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냐, 쟨."
"윈터야, 너 팜므파탈이었니?"
낭패다.
"그러니까…아…나."
"야, 멀대 새끼.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아가 친구니?"
아직 해조차 뜨지 않은 야심한 시각에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소위 비밀기지라는 곳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으니, 이제는 누구에게든 들켜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이번 건 솔직히 겨울의 탓이 조금 크긴 하지만 말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겨울의 뒤에서 누구 하나 죽일 듯한 눈매를 치켜뜨고 있는 무웅이 때문이었다.
***
그러니까, 창고같이 갖가지 책이 사방에 널려있고, 침대 같은 건 바라지도 말라는 듯 매트 하나만이 덜렁 자리한 방 같지도 않은 방에서, 그나마 창문이 피터 팬이 열고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위안 삼아 겨울이
감기지도 않는 눈을 감으려 할 때쯤이었다. 창문 새로 들어오는 달빛이 유독 밝아서 등을 돌리고 누웠더니 또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지는 바람에 눈물이나 참지 말고 흘려보내자 싶어 조용히 울었다. 저 문을 열고 영하가 들어오는 일은 이제 없다. 겨울은 밀려오는 공허함이 생각보다 매우 힘겨웠다.
"괜찮다. 괜찮아, 한겨울."
겨울은 이불을 끌어올려 눈물을 닦아냈다. 남자가 얇은 이불을 챙겨준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행동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또 한 번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추켜올려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 아무도 없는 방이긴 했지만, 창밖으로 비치는 달에게도 이런 제 모습을 들키기 싫었다. 산속이라 다소 차가운 공기가 곳곳에서 들어와 그다지 덥지도 않았다.
지칠 기색이 그다지 없어 보이는 눈물을 몰래 삼켜내느라 누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침대 매트 위로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무게감에 겨울은 위로 끌어 올렸던 이불을 황급히 내렸다. 겨울이 고개를 뒤로 돌리는 것보다 정체 모를 방문객이 뒤에서 제 허리를 감싸 안는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등 뒤로 느껴지는 누군가의 온기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울지 마."
아주 깊고 깊은 동굴 속에서 끌어올린 듯한 낮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위압적인 대신 주인의 기분을 달래려는 강아지처럼 애처롭다.
"어떻게 알고 왔어?"
"어떻게 모르겠어. 네가 있는 곳인데."
안전띠처럼 겨울의 허리를 꽉 조여 맨 그의 팔을 조심스레 풀고선 누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샛노랗게 빛나는 달이 함께 일어난 그를 여실히 비춰주고 있었다.
"밖에 비와?"
물기 어린 회색빛 머리칼이 갈래마다 뭉쳐 축 늘어져 있었다. 이러니까 더 강아지 같다. 그것도 제 몸이 여전히 작은 환풍구 구멍 안에 다 들어가는 줄 아는 큰 개. 여긴 안 와. 눈썹을 넘어 눈을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머리를 넘겨주자 그 손길이 좋은지 머리를 더 수그린 무웅이가 눈을 감고서 대답했다. 어디서부터 쫓아온 건지 당최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확실히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는 것만은 알았다.
"왜 영하랑 같이 안 있어."
"왜 넌 집으로 안 갔어."
"내가 먼저 물었잖아."
"그러니까 먼저 대답해줘."
"그게 무슨 논리야."
"싫어?"
머리를 쓸어 넘기던 손을 조금 더 야윈 것 같은 볼로 옮기자 무웅이 겨울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온다. 강아지 귀가 이 머리칼 사이로 달려 있었다면 아마도 죽은 듯이 아래로 쭉 내려가 있었겠지. 지금 무웅이 표정이 딱 그 꼴이었다. 겨울을 이길 수 없다는 항복의 의사가 얼굴에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가려다가 그냥 돌아왔어. 네가 걱정돼서."
"돌아오는 데 무슨 세 달씩이나 걸려."
"그냥. 일이 좀 있어ㅅ…."
겨울의 손바닥을 제 입술로 가져가 입을 맞추던 무웅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는 듯 눈빛이 확 달라진 그가 황급히 입술을 떼어내더니 겨울의 손목을 가리고 있던 얇은 긴 팔 옷자락을 끌어올렸다. '1' 숫자는 그대로다. 그러나 무웅의 표정은 당황과 충격, 그 사이쯤이었다. 무웅은 안다. 아무리 똑같은 '1'이 새겨져
있더라도 그것이 예전과 같은 숫자가 아님을 안다. 하긴, 내가 남자와 부딪치기 전에 무웅이가 잠시 떠났으니까. 설명하려면 꽤 애를 먹어야 할 것 같아 겨울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게다가 그걸로도 모자라 이젠….
"XX, 윈터야. 너 도대체 누구랑 그렇게 얘기를…."
"뭐냐, 쟨."
"윈터야, 너 팜므파탈이었니?"
첩첩산중이 따로 없지.
갑자기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선 노친네와 남자가 예고에도 없던 무웅의 깜짝 등장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자는 그렇지 않아도 매서운 눈매를 더욱 가늘게 치켜뜨며 겨울과 무웅을 번갈아 보았다. 팜므파탈 소리에 파도치듯 올라가는 한쪽 눈썹이 의아함을 표하고 있어 겨울은 기분이 은근 언짢았다.
그러나 지금은 제 기분의 고저 따위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앞으로 나서려는 무웅을 막는 게 우선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저 둘이 에이블이라는 걸 보자마자 알아버린 이상, 정말 큰 일이 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무웅은 에이블과 마주해서는 절대 안 되었다. 겨울은 우선 이 피 말리는 긴장감부터 어떻게든 해소해야 할 것 같았다.
"멀대야. 그렇게 윈터 뒤에서 개새끼마냥 숨어있지 말고 앞으로 나와서 자기소개라도 좀 해보세요. 어린놈이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네."
"알아서들 해결해. 난 자러 간다."
남자는 정체 모를 침입자의 등장에도 천하 태평했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싶었는지 미련 없이 돌아서는 남자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얄미운 것도 정도가 있지. 일단 급한 불부터 끄려고 노인네를 보는데 상황이 심상치가 않다. 당장에라도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다가는 득달같이 서로에게 달려들 것 같던 무웅과 노인의 접전이 예상된다.
도움이라곤 하나도 되지 않는 남자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무웅이 먼저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무웅아, 괜찮아."
"윈터야, 내가 안 괜찮아."
다소 공격적인 노인네의 언행에 무웅의 숨소리가 급격히 거칠어졌다. 목 뒤로 느껴지는 서늘한 기분이 가실 생각을 않는다. 예감이 좋지 않다. 무웅은 온순한 개처럼 굴다가도 가끔가다가 한순간에 맹수처럼 돌변할 때가 있었다. 골머리를 썩였던 전적이 두어 번 정도 있었던 터라 겨울은 인상을 좀처럼 펼 수가 없다. 이번이 아무래도 세 번째쯤이 될 것만 같았다. 겨울의 촉은 빗나간 적이 거의 없다.
"무웅아."
"죽여도 돼?"
빗나가길 바랐건만.
**
"야, 개새끼. 너 뭐라 그랬냐."
"죽이게 해줘."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무웅은 겨울에게 정말 충실했다. 하지 말라면 하고 싶어도 안 할 아이였고, 죽으라는 한 마디면 주저 없이 제 가슴팍에 칼을 박아넣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무웅이에겐 겨울이 진리이자 절대적인 기준이었다. 겨울이 유독 무웅 앞에서만 말을 가리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 이렇게 별것 아닌 노친네의 말에도 그르렁대며 흥분한 원인이 철저히 저 때문이라는 걸 안다. 선데이가 자신을 욕한 적도 없고 말레타라 무시하거나 득달같이 죽이려 든 적도 없지만, 무웅은 그저 제 절대자가 누구보다 아래에 있는 걸 용납할 수 없었겠지.
"방금 날 죽이겠다고 그런 거야? 어? 개새끼야?"
"겨울아."
겨울에게 허락을 구하는 자세가 딱 당장에라도 목줄을 놓아주길 바라는 가디언의 수호자 꼴이었다. 물론 가디언들이 말 그대로 제 수호자를 목줄로 포박하고 있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었으나, 둘이 한 몸처럼 붙어 다니며 서로를 지키려는 종족 특성상, 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줄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마치 에이블과 말레타가 묶여있는 것처럼.
겨울은 새삼 밀려오는 안쓰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은 몸이라고 해도 외관상으로는 열댓 먹은 소년밖에 되지 않는 선데이를, 단순히 겨울을 깍듯이 모시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숨통을 끊어버리려는 무웅이가 안타까웠고, 미안했다. 암세포 같은 자를 제 신인 양 떠받들어 모시려 드는 무웅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더한 허망함이 쌓여가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별것 아닌 제 존재를 되새기기 싫어 겨울은 어느새 저보다 조금 앞으로 나와 있는 무웅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러지 마."
사실 무웅을 저지하는 데에는 그리 큰 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 한껏 날을 세우던 무웅이 온몸에 힘을 푸는 게 그대로 느껴진다. 큰 덩치가 한 품에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보이지 않던 축 늘어진 귀도 다시금 보이는 것 같다. 노인쯤이야 책 한 권 더 던져주면 된다. 아무리 알파에이블이라고 해도 겨울이 제 소중한 친구의 'M'이라는 것을 아는 이상 제게 큰 해를 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 윈터야. 너 말 한번 잘했다. 너 그러지 마, 개새끼야. 자기소개 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내가 그렇게 힘든 거 시키든?"
"얜 무웅이야. 박무웅. 다른 건 묻지 마. 그냥 내 편이라는 것만 알면 되잖아."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할 것이지."
이래도 노친네가 작정하고 달려들면 어떻게 하지? 무웅이가 다치는 건 싫지만 그렇다고 무웅이더러 덩달아 같이 싸워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는데…. 겨울은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한 3초 전까지 열심히 했었다. 왜 했나 싶다. 뭐가 이래? 남자고 노인네고 다 이상하다.
"그리고 둘이 떨어져. 보기 싫어."
명령 어린 말투에 무웅의 몸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겨울은 무웅의 등에 제 얼굴을 더 비비며 허리를 감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언제 튀어나가 선데이와 접전을 벌일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데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간다.
"윈터야. 나도 네 말 좀 빌리자."
"나중에 얘기하고 지금은 그냥 가면 ㅇ,"
"너 그러면 안 돼."
처음 들어보는 진지한 노인의 목소리. 겨울은 그 말의 의중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 자꾸만 제 안을 울린다.
그러면 안 된다니….
도대체 뭘?
되묻기도 전에 선데이는 이미 방을 나선다.
**
"근처에 있을 거야. 부르면 바로 올게."
"더 있다가 가."
적어도 무웅이가 있을 때는 영하 생각을 안 할 수가 있다. 누워있는 지금도 습관처럼 허리를 끌어안은 무웅이의 팔을 조금 더 잡아당겼다. 순순히 이끌려오는 것이 귀여워 겨울은 그의 손등을 잡아 들어 입술을 맞췄다. 안전띠를 맨 것 같은 포근한 느낌이 좋았다. 맨살끼리 부딪치는 느낌엔 야릇함보단 평온함이 더했다.
겨울은 가지 말라는 바람을 가득 담아 무웅의 손을 꽉 잡았다. 이렇게 계속 잡고 있으면 무웅이는 아마도 계속 여기 있겠지.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제 사람 같다가도 정작 제 곁에 둘 수 없는 아이러니한 아이였다. 겨울은 계속해서
무웅을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채 사라지지 못한 미련을 가득 안고서 다시 놓아주기로 했다.
바닥에 이리저리 널린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은 무웅이가 한눈에 봐도 더워 보이는 니트를 마지막으로 입는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겨울이 누워있는 침대 가로 걸어온다. 곳곳이 헤져 구멍이 송송 난 보랏빛 니트 사이로 맨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열대 못지않은 날씨에 퍽 어울리는 차림새가 웃겨 입가에 미소를 띠었더니 무웅은 그걸 또 따라 웃는다. 저걸 내가 언제 사줬더라. 첫 아르바이트비 받은 날이었나? 겨울은 얼마 없는 행복한 기억을 뒤져 옷을 사러 간 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옆엔 영하가 있었다.
"언제까지 입을 작정이야."
"못 입을 때까지."
"지금이 그때인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어?"
"응. 안 들어."
"안 더워? 맞다. 너 더위 안 탄다 그랬지."
"응. 땀 안 나잖아."
"아까는 다 벗었는데도 났잖아."
"너랑 잘 때는 나."
"땀나는 것도 때를 가려서 나?"
"응. 안 날 수가 없잖아. 네가 내 위에서 그렇게 야하게 울어대니까 몸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는걸."
가끔 순진한 얼굴로 이렇게 노골적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무웅을 보면 겨울은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곤 한다. 무웅이 가진 순수의 이면이라고 해야 할지. 거침없다. 하긴. 무웅이 주저하는 게 더 이상한 것 같다. 애초에 우리 관계에 망설임이 있는 게 이상하지.
[네가 날 살렸잖아. 내가 네 것인 게 당연한걸.]
그 언젠가 무웅이가 겨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관계의 정립은 꽤 쉬운 일이었다. 무웅이는 절대적으로 겨울에게 헌신하는 존재였고, 겨울은 그런 무웅이가 불시에 올 때마다 그가 표하는 헌신을 받아주는 말레타였다.
"정말 영하한테 안 가도 괜찮아?"
"M이 여기 있잖아. 당분간 갈 일은 없을 거야."
무웅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사실 턴 것도 아니다. 겨울이 M을 만난 것도 무웅이 직접 그녀의 손목을 확인해서 알아낸 사실이고 하니까. 지금 함께 있는 남자가 제 M이라는 말만 꺼내놓은 상태다. 사실 이것도 별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저 둘을 보호할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무웅이가 에이블을 극도로 혐오한다고 해도 제 M인 에이블을 죽일 수는 없을 테니.
"무슨 일 있으면 알지?"
"부를게."
무웅은 아무래도 겨울을 향한 근심을 멈출 수가 없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평생이 되겠지.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를 부른다. 그것은 그들의 인사말이었다. 아무도 믿고 싶지 않은 겨울이 건네는 몇 없는 신뢰의 표식.
"착하다."
무웅이 살짝 미소 지으며 겨울을 뚫어지라 바라본다.
"이리와, 무웅아."
말이 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다가온 무웅이 침대 같지도 않은 매트리스 위에 앉은 겨울의 눈높이에 맞춰 양쪽 무릎을 꿇었다. 몇 없는 신뢰, 어쩌면 이제는 하나 남은 제 편일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겨울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영하도 언제나 같은 눈이었는데….
"…무웅아."
"키스해 줘."
"……."
"해 줘, 겨울아."
"…묻지 않아도 된다는 거 알잖아."
"응. 알아. 그냥 꺼내보고 싶었어."
매트리스 위에 양손을 받치고 그사이에 겨울을 가둔 무웅이 조심스레 고개를 올린다. 어느새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위로 무웅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길게 내리뻗은 머리칼 틈으로 보이는 것은 순수한 강아지 같은 눈매가 아닌 먹잇감을 노려 한껏 강인해진 맹수의 시선이었다. 섹시하다, 우리 무웅이. 비에 말랐다가 금세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칼을 다시금 넘겨주며 살짝 벌린 그의 입술로 다가갔다. 가볍게 붙었다 떨어지던 입술 사이로 오고 가는 숨결이 다소 거칠어진다. 뱉어내는 숨소리가 야하게 짝이 없다.
가슴팍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던 얇은 이불자락이 거칠게 내려갔다.
"더 있다 갈래."
그러게 내 말 들으라니까. 달빛이 고스란히 무웅의 회색빛 머릿결 위로 비쳐 밝게 빛을 냈다.
겨울은 생각한다.
펜들럼의 빛이 내게 닿는다.
나는 절대 가질 수 없는, 어둠뿐인 말레타가 꿈꾸는 그런 빛이….