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는 거예요?"
"내 비밀 기지."
남자는 엉엉 울고 나와 눈가가 시뻘겋게 번진 겨울에게 별다른 시비를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반쯤 흘겨 뜬 눈으로 그녀를 보는 듯 마는 듯하더니 제 일이 아니라는 듯 목 언저리에 손을 가져다 대며 눈을 감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버린 뒤였다. 남자는 군말 없이 오랜 시간을 기다려주었다.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호텔 앞에 멈춰선 새까만 차에서 졸린 눈을 한 직원이 내려 키를 건네자 남자는 그것을 받아들고 겨울에게 가벼운 눈짓을 했다. '타.' 그의 몸짓도, 텅 빈 보조석도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기 있다가는 금방 잡힐걸."
"……."
"영하가 한번 문 건 잘 안 놓치려고 하거든."
부어올라 열기로 가득한 두 눈가를 한 손으로 벅벅 비비며 겨울은 군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 주저하며 조금이라도 뒤를 돌아보았다가는 영하가 생각나서 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랬다. 그러나 노력은 차가 출발하는 순간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호텔이 시야에서 멀어지자마자 눈가가 금방 또 뜨거워진다. 에어컨을 틀어 다소 싸해진 공기가 머무는 차 안에서 난데없이 창문을 내린 겨울을 보고도 남자는 별말이 없었다. 솔직히 보는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겨울은 일렁이는 속을 달래느라 남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조용히 운전에만 집중하는 남자가 고맙기까지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질병 취급하던 그에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감정을 가지는 게 정상이기는 한가 싶었다. M이라서 그런 걸까? 어찌 되었든 서로가 서로에게 짝이라서?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 선뜻 먼저 말을 걸 것 같으면서도 입을 다문 그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꽤 묘했다. 새삼 이 남자가 제 M이라는 사실에 이상한 안도감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나가길 반복한다. 언제 또 자신을 헐뜯을 지도 모르는 또라이한테서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위안을 느껴야 하는지….
"뭘 그렇게 봐. 잘생겨서 그래?"
겨울은 앞이 막막해진다. 덕분에 눈물이 쏙 들어가기는 했다.
남자의 뻔뻔함 때문에 겨울은 생각하기도 싫은 수업시간이 또 떠올랐다. 우열을 따지고 싶지는 않았으나 과학적으로도 이미 공공연하게 입증된 우성 유전자의 표본이나 마찬가지인 에이블을 육안상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외형이었다.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는 에이블을 두고 하는 말이 옳기는 했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남자가 번듯하게 생긴 것은 사실이었다. 남자의 얼굴은 마치 부드럽고도 유려한 붓 터치로 완성된 하나의 미술 작품 같았다. 깔끔하고도 모난 곳 하나 없는 외모. 선한 외모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냉소적인 분위기가 가미되어 있었다. 한번을 제대로 웃어 보이질 않으니 더욱 차갑기 그지없다. 그런 분위기에 에이블이라는 '아우라'까지 더해졌으니, 잘생겨서 그렇냐는 남자의 말에 반박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겨울은 조금의 동조도 보이기 싫어 애꿎은 시선을 돌렸다.
누가 말레타 아니랄까 봐. 두 눈이 향한 곳은 운전대를 잡은 그의 왼쪽 손목이었다. 다른 건 안 보여도 그것만큼은 짜증 날 정도로 잘 보여서 탈이다. 본능인 걸까. 대충 걷어 올린 셔츠 자락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14'가라는 숫자가 그저 낯설기만 하다. 저와는 확연히 다른 숫자다. 그것은 힘의 상징이었다. 그런 남자의 숫자가 저로 인해 움직인다. 저 대단한 에이블의 생명이 겨울에게 달려있다.
"본다고 이게 바뀔까."
"안 무서워? 죽는 거."
"무서워하면, 뭐가 달라져?"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꾼 건데?"
"복수 해준다며."
"그쪽이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 에이블이야?"
"그렇겠지, 뭐."
또라인가.
이쯤 되면 남자에게 복수의 대상이 있기는 한 건가 의심이 된다. 이러나저러나 목적한 바는 이루었으니 그 이상은 내가 알 바도 아니다. 겨울은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도로 곳곳에 작은 물웅덩이가 있다. 길가의 이름 모를 풀 잎사귀 위로 물방울이 맺혀 있다. 간밤에 비가 왔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겨울은 이파리를 타고 또르르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넋 놓고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꾹 다문 입을 열었다.
"아까 말이야."
"응."
"왜 운 거야?"
생각을 되짚어보면, 겨울이 처음 남자와 만났던 그 순간에도 그는 울고 있었다. 눈물 젖어 새빨개진 그의 시선이 아직도 생경하다. 보는 사람의 기분도 이상하게 만드는, 어딘지 모를 곳을 찌르르 울리게 하던 그 눈빛의 이유가 궁금했다.
"그냥."
"……."
"벅차서."
남자는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또 한 번의 정적이 감돈다. 겨울은 호기심이 열어버린 두 입술 새로 밤공기만 마실 뿐 더는 캐물으려 들지 않았다. 궁금증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어쩐지 더 알면 안 될 것만 같은 경보음이 자꾸만 그녀의 신경을 자극하는 게, 이상하게 두려워서 그랬다.
"노래 들을래?"
"아니."
"그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 오디오가 시끄러운 기계음을 사방에 퍼뜨렸다. 미친, 왜 물어봤대. 겨울은 눈살을 찌푸리며 체념한 듯 고개를 창가로 돌렸다. 연이어 남자가 제 쪽 창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에어컨은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에너지 남용하는 또라이 새끼.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마다 가로등 불빛만이 둘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 겨울과 남자의 두 눈에 가득히 들어찬다. 차별 없는 유일무이한 빛이.
***
막힘 없이 직선 도로를 달리던 차가 점점 평지를 지나 비포장도로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삐죽빼죽한 돌길을 꿀렁이며 미끄러지는 느낌이 이상했다. 길은 갈수록 험난해졌다. 자세히 보니 이젠 도로가 아닌 산을 탄다. 당장에 코앞에 뭐가 있는지조차 식별하기 힘든 어둠 속에서 잘도 핸들을 움직이며 나아간다. 고개를 내밀려다 예고도 없이 올라간 창문 때문에 겨울은 하마터면 턱이 나갈뻔할 위기를 겨우 모면했다.
"미쳤어?"
"얼굴에 상처나."
상처보다 더한 고통을 겪을 뻔했다고 따지려 했으나 그것은 뒷전에 둘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말이 있자마자 닫힌 창문 위로 나뭇가지들이 거세게 울며 제 몸을 비벼대기 시작한 것이다. 소리가 웬만한 짐승의 것 못지않게 강렬해서 몸이 절로 창가에서 멀어졌다. 참, 갈수록 알기 힘든 놈이다. 언제는 암세포니 뭐니 멸시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던 자가 고작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힐 것을 걱정해 창문을 올렸다? 그냥 이제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편이 제 심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
얼마나 더 깊이 들어갈 작정이냐고 물으려던 찰나에 차가 속력을 줄이더니 곧 멈춰섰다. 사방이 온통 높디높은 나무들뿐이었다. 족히 10m는 더 될 듯한 울창한 숲길 사이에 고급 세단 한 대가 이질적인 요소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내린 둘은 이 숲에서 더욱이 이질적인 존재였다.
"비밀기지가 혹시 이 나무는 아니겠지."
"똑똑한 것도 잠깐이었나?"
저건 뒀다 뭐 할래. 이번엔 눈짓 대신 턱을 살짝 치켜든 남자를 따라 시선을 돌렸더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니, 굳이 따지자면 눈앞에 집채만 한 산장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다. 보호색에 가까울 정도로 비슷한 색과 결을 띈 집이 주변 나무들 틈에 섞여 있어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어두워서 더 그랬다. 그래도 꽤 큰 데다 2층이기까지 했는데, 알아차리지 못할 줄은 몰랐다. 잠깐이나마 저 집이 겨울 자신의 처지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무수히 많은 노만 중 비슷하면서도 다른 말레타라는 존재. 어찌 보면 저 집이 저보다 조금 더 나을지도.
"내가 그쪽이랑 같은 시력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마."
"눈이 나빴나?"
"어. 존나 나빠."
"…하."
남자가 어이 없다는 듯 힘 빠지는 웃음을 내뱉었다. 고개를 내젓던 남자가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괜히 따라가기 싫다.
"너 곰 먹이 되라고 데리고 온 거 아니야."
"뭐?"
"얼른 움직이지 않으면 언제 뒤에서 널 덮칠지 몰라."
곰 많아, 여기. 흡혈귀인 양 이를 살짝 드러내며 위협적인 소리를 내던 남자가 특유의 나른함 가득한 눈을 깜빡이더니 산장 쪽으로 걸어갔다. 미친놈 소리가 절로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겨울은 입을 꾹 다물었다. 기어올랐다가는 곰보다도 먼저 저를 먼저 죽일지도 모를 남자였다. 몸 사려야지. 아직은 죽으면 안 되니까.
가까이 다가간 산장은 생각보다 더 현대적인 건축물이었다. 으스스한 통나무로 이루어진 줄 알았는데 현관문이 있는 쪽은 크고 두꺼운 통유리로 뒤덮여 있다. 깔끔한 내부가 한눈에 훤히 들어온다. 비밀 기지라기엔 너무나도 비밀스럽지 못한 구조였다.
"여기가 왜 비밀 기지야? 곰이 많아서?"
"너 있잖아."
"뭐."
"농담엔 정말 소질 없다."
감정 하나 실려있지 않는 건조한 말투였는데도 겨울은 자존심에 금이 간다. 아무렇지 않게 넘겨도 될 법한 대화였는데도 수치심마저 들었다. 반면 남자는 태연했다. 잠금장치 하나 없는 문을 열며 겨울을 향해 이리 오라 살짝 눈짓을 보내던 남자가 얄밉기까지 하다.
"문에서 멀어지는 게 좋을걸."
남자의 말을 머릿속에 입력하기도 전에 열린 문틈 사이로 커다란 무언가가 날아왔다. 아슬아슬하게 벽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커다란 액자였다. 액자를 감싸던 유리가 파스스하고 깨지는 소리를 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뒷걸음질을 치자마자 안쪽에서 또 한 번 와장창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났다.
"XXX아, 안 꺼져?!!"
욕은 보너스였다. 남자는 이를 예상이라도 한 듯 콧대를 살짝 긁는 여유까지 보이더니 이내 세 번째로 날아든 무언가를 잡아챘다. 순간 반응 속도가 엄청났다. 눈앞에서 처음으로 보는 에이블의 능력에 겨울은 절로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족히 800페이지는 되어 보이는 고서(古書) 같은 책을 아주 안정된 자세로 손안에 쏙 집어넣은 그의 능력에 감탄사까지 내뱉을 뻔했다. 노만이나 겨울과 같은 말레타였다면 손모가지가 꺾여 병원 신세를 져야 했을지도 모른다.
잠시 잠잠해진 틈을 놓치지 않고 남자가 문 안으로 들어선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욕 좀 창의적으로 쓰라고. 발전이 없어, 발전이. 혀를 차며 손에 든 책을 바닥에 조심히 내려놓던 남자가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보며 말한다. 남자는 너무 어두워 구조물조차 잘 파악이 되지 않는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처음에는 그가 귀신이랑 말을 섞는 건가 싶었다. 불조차 들어오지 않은 어두운 기지 안에서 때아닌 난동을 피우던 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때맞추어 환한 빛이 기지 안을 밝혔다. 겨우 다물었던 입이 다시 주체를 못 하고 열렸다.
"뒤지러 갔으면 쳐 뒤질 것이지 뭐하러 다시 돌아왔어!!"
고급 모델하우스를 보는 듯한 기분에 심취한 것도 잠시, 정확히 2층 계단에서 누군가가 다시 한번 크게 역정을 냈다. 이번엔 겨울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벽면에 꽂힌 책을 꺼내던 남자…라기보다는 소년처럼 보이는 아이가 씩씩대며 남자를 노려보다 이내 함께 들어온 겨울을 발견하고선 눈을 크게 뜬다. 쪼그리고 앉아 계단 기둥을 두 손으로 꽉 쥐고 있던 아이는 곧 눈에 띌 정도로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ㅈ, 저건 또 뭐야?! XX, 안 나가?!!"
곧바로 터져 나왔어야 할 말이 애매한 적막 뒤로 찾아왔다. 게다가 소년이 말을 더듬기까지 하는 바람에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겨울에겐 그게 그리 중요치 않았다. 어림잡아 열 댓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애가 저보다 한참은 큰 겨울을 보고 '저거'란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까지 오는 내내 남자가 겨울의 심기를 조금씩 긁어놓은 터라 기분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계단에 있는 저게 기름칠 된 겨울의 화에 기어이 불씨를 던졌다.
"인사해. 지원군이야."
게다가 남자가 고개를 돌려 겨울에게 고작 꺼낸다는 소리가 저런 개떡 같은 망언일 줄이야. 그 덕에 겨울의 속에선 화염 파티가 이루어졌다. 예의라곤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저런 놈더러 지원군이란다. 제 복수극이 막장인 걸까, 아니면 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걸까. 생각해보니 둘 다 맞네. 그렇다면 미쳐가는 세상에서 이루어내는 복수극에 어울리게끔 행동해 줘야지.
겨울은 지체 없이 걸음을 돌렸다. 이곳에서 나갈 생각은 아니었다. 문 앞까지 도착한 겨울은 조금 전 남자의 엄청난 실력을 두 눈으로 확인시켜준 고서를 두 손에 들고서 다시 천천히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졌다 싶어 그 자리에서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린 채 자세를 고쳐 잡았다. 또 이럴 때에 빌어먹을 학교 수업 시간이 떠오른다. 그래도 이번엔 좀 통쾌한 기억이었다. 많고 많은 질 떨어진 수업 중 그나마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수업이 바로 체육이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구기 종목에서는 겨울을 따라올 자가 아무도 없었다. 특히나 피구 시간은 온종일 화를 쌓고 살아온 겨울에겐 천국과 다름없었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며 에이블을 신격화하는 동시에 말레타를 지르밟는 존재로 여기는 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
‘야, 한겨울!! 너 미쳤냐?!! 나 아웃이라고!! 그만 던지ㄹ, 악!’
‘쌤!! 쟤 눈 돌아갔어요!!!’
‘야, 쟤 말려! 빨리 공 안 뺏고 뭐 해!!’
왜 지금 같은 때에 그게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저게' 아니라, 한겨울이야."
"야, 이 미친!!"
책을 피구공처럼 던져서 그런가?
아슬아슬하게 소년의 뒤쪽 벽에 부딪혀 떨어진 책이 계단을 타고 굴러 내려오며 쩌억 하는 소리를 내며 대리석 바다 위로 나뒹굴었다. 깔끔하던 벽면은 책 모서리에 맞아 패인 자국이 생겨버렸고, 그렇지 않아도 고서 같아 보이던 낡아빠진 책은 정확히 두 동강이 났다.
"반갑다, XX."
사람은 첫인상이 참 중요하다.
뒤에서 남자의 힘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
"뒤지러 갔으면 처 뒤질 것이지 왜…."
소년, 인줄 알았으나 사실상 겨울보다 밥을 먹어도 3천 끼는 더 드셨을 눈 큰 노인은 한동안 쓰라릴 정도로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훌쩍이며 같은 말만 반복하던 그가 제 전용으로 보이던 커다란 1인용 가죽 소파에 올라앉아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 안는다. 여전히 고개는 그사이에 파묻혀 있다.
"그냥 둬. 벅차서 저래."
맞은편 기다란 소파에 늘어지듯 앉은 남자는 습관처럼 한 순으로 눈을 가리고선 작게 말한다. 겨울이 조금 전 차에서도 들었던 대답이다. 에이블이 신체적 능력뿐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부분에서도 보통 인간들보다 더욱 증폭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기껏 떠나놓고 왜 다시 왔냐고…이 망할."
까칠한 태도와는 다르게 소년은 남자를 꽤 많이 아꼈던 것 같다. 소년은 이제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 목 놓아 운다. 고개 돌려 바라본 남자는 여전히 죽은 듯이 늘어져 있다. 겨울은 그 사이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그들 중 하나가 제대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에는….
먼저 정신을 차리고 정적을 깬 자는 눈가가 시뻘게진 소년이었다.
"하, 그래. 영하 그 XX 새끼는 이중인격 변태 싸이코래? 어떻게 저 애를 감옥 속 공주님마냥 꼭꼭 숨기고 입을 싹 닦았대? 그 새끼가 그럴 새끼가 아닌데. 아니, 그것보다 그게 그 새끼 파장이 맞기는 했어? 네가 어떻게 알아. 파장에 '내가 영하다.'라고 적혀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에이블 파장이 다였을 건데."
속사포 랩에 가까운 욕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 폭주를 멈출 자, 그리고 멈춘 자는 역시나 남자였다.
"알파 중에 영하라는 이름이 몇이나 있을 것 같냐."
"아, 알파였어? 그럼 맞네."
"알파였어??"
소년, 인줄 알았지만 사실상 겨울보다 밥을 먹어도 3천 끼는 더 드셨을 눈 큰 노인과 겨울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처음이 노인이었고 그다음이 겨울이었다. 남자가 그 뒤로 조용히 말을 덧붙인다.
"찌찌뽕."
얼마나 오래 살았으면 정신까지 이렇게 낡아빠졌나 싶었다. 남자가 맞은편 소파에 늘어져 있는 게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붙어 있었다면 팔이든 볼이든 꼬집히고도 남았을 거다. 저 또라이 새끼가 안 그러는 게 이상하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영하가 보통 에이블이 아닌 알파에이블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자 겨울은 기분이 또 이상해졌다. 짜증이 나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우울하다고 하기에도 무언가 애매한, 무엇이 되었든 좋은 것만은 아닌 감정. 평생을 함께한 영하가 에이블, 그것도 제가 혐오하다 못해 저주하고픈 DNIPM의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걸 아직 감당하기 힘든데, 그런 영하가 대단하다 못해 아주 신적인 존재에 가까운 알파에이블이라는 소식까지 연달아 들으니 타격감이 말이 아니다.
어떤 의미로든 절망적이었다.
"야, 윈터야. 너 영하랑 언제부터 알았다고?"
제 이름이 겨울이라고 윈터라 제멋대로 불러대던 소년이, 그러니까 '선데이'라는 요상한 이름으로 불러달라던 노인이 영하에 관해 묻는다. 기쁜 마음으로 툭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소재는 아니었으나, 남자가 먼저 이야기 길을 터놓은 탓도 있고, 어떻게든 정보를 많이 공유해야만 일이 잘 진행될 것 같았기 때문에 겨울은 노인의 질문에 대답하기로 했다.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입학식 때였는데, 그 전까지는 나타난 적 없었어."
"교복에 대한 로망이 있었네. 역시 변태 싸이코 새끼."
"그 전까지 내 경제적 지원을 해주던 분이 계셨는데, 얼굴도 이름도 드러낸 적이 없는 데다 수녀님도 그분에 대해선 아무런 말씀이 없으셔서,"
"수녀님?"
노인은 궁금증이 많았다.
"아, 에이블은 모를 수도 있겠구나. 부모가 없는 노만이 맡겨지는 보육시설이라는 게 있어. 그쪽들은 정부 측에서 따로 관리하지 않나? 아무튼, 내가 있던 곳은 보육원은 아니고 수녀원이었는데, 어떻게 거기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곳에서 자랐어. 그 전엔 삼촌이랑 지냈는데, 그 얘긴 됐고. 수녀원은 아마도 그분이 데려다 놓은 거겠지. 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분을 키다리 아저씨라고 불렀어."
"근데 그 키다리 아저씨라는 게 변태 싸이코였다 이거 아니야."
"아가, 표정 풀어."
겨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나 보다. 이 나이에 퍽이나 그런 호칭이 어울리겠다 싶은 '아가' 소리를 붙여가며 저를 부르던 남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봤더니 소년과 남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해있다. 그것도 진지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남자는 언제나와 다를 바 없이 권태로운 표정이었다.
"윈터야, 너 복수 하고 싶다고 그랬지."
바로 왼편의 1인용 소파 위에 발까지 모아 올리고 앉아있던 소년이 겨울에게 되물었다. 겨울은 대답 대신 그냥 무미건조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도 그렇고 아이의 얼굴을 한 이 소년의 속을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무릎 위에 턱을 괴는 자세 덕에 더욱 큰 안광을 자랑해 계속 쳐다볼 수가 없었다. 순수함 속에 담긴 미묘한 연륜이 어색해 눈길을 피했다. 영하와 비슷한 느낌이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자들의 특징인가 싶다.
"이 XX 새끼가 너한테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는 모르겠는데, DNIPM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야. 얘 말마따나 거길 건드린다 쳐. 그전에 거길 건드릴 방법이 있기는 해? 그리고 거길 자극해서 뭘 어쩌려는 건데."
"……."
"그리고 무엇보다도."
"……."
"넌 영하를 너무 아끼잖아."
소년이 정곡을 찔렀다. 거쳐온 긴 세월의 힘을 간과한 탓이었을까. 만난 지 채 한 시간도 안 된 에이블에게 속을 훤히 들켜버렸다.
"내가 영하 욕 할 때마다 너 표정 개 구렸던 거 알아?"
"……."
"그런 애가 DNIPM을 노리시겠다? 아서라."
"……."
"네가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하는 DNIPM 핵심 멤버야. 네 복수가 성에 차려면 수장급 애들을 쳐야 한다는 거야. 그런데 수장급 애들이 과연 한두 명일까? 아무리 에이블의 수가 극소수라고는 하지만 DNIPM을 얕잡아 보면 안 되지. 영하 그놈이 힘 쪽으로 능력이 몰빵되어 있다고는 해도 영하 말고도 힘센 알파가 족히 다섯은 더 되고,"
"넷이야."
남자가 노인의 말을 가로챘다. 속사포 랩 같은 말을 따박따박 내뱉다 흐름이 끊겨버린 게 꽤 기분 나빴나 보다. 노인이 인상을 팍 찌푸리고선 남자를 힘껏 노려본다. 그런 건 남자가 신경 쓸 축에 못 끼긴 했지만. 손바닥을 들어 올린 남자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이름을 읊었다.
"나 빠졌지. 너도 여기 있지. 노아는 실종됐지. 영하랑 원호, 그리고 그년 빼고는 해진이가 다 죽여버렸거든."
"존나 미친놈. 설마 프라이데이,"
"걔가 아마 첫 타자였을 걸?"
"XX 놈. 야, 윈터야. 족치자."
그렇게 이상한 팀이 생겨났다.
DNIPM이 무서운 곳이라 고개를 내젓던 놈이 누구더라.
그나저나 남자와 엉뚱한 할아버지마저도 알파에이블일 줄은 몰랐다. 보통 놈들이 아니라는 것은 짐짓 예상하였으나 정부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다 못해 귀하게 여기는 존재일 줄이야. 단 이틀 만에 보통 노만이나 에이블마저도 쉽게 볼 수 없다는 알파에이블을 하나도 아닌 셋이나 만났으니…. 그리 긴 시간을 산 것도 아니었지만 겨울은 인생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하는 게 맞는지나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여전히 선명한 '1'을 그리고 있는 손목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바닥 위로 띄운 나침반의 바늘 끝은 정확히 남자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다 다시 시선을 옮겨 숫자를 바라본다. 언제 통제력을 잃고 다시 움직일지 모르는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 외에는, 딱히 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