이 죽음의 문턱 앞에서까지 어리석은 고집을 피울 이유는 없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죽을 때가 되면 달라진다고 하는 건가 싶었다. 조금 더 무모해지고, 대담하고 뻔뻔해지는 자신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이 남자 앞에서 이렇게 터무니없는 말을 꺼내는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질병이라 부르고 멸시한,"

 "……."

 "모든 에이블에게."

 

 그래서 이렇게 에이블이,

 

 「넌 내가 살려.」

 

 영하가 미치도록 미운 걸지도 모르겠다.

 

 ***

 

 "다음 주 시험이니까 오늘은 진도 빼는 대신 첫 장부터 요약 들어갈 거야. 말레타는 지난 시간에 짧게 하고 넘어갔으니까 또 물어보지 말고. 이번 건 내용 기니까 잘 듣고, 빠진 부분 있으면 필기도 하고."

 

 겨울이 고등학생 때 제일 싫어했던 수업을 꼽으라 한다면 주저 없이 역사라 대답할 것이다. 그녀에게는 한마디로 지랄이 판치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무슨 잡생각을 하며 50분을 흘려보내지? 수업이 시작하기 전 쉬는 시간마다 자리에 앉아 멍하니, 그리고 꾸준히 그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곤 했다. 학기말쯤이 되어서는 최대 난관에 빠졌었다. 이젠 더 떠올릴 잡념이 없었다.

 

 "아테(Ātē)가 누군지 아는 학생."

 "나쁜 년이요."

 "누구야, 방금."

 

 한 아이의 도발적인 대답에 반 전체가 웃음보를 터뜨렸다. 선생님은 떠들썩해진 반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업 진도를 이어나가셨다. 시끄러운 것도 잠시였다. 조용히 하라는 한 마디에 교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남자 못지않은 풍채는 물론이고 기가 드세서 작년에는 2학년 학년 부장 직급으로 학교 전체를 휘어잡기도 했던 분이시라 이런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셨다.

 

 깔끔하게 정리된 내용이 커다란 스크린 안을 가득 채웠다. 행여 놓칠세라 선생님이 손에 쥔 포인터를 내려놓기 무섭게 아이들이 하나같이 필기구를 열심히 움직이며 공책에 받아쓰기 시작했다. 저런 거 받아써서 뭐에 쓰려고 그러는 거지? 약해 빠진 샤프심이 비어있는 공책 표면에 닿기만 하면 부러지는 통에 나는 한 글자도 쓰지 못했는데, 아이들은 칠판과 노트를 번갈아 보며 연신 바쁘게 글자를 끄적여댄다. 저딴 쓰레기만도 못한 말이 뭐가 그리도 중요하다고 휘황찬란한 색의 펜으로 줄을 긋고 별표까지 치는지. 겨울은 어이가 없어 샤프를 세게 내려놓았다. 학기 초부터 짝이었던 연서의 필기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유 모를 배신감까지 들었다. 그래도 연서만은 다를 줄 알았는데…. 말레타를 안타까워하던 태도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얻었었는데….

 

 공책 맨 윗부분에 있는 《아테의 축복, 에이블》이란 글씨 위에 연분홍빛 하트를 그려 넣는 모습이 그렇게도 씁쓸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아테는 고대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재앙과 악의 여신이다. 에이블(Āble)이 바로 아테의 축복(Ātē's blessing)을 뜻하는 말이지."

 "선생님. A 위에 장음부호(-)가 들어가면 발음이 '에이'가 아니라 '아' 아니에요?"

 

 머리를 하나로 쪽매 묶은 여자애 한 명이 손을 들며 의견을 제시했다. 질문에 꽤 가시가 돋쳐있었다. 위로 꽉 올려 묶은 머리와 함께 날카롭게 치솟은 눈매도 분위기를 차갑게 하는 데에 한몫했다. 아는 척을 해서라도 교단 위의 선생에게 쪽을 주고 싶었는지, 아니면 제 지식을 만천하에 공표하고 싶기라도 했던 건지. 물론 역사 선생 앞에서는 무엇이 되었든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고3이 'able'의 뜻을 모르지는 않겠지?"

 "'할 수 있는' 이요."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유능한, 능력 있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에이블을 나타내는 의미이기도 하다.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거야."

 "아…."

 "신의 축복을 받은 종족인 에이블은 신체적 발달, 재능, 그리고 영원한 시간을 살아가는 불멸의 능력까지 모조리 갖춘 존재다. 손바닥에 자리한 해와 달 문양, 그리고 손목에 선명히 새겨진 숫자 '14'는 그들의 자부심이자 영예로운 상징으로 언제나 많은 이들로부터 칭송받아왔지. 저번 시간에 사진 보여줬지? 그들은 능력이나 비상함이 없는 노만, 즉 우리에겐 특히나 더 초월적인 존재로 부각되었지. 거기 조는 애 깨워. 3분단 두 번째, 일어나. 또 동여 너야? 방금 선생님이 어디까지 얘기했어."

 

 그녀의 상징이었던 길고 얇은 드럼 스틱이 교단 위에 몇 번 부딪치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지적받은 3분단 두 번째 남자아이는 비몽사몽 한 상태로 인중을 긁으며 옆자리 남자애를 툭툭 발로 쳤다. 어디까지 했냐는 무언의 신호였다. 잔뜩 난처한 표정을 짓던 애가 안경을 올리며 작게 '노만'이라 읊조렸다.

 

 "노만이요."

 "노만 뭐."

 "그…노만…."

 "'노만' 뜻이 뭐야."

 "어…우리 같은 거요."

 

 아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웃었다. 선생님은 기가 찼는지 바닥을 향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웃긴 건 그 우스운 대답에도 반박은 하지 않았다는 거다. 맞는 말이니까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

 

 "'normal human'이라 해서 노만(norman)이라 몇 번을 말해. 수업 똑바로 안 듣지."

 "죄송합니다."

 "앉아. 그리고 내일까지 파마 풀어서 검사 맡으러 오랬다."

 "예."

 

 겨울이 감히 수업이라 이름 붙이기도 싫은 시간은 계속되었다. 아직 30분이나 더 남았다. 개 같아.

 

 "그러나 지금과 같이 에이블과 노만으로 크게 인류가 분류되기 전, '말레타'라는 또 다른 특별한 능력을 지닌 종족이 존재했다."

 "쌤. 저 저번 주에 말레타 봤어요! 포탈에 신고 때림!"

 *포탈(Force Talon); 에이블 국가정보국 산하 정찰국 소속 수색대, 포스 탈론의 약자.

 

 조용하던 반에 또 한 번 시장통이 형성되었다. 여기저기서 웅성대던 아이들의 속삭임 속에는 말레타를 도저히 생명 취급하지 않고서는 꺼내볼 수도 없는 단어들이 끼어있었다. 아직 에어컨을 틀지도 않았는데도 겨울은 팔에 절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말레타라면 거리낌 없이 학살할 수 있는 잠재적 살인마들이 천지인 이곳에 사냥감인 겨울이 홀로 뚝 떨어져 있었다. 달리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빠온다. 돌아서면 보이는 죽음의 경계선이 새삼 두려워 속이 울렁이기까지 했다.

 

 "겨울아, 왜 그래? 어디 아파?"

 

 가까스로 올라오는 토기를 억누르기 무섭게 손등 위로 맞닿는 연서의 손길에 다시 한번 속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언제든 제 손목을 뒤집고선 에이블 위로 하트를 그리던 핑크빛 펜촉으로 덧칠한 스프레이를 긁어내어 제 정체를 드러낼 것만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불안해지기 충분했다.

 

 "선생님, 저 화장실 좀."

 

 겨울은 교실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화장실을 제대로 찾아 들어온 게 맞기는 한 건지 모를 만큼 희미한 정신을 붙잡고서 변기통 속에 머리를 틀어박았다. 게워낼 속도 없는데 헛구역질이 멈출 생각을 안 했다. 불투명한 위액을 억지로 토해내느라 반사적으로 두 눈에 들어찬 눈물이 순식간에 방울져 변기 물 위로 뚝뚝 떨어졌다.

 

 얼마간을 자리에서 망부석처럼 굳은 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더러운 화장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킬 기력도 없었다. 고요함이 자리한 그곳에서 언제까지고 앉아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였다. 톡톡. 등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두드리던 누군가의 손길에 이제는 눈물이 빗방울처럼 후두둑 내리기 시작했다.

 

 "여기 여자 화장실이야."

 

 물기 어린 겨울의 목소리가 고요한 화장실 안에 울려 퍼진다.

 

 "내 알 바냐?"

 

 뒤이어 익숙하고 낮은 목소리가 그곳에 섞여든다. 돌아보지 않았음에도 누군지 알았기에 물었고, 무미건조하나 익숙한 대답이 이어졌다. 울렁이던 속이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히 가라앉는다.

 

 "아…. 너 진짜…짜증 나."

 

 영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수업 중간에 떡하니 화장실 한 칸을 차지하는 이유도, 적막뿐인 화장실을 채우는 제 울음의 의미도, 볼품없이 떨어대는 손끝이 말해주는 두려움의 원인까지도…. 빠지면 섭섭한 억울함까지 한곳에 몰아 습관처럼 영하의 품 안에 모조리 털어내었다.

 

 ***

 

 말레타(Maleta).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옛 스페인어에서 파생된 '질병'이라는 뜻이며, 손목에 '14'가 아닌 '1'을 새긴 채 태어난 자들이다. 그들이 가진 특별함은 바로 신에 가까운 에이블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다. 에이블의 숫자와 발달한 능력치를 없앨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의 소유자로 물리적 공격만으로는 그 어떠한 해도 끼칠 수 없는 에이블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말레타와 펜들럼은 에이블의 유일한 약점이다. 에이블이 파장에 들어맞는 자신의 M과 접촉하는 순간 그들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치 더 높은 곳으로 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평범한 노만의 삶으로 끝을 맺으라 경고하는 신의 말씀처럼. 손목의 '1'이 그런 의미였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가장 평범하고도 특별함 없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신의 선물이자, 말레타가 그 숫자를 오래 유지할 수 없는 불안정한 존재라는 점에서 비극이었다. 펜들럼이라면 몰라도.

 

 서로 파장이 들어맞는 에이블과 말레타(또는 펜들럼) 한 쌍을 일컬어 'M(Magnet)'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게 되면 숫자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둘은 자석 같은 관계다. 멀어지면 자성이 약해지며, 자연스레 연결이 끊어진다. 연결이 끊어지면 에이블의 '14'는 점차 줄어들어 '1'로, 말레타의 '1'은 '14'로. 그렇게 일생에서 단 한 번도 새겨본 적 없던 숫자와 함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다.

 

 굳이 수업을 다 듣지 않아도 겨울은 알 수 있었다. 말레타라면 당연지사였다. 힘없는 말레타에게 무지함은 곧 죽음이었다. 약자이기에, 제 존재를 정의하는 것의 기준마저도 에이블이 되어버리는 비참함을 이해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울음이 그칠 때까지 등을 토닥여주는 영하마저도 알 수 없었다. 언제나 긴장해야 했다. 두려움을 가장 우선된 감정으로 두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이 모든 걸 아주 오래전부터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던 저 자신이었다.

 

 "말레타를 비참하게 만든,"

 "……."

 "모든 에이블에게."

 

 그래서 겨울은 이렇게 에이블이,

 영하가 미치도록 미운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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