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네가 살아야 하는 이유야?"
"그쪽이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왜?"
"복수, 해야지. 그쪽도."
"누구한테?"
"배신한 자한테."
"아, 내가 배신을 당했어?"
배신이지. 그래. 남자가 혼잣말을 읊조린다. 남자의 심기가 불편해도 한참은 불편한 것 같았다. 한층 더 낮아진 그의 목소리엔 평온함으로 위장한 화가 그득했다.
"모든 에이블을 적으로 돌리겠다고 말했지."
"……."
"그럼 나도 적 아닌가?"
남자는 에이블이었다. 겨울이 혐오해 마지않는 종자. 모든 에이블에게 복수하겠다 했으니 그 표적에 남자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을 죽이는 일에 스스로 협조하라는 꼴이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 그러나 겨울 자신이 처한 상황만큼 말이 안 되기야 하겠는가.
"뭐든 예외는 있는 법이니까."
더는 손에 쥘 것 하나 남지 않은 겨울에겐 도덕이나 논리를 따질 힘마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자신의 존재 의미가 사라진 것만 같은 허한 기분을 떨쳐내는 것만으로도 매우 버거웠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여력이 없으니 겨울은 그저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을 말이라 믿고 계속 지껄이기라도 해야 했다.
"그쪽이 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인 거 알아.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정부 쪽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도."
"내가?"
"칩. 뽑았지?"
남자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위로 솟아올랐다. 감으로 던진 겨울의 추측이 맞아 드는 순간이었다.
"이 주가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정부가 아무런 수를 쓰지 않았을 리가 없지. 그렇지 않아도 에이블 개체 수가 모자란 판국에 잡기 힘든 말레타까지 떴어. 정부가 움직이고도 남아야 했는데 조용하잖아. 아무리 영하가 힘 있는 에이블이라고 해도 그들로부터 날 지키는 건 고사하고 내 M인 그쪽을 지극정성으로 보호하는 것쯤은 진즉에 끝냈어야 했어. 그런데 정부나 수색대 놈들은커녕 A 구역에서 멀리 떨어진 호텔 방에서 가드 하나 없이 혼자 있다는 건."
"나를 찾지 못했다는 말이 되지."
똑똑하네. 남자가 또 한 번 낮게 읊조리듯 말한다. 아마도 그의 습관인 듯싶었다. 크게 소리 내 말하지 않는 것. 그러나 아무리 작은 목소리라도 그 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겨울은 그가 큰 소리를 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올곧은 시선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하던 그가 이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반사적으로 온몸에 긴장이 일어 손을 움찔거렸다. 키가 크고 말랐음에도 뼈대 때문인지 덩치가 커 보였다.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이 그의 몸 주변을 감싸고 도는 듯했다. 말레타의 상징이 손목에 달려있었는데도 전혀 약해 보이지 않았다. 역사 선생 말이 맞았다.
"얼마나 살았어?"
"뭐?"
다짜고짜 나이를 묻던 남자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겨울에게로 다가온다.
"몇 살이냐고 물은 거야."
"무슨 숫자를 말해도 그쪽한테는 우스운 수준이 아닐까 싶은데."
"행복했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데."
"아니야."
질문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정녕 그가 바랐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태어나 평생을 말레타로 살아온 자의 행복지수가 얼마나 되는지 묻는 건 어떤 의도일까.
"충고 하나 해줄까? 듣지도 않을 것 같긴 하지만."
남자가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천천히 쓸었다. 감춰서 문양이 보이지 않는 손바닥 아래로 손목에 여실히 드러난 숫자가 찬란한 마지막을 노래한다. 굳이 가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건지 스프레이 자국 하나 없는 숫자만 깔끔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말레타의 '1'이 에이블에게 옮겨가니 진정한 숭고함으로 재탄생했다. 재수 없지만 사실이었다. 정말이었다. 이상한 포인트에서 울컥했지만, 겨울은 재빨리 평정을 되찾았다. 약해 보이면 넌 지는 거야. 습관처럼 자신을 달래는 사이 남자가 움직였다. 남자와 겨울의 거리는 다섯 걸음 정도면 완전히 좁혀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더 나을 수도 있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분명하다. 당연히 죽어본 적이야 없겠지만, 그간의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결론지은 최상의 해답이겠지. 그다지 오래 살지 않은 나마저도 남자의 말에 공감의 뜻을 표한다면, 그건 비극일까? 겨울은 입안이 텁텁해지는 꺼림칙한 착각이 들어 표정을 구겼다.
"인간이란 참 단순해."
"……."
"별것도 아닌 일에 제 목숨을 내기용 판돈처럼 걸기도 하고, 그 판돈 같은 목숨 지키려고 다시 아등바등하는 꼴을 보면…. 생각의 깊이가 별로 없나 봐."
"……."
"너처럼."
남자의 검지가 이마에 살짝 닿았다. 힘주어 미는 것도 아니고 정말 가볍게 닿기만 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부위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시리기까지 하다.
"아니지. 넌 인간이 아니라 질병이니까. 해당 안 되려나."
갈수록 가관이었다. 그녀를 생명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는 그의 고의 가득한 언행이 역겨웠으나 겨울은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질병한테 당해내지 못하는 존재가 당신이잖아. 숨 뱉으면 함께 나올 것만 같은 말이었지만 꾹 참았다. 복수하기도 전에 그의 손에 몸통이 뚫려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난 네가 싫어."
예상치 못한 망언의 주인공은 바로 남자였다. 겨울은 왜 상스러운 욕 하나 담겨있지 않은 그 말을 망언이라고 느꼈는지 모른다. 거기다가 아주 잠시나마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을 받았다. 겨울은 이토록 이상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바라본 남자의 두 눈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마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겨울은
곧 다시 이성을 찾았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그저 멍하니 흘려보내기엔 제 삶이 너무 아까웠다.
"난 그쪽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진 몰라. 그래서 솔직히 이젠 설득할 말도 더 남아 있지 않아. 그쪽이 배신을 당했든 안 당했든 솔직히 나랑 별 상관도 없어."
"마음 아프네. 그래도 네 M인데."
"왜 내가 살아야 하냐고 물었잖아. 거창한 이유 같은 거 없어."
겨울은 자신을 놓아버리기 시작한다. 이젠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어차피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인생, 말이라도 시원하게 다 내뱉고 죽어버리자고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비참하게 설설 기거나 눈치 보지 말자고. 그렇게만 죽지는 말자고.
"억울하잖아."
"……."
"내 인생이 억울해 죽겠다고."
"……."
"한이 많아서 이대론 못 죽겠다, 어쩔래. XX."
에이블 따위에 주눅 들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눈치 보지 말자. 주눅 들지 말자. 에이블 따위. 에이블…따위.
그렇게 주문 외우듯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남자가 큭큭 대며 웃는다.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에 외려 풀리려던 긴장이 다시금 겨울의 몸을 바짝 조여왔다.
"아…어떡하지."
"……."
"정말 널 어떡하면 좋지."
남자가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낮은 신음만 뱉어낼 뿐 더한 움직임이 없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의중을 전혀 알 수 없는 모호한 소리였다. 가려진 두 손바닥 너머의 남자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영하에 대한 배신감이 널 살게 한 건가?"
잠깐의 정적 끝에 손을 내린 남자가 눈을 살며시 감았다. 가지런한 속눈썹이 그의 감은 눈 위로 유려하고 검은 물결을 만들어냈다. 남은 시간이 정말 얼마 없는데도, 남자는 스치듯 만났던 처음과 같이 여유롭고 태연하다. 겨울은 정말 이것이 제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아찔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럼 난 뭘 붙잡고 살아야 할까."
"고민해봤자 뭐해, 이제. 기껏 해봤자 10분 남짓,"
"이미 바뀌었잖아."
흠칫 놀라 손바닥을 황급히 뒤집었다. 검게 물들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던 나침반의 어둠이 어느새 걷혔다. 그것의 바늘은 천천히 움직이며 눈앞의 남자를 가리킨다. 모든 바늘의 절반이 여전히 검은 시간에 뒤덮여 있었지만, 겨울은 그것에서 알 수 없는 안정을 느꼈다. 더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느껴보지 못한 평온함. 그제야 조금 전 제 이마에 닿은 남자의 온기가 떠오른다.
"그러니까 해야지, 고민."
손목에 새겨진 선명한 '1'이 그 증거였다.
***
13일의 유예기간이 더 생겼다. 얼마나 오랫동안 13에 머무를지는 모른다. 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남자와 엮여버렸으니 어쩌면 이 13일로 겨울의 인생은 끝이 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어? 죽고 싶다며."
"그냥."
"그게 끝이야?"
"더 있어야 하나?"
"…미친놈."
"너도 꽤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겨울은 만만치 않은 또라이와 모종의 거래를 끝마쳤다. 이미 남자는 저를 데리고 다닐 마음의 준비마저도 끝낸 사람인 양 친근하게 굴기 시작했다. 제 설득이 먹혀서 그런 게 아니라 남자가 그냥 감정 기복이 극심한 미친놈이라 그런 것 같았다. 그런 미친놈의 말대로 움직이는 겨울 자신도 미친년이긴 했지만.
M의 관계에서 오는 결속력은 가히 대단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유 모를 편안함이 점차 강해져 간다.
"어디 가?"
"신경 꺼."
"돌아갈 곳 없잖아. 영하가 배신했다며."
"……."
"아, 인사하러 가는구나. 갔다 와."
"……."
"영하 왔어. 좀 전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를 병균 취급하던 자가 맞나 싶다. 내내 찡그린 표정을 유지했더니 이제는 제 기분을 풀어주려는 사람처럼 겨울의 이동 경로에 별의별 신경을 다 쏟아붓는다. 덕분에 알고 싶지 않던 정보까지 얻게 되었다.
기분은 여전히, 아니, 더 구리다.
***
몇 계단만 내려가면 영하와 겨울이 머물던 방이다. 나의 M이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날 살리겠다 신신당부하던 영하는 내가 쩔쩔매던 3개월 동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저만의 실험체가 예정에도 없던 M을 만나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가 되니 버려야 하나 고민을 했을까? 아, 방금 건 너무 마음 아팠어. 혹시 내 M의 정체를 알면서도 끝까지 버텼던 건가? 아니, 그건 앞뒤가 맞지 않아. 겨울은 영하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색출작업을 이끌었던 놈이.]
[걱정하지 마. 네가 위험해질 일 없어.]
모순의 모순이 끝도 없이 줄지어 길을 만든다. 겨울이 영하에게서 멀어지게 되는 길이 생겨난다.
멍하니 걷다 보니 어느새 발길은 한곳에서 멈추었다. 익숙한 호수가 적힌 문패를 올려다보았다. 겨울은 차마 손잡이로 가지 않는 손의 방향을 틀어 문 위에 가져다 대었다. 이 안에 영하가 있을까? 과연 너는 어떤 심정으로,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나는 이렇게나 엿 같은데…."
들킬 줄 알았으면 시작도 하지 말지. 그냥 키다리 아저씨에서 멈춰주지 그랬어. 나는 이제 멈출 수가 없어, 영하야. 평생을 속아온 내 삶이 불쌍해서라도 그럴 수가 없어. 끝이 뻔한 발버둥이라도 열심히 쳐야만 덜 억울할 것 같아.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소리는 아주 가까웠다. 겨울과 영하는 문 하나를 가운데 두고 있었다. 우습게도 영하는 문밖에 있는 저를 맞이하지 않았다. 가벼운 인사말조차 없다.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미어지는 가슴을 대변하기 위해 눈이 먼저 눈물로서 첫 시작을 알린다. 모든 것들이 아귀가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영하가 인정했다. 그의 침묵이 겨울에겐 그런 의미였다.
쥐어 짜내듯 소리 없는 울음을 토해내고선 문 위에 이마를 맞대었다. 아마도 그는 숨죽여 우는 제 목소리까지도 생생하게 듣고 있을 테지. 위대한 에이블이니까. 모든 감각이 월등히 뛰어나신 분이니까. 일전에 시간이 움직인 제게 바쁘게 달려와 가쁜 숨을 내쉬는 그의 행동마저도 거짓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애초에 힘들지도 않았을 거면서.
"영아."
-…….
"왜 그랬냐고는 묻지 않을게."
왜 그랬어.
"네가 몇 명의 말레타를 색출해냈고, 내가 어쩌다 너와 함께 지내게 되었는지도 묻지 않을게."
날 왜 살린 거야.
"그러니 너도 묻지 말아 주라."
-…….
"내가 왜 이래야만 하는지."
지금이라도 좀 막아줘.
그럼 그냥 남은 13일에 감사하며 조용히 숨어있다가, 그렇게 갈게. 부탁이니까 제발 나 좀 막아줘.
여전히 문 너머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고요하기 그지없다. 장벽마냥 단단하기만 한 불신은 깨질 생각이 없다. 이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영하를 안다. 너무 잘 알아서 더 속상하다. 지금이라도 겨울이 열어달라 말 한마디만 꺼낸다면 영하는 한 치의 주저 없이 문고리를 잡아 돌릴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며 죽을 때를 걱정하던 때가 훨씬 나았다. 영하를 미워하지 않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구역질이 올라올 만큼의 배신감이 틈만 나면 몸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며 겨울을 괴롭혀댔고, 지금이 그 절정이었다. 절정은 수많은 의문을 자아냈고, 그것은 곧 돌아서서 멀어지려던 그녀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혹시…."
왜 이런 질문이 갑자기 그녀의 머릿속을 점령한 건지는 알 수 없다.
"엄마를…알았어?"
알았어도 대답이 없었을 것이고 몰랐어도 똑같은 침묵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요동치던 심장이 이상하게도 그의 묵언에 빠른 속도로 낙하하고야 말았다.
"아빠도…?"
영하의 답이 무엇인지 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겨울이기에 안다.
[DNIPM은 뭐 하는 곳이길래 공고가 뜰 때마다 에이블이고 노만이고 할 것 없이 야단법석이래?]
[그냥 나랏일 하는 놈들이지, 뭐.]
...
[너는, 영아? 네가 일하는 곳도 그래?]
[걱정하지 마. 네가 위험해질 일 없어.]
어떤 언어로도 지금의 무너지는 속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배신감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그 새끼도 참 웃겨. DNIPM놈이 말레타를 숨겨?]
[색출작업을 이끌었던 놈이.]
겨울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의 집약체가 결국 몸을 비집고 나와 아우성으로 터져 나왔다. 울부짖다 못해 괴성까지 내지른 절규가 복도 전체를 울렸다. 두 발을 땅에 제대로 딛고 서 있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기적이었다. 주먹 쥔 손으로 몇 번이고 철벽같은 문을 두들겨댔다. 에이블이었다면 이미 문이 가루가 되고도 남았을 정도로 힘주어 쳤다. 얼얼해지다 못해 다른 사람의 손이 된 것처럼 희미해진 감각이 점차 손목으로, 온몸으로 번져나간다.
떨림이 멎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겨울은 힘없이 주저앉은 다리를 겨우 일으켜 세웠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중심이 쏠려 몸이 한번 휘청거렸다. 안에서 바닥을 쓰는 발소리가 들렸다.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아도 눈에 훤히 보이는 것이 영하의 행동이다. 쓰러지는 제 몸짓 하나에도 자연스레 반응하는 영하의 반응이 이제는 웃기기만 하다.
"열지 마."
-…….
"열면 이 자리에서 손목을 긋든 목을 긋든 끝을 볼 거야."
-…….
"나 충분히 하고도 남을 애라는 거 알지."
대답을 해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자꾸만 그 반대쪽 심정과 충돌했다. 이리 치고 저리 치여 싱숭생숭 갈피를 잡지 못해서 그런지 몸도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 같다.
꿈 얘기도 하지 말 걸 그랬다. 마음 열지 말걸.
그냥 아무도 믿지 말 걸 그랬다. 그저 나만 의지할걸. 어차피 결국 남는 건 나 혼자인데. 그러지 말걸.
"미워 죽겠다."
-…….
"니가 미워 죽겠어, 영아."
겨울은 제 M과 약속했다.
[그래서, 넌 어떻게 에이블에게 복수하고 싶은 건데?]
[에이블을 무너뜨릴 거라면.]
[…….]
[DNIPM정도는 건드려줘야지.]
복수의 끝이 파멸뿐일지언정 나는 기꺼이 웃으며 그곳을 향해 달려가겠다.
겨울은 끝끝내 열리지 않은 문을 뒤로한 채 복도를 걸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